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옹관묘
甕棺墓는 옹관만으로 독립 묘제로 존재하는 경우와 다른 묘제의 副從的인 묘로서 존재하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전자는 대단히 희귀하고, 보통은 후자의 경우이다.
한강 유역에서의 옹관은 가락동 2호분의 분구 내의 하나의 매장시설로서 3기의 다른 형식의 매장시설과 함께 들어있는 형식이다. 일반적으로 옹관의 형식에는 옹의 입을 어떻게 막았느냐에 따라 合蓋式과 合口式으로 분류하고, 옹을 몇 개 사용하였는가에 따라 單甕式·二甕式·三甕式으로 분류하기도 하며, 또 옹을 어떤 형태로 매장하였느냐에 따라 直立式·斜立式·橫臥式 등으로 분류한다. 금강 유역에서 발견되는 옹관묘도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여러 종류로 분류된다.
부여와의 경계지점인 공주 南山里에서는 길이 1.8m, 너비 90cm, 깊이 40cm의 토광 속에 器高 31cm의 廣口平底壺 2개를 합구하여 관을 형성하였는데, 토기는 瓦質土器로 3세기경으로 추정된다.550)
부여 鹽倉里에서는 지표 아래 30cm 깊이에 길이 1.5m, 폭 1.1m, 깊이 1.2m의 U자형 토광 안에 기고 97cm의 大形壺를 橫臥시키고 구부에는 廣口壺를 합개한 형식이 조사되었다. 호안에서는 금동이식 1쌍, 구슬 2개, 여성치아 20여 개가 발견되었다. 이 옹관묘는 북쪽으로 3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평사천정식의 판석조석실분과 같은 분구 안에 매장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실에는 夫, 옹관에는 婦를 각각 매장한 것으로 생각된다.551)
능산리에서는 대형호에 대형의 器臺를 蓋로 사용한 형식도 발견되었다.552)
공주 熊津洞 두리봉의 남사면에서 발견된 옹관묘 1호는 석비례층을 길이 1.5m, 폭 38cm, 깊이 1.1m의 토광을 파고, 남측벽만 석벽을 쌓은 후, 壙속에 小形甕 3개를 직립 안치시켰다. 옹관묘 9호는 평면 방형의 소형 석곽안에 1개의 甕만을 매장하여 蓋石을 덮고, 봉토를 덮은 형식도 발견되었다.553)
이상의 여러 형식의 옹관에 사용된 토기는 일상생활용의 甕 또는 壺를 관으로 전용한 것들이다. 壺를 주로 사용한 棺과 墓用 甕을 사용한 옹관을 구분하기 위하여 壺棺墓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한다.554)
삼국시대 옹관묘 중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영산강 하류지방의 옹관토축묘의 존재이다.555) 羅州郡 潘南面과 靈岩郡 始終面일대에 다수 분포되어 있는 이들 묘는 거대한 분구 속에 대형옹관 여러 基·토장·부석장·부탄장 등이 함께 多葬으로 형성된 특이한 분묘이다. 연대는 3∼6세기로 추정된다.556) 이들 옹관토축묘의 조영 집단은 삼국시대의 백제나 또 그 전대의 마한과는 다른 문화 집단으로 보여진다5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