라. 기원과 편년
고구려 적석총의 기원에 관하여는 일제시대부터 논의되기 시작하였는데, 석관묘 기원설·지석묘 기원설·원시 돌각담무덤 기원설 등이 있다. 1973년에 와서 고구려의 적석총은 고조선시기인 요동의 老鐵山·將軍山의 돌각담무덤이 崗上·樓上·双陀子의 돌각담무덤으로 이어지고, 이것은 다시 長慈江 유역의 돌각담무덤으로 계승된다고 하여 앞의 기원설을 부정하였다.514)
또 이와는 달리 田村晃一은 集安의 五道嶺 溝門, 寬甸縣의 太平哨公社 泡子沿大隊·長甸公社 四平街大隊, 鳳城縣의 弟兄山公社 三家子大隊 등지에서 청동유물이 나온 적석총이 고구려 적석총의 기원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처럼 적석총에서 細形銅劍이 출토되고 있어서 종래 기원 전후시기로 보려던 견해는 수정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리고 적석총은 3세기 이후 封土墳의 출현과 더불어 공존하다가 5세기 초 장군총을 끝으로 봉토분과 대체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적석총의 기원과 고구려의 건국 시기에 관한 문제이다. 학계에서는 고구려의 건국 시기에 대하여≪三國史記≫등의 기사를 근거로 하여 기원 전후시기로 보아왔던 것이 통설이었으나, 근년에 李基白이≪三國志≫東夷傳 東沃沮傳의 압록강 유역에 있던 제일 玄菟郡이 기원전 75년에 蘇子河 유역으로 옮겨간 기사를 근거로 하여 이미 고구려의 존재는 기원전 75년이나 그 이전인 기원전 107년까지 올라가야 된다고 주장하였다.515) 필자도 이 견해에 찬동하는 바이며, 앞의 압록강 유역의 집안에서 丹東까지 청동기를 출토하는 적석총은 바로 고구려의 근거지라고 믿어지고, 현토군의 首縣인 고구려현은 한무제가 관할하에 두고자 하였던 고구려의 성읍국가 단계라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집안의 五道嶺 溝門 적석총의 연대는 기원전 3세기까지 올려 볼 수 있는 초기의 적석총임이 이미 밝혀졌다. 그러므로 압록강 유역에 분포하고 있는 적석총의 시기는 이 시기 이후부터 편년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