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횡혈식석실분
백제의 橫穴式 석실분은 다음의 3종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한강 유역의 중곡동·능동에서 발견된 장방형의 橫口式이 있으며, 둘째로 석촌동·가락동·방이동 등지에서 발견된 횡혈식의 궁륭상천정식 등 전기의 석실분이 있다. 그리고 셋째로 금강 유역의 공주와 부여, 만경강 유역의 전주지방, 영산강 유역의 나주 해남 등지에서 발견된 판석조 횡혈식 등이 있다. 이 중 연대가 올라가는 것은 중곡동 乙墳·가락동 4호분·5호분·6호분 등인데, 중곡동 을분은 장방형의 묘실에 평천정 형식으로 연도가 짧은 횡혈식으로 보이지만 오히려 橫口式 석실로 분류하여야 할 것 같으며 고식을 지니고 있다.559)
가락동 4호분은 묘실의 평면이 矩形으로 연도가 동벽과 남벽의 隅角에 설치되어 일반에서 벗어 난 형식을 하고, 천정은 평천정식을 따르고 있다. 5호분은 묘실의 평면이 방형에 가까운 장방형이고, 연도를 남벽 중앙에, 천정은 평천정식이며, 벽체는 얇은 괴석으로 쌓았는데, 전체적으로 南井里 119호분과 많이 닮아 있다. 연대는 4호분은 백제 초기로, 5호분은 4세기대로 각각 추정하고 있다.560) 그러나 5호분과 6호분은 남정리 119호분과 흡사한 양상을 보이고 있어, 늦어도 4세기대 위로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또한 한강 유역에서는 이들 석실분보다 연대가 올라가는 初傳의 미숙한 형태의 석실분이 만들어졌을 것으로도 추측된다. 가락동의 초기의 석실분은 대방군 지역에서 영향받았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왜냐하면 3세기 후반 고이왕 이후 4세기 중엽 근초고왕대까지 백제는 낙랑·고구려와는 늘 전쟁상태에 머물러 있으나 대방군과는 혼인을 하는(책계왕) 등 화평과 협조가 지속되고 있어서, 이때 대방군의 선진문물이 백제로 많이 흘러 들어왔을 것으로 추측된다.561)
화성 백곡리 석실분은 한강 유역의 석실분과는 달리 서해안 가까운 해발 100여 m의 山 정상 부근에 위치하며, 석실은 평면이 장방형이나 한쪽 단벽은 반원형으로 처리한 수혈식 석실분이다. 대략 4세기대 축조로 보이는 이들 석실분은 바닥을 판상석으로 먼저 깔고 그 위에 벽체를 축조하고 천정은 벽상단에서 긴 돌을 안으로 빼면서 내경하여 일종의 평사식 천정을 구성하였다. 유물에는 와질토기와 경질토기가 함께 나오며 단갑의 존재도 인정된다. 석실평면의 일변을 반원형으로 처리한 구조형식은 아직 한반도에서는 보고된 일이 없는 새로운 형식으로 그 계통이 주목된다
板石造 석실분인 금강 유역의 고분은 공주의 錦洞과 柿木洞에서 발견되었는데, 잘 다듬은 판석으로 4벽과 천정을 구성하고, 천정은 판석 2매를 양쪽에서 내경시켜 상단이 맞닿게 한 형식으로 단면이 “△”자형으로 아직까지 볼 수 없었던 斜天井式(맛배식)이다. 그리고 대체로 남벽의 중앙에 짧은 연도를 설치하였다. 이 형식은 後漢代에서 유행한 바 있고,562) 고구려의 평양 高山里 10호분에서도 약간 보인 적이 있다563). 그러나 고구려에서 크게 유행한 일이 없으므로 공주의 것은 중국에서 유입된 것으로 보여진다.
泗沘시대로 넘어오면 공주에서 보였던 전축분이라든가 사천정식 석실분은 사라지고, 오직 판석조 석실분 중 평사천정식 석실분만이 유일한 형식으로서 유행하게 되었다. 평사천정식은 평면과 연도 재료는 앞의 사천정식 석실과 같으나 천정형식만이 상이하다. 벽체의 상면에서 長臺石이나 판석으로 내경하고 그 위에 다시 판석을 올려 덮어서 천정을 완성하는 형식이다. 따라서 천정의 단면이 ⌬형으로 되었다. 이 형식의 석실은 논산·익산·전주·정주지방을 거쳐 영산강 유역으로 확산되어 갔는데, 연대는 대략 6세기 후반 이후로 추정된다.
사비시기의 왕릉군은 부여 陵山里 고분군이 대표적이다. 1호분(東下塚)은 여러 측면에서 특별한 고분이다. 우선 구조면에서 현실의 평면은 장방형이고 벽체와 천정은 대형 판석을 물갈이하여 1매만으로 한 벽과 천정에 사용하였으며, 천정은 완전한 平天井式이다. 羨道는 평양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길고 내외 二重 구역의 연도로 구성하였다. 외연도의 벽은 판석이 아니라 模塼石으로 쌓고, 그 위에 두껍게 白灰발이를 하였다. 관대도 모전석으로 처음에는 1인용으로 하였다가 후대에 2인용으로 확장한 흔적이 보인다. 棺臺下로부터 배수로를 길게 고분의 전면까지 뽑았는데, 단면을 V자형으로 파고 그 안에 모래와 잔자갈을 채우고, 상면은 모전석으로 덮었다. 이러한 배수로는 평사천정식 구조의 석실에서는 일반적인데, 그것은 이들 형식의 석실이 완전히 지하에 축조되는 지하식이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 고분의 또 하나의 특색은 4면 벽과 천정에 벽화가 그려져 있는 것이다. 동벽에 靑龍, 서벽에 白虎, 북벽에 玄武, 남벽에 朱雀, 그리고 천정에 流雲文과 蓮花文을 각각 배치하고 유려한 필치로 그렸다. 공주 송산리 6호분의 四神圖와 함께 고구려의 영향으로 추측된다.
능산리 제2호분(中下塚)은 판석 대신에 잘 다듬은 장대석으로 묘실을 축조하였다. 구조는 현실의 평면은 장방형이고, 연도는 남벽 중앙에 부설하였다. 현실의 천정형식은 터널(아취형)형식이고, 연도부의 천정은 평천정식으로 하였다. 이 형식의 천정은 능산리의 遞馬所大塚에서도 한 예를 볼 수 있었는데, 여기서는 대강 다듬은 장대석을 사용하고, 짧은 연도가 동벽에 치우쳐 부설된 점이 다르다. 이들 두 고분 외에는 부여지방뿐만 아니라 다른 석실분 밀집지역에서도 발견되지 않은 형식인데, 송산리의 6호분이나 무령왕릉의 터널식 천정과 같은 형식의 계통으로 보인다. 부여 천도 직후에 축조되어 아직 송산리의 형식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능산리 고분군중에서 위에서 설명한 1호분 2호분을 제외한 다른 고분들은 모두 천정형식에서만 차이를 보이는데, 판석조의 평사천정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평사천정식의 석실분은 부여의 전지역과 논산·익산 이남의 호남지역에서 판석조와 할석조·괴석조 등 재료에 관계없이 거의 전 석실분에서 나타나는데, 백제의 후기인 사비시대에 주 묘제의 형식으로서 크게 유행한 듯 하다.564)
백제의 횡혈식 석실분이 유입되어 유행하여 가던 기간은 3세기 후반으로부터 4세기 중엽에 해당된다. 이 기간은 한마디로 고대국가가 완성되는 기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3세기 중엽 이후 古爾王시대(234∼285)에는 官制를 정비하고 법령을 제정하여 국가의 기틀을 튼튼히 하고, 西晋에 사신을 보내어 최초로 중국과 교통을 열었다. 責稽王(286∼294)은 帶方郡王의 女를 취하여 왕비로 삼는 등 적극적으로 대방과 친교정책을 펴는 한편, 낙랑군과는 전쟁에 준하는 불화가 계속되었는데, 백제는 이 기간에 대방군을 통하여 중국의 선진문물을 직접 흡수하여 문화가 발달하여 가는 계기가 마련된 듯 하다. 汾西王에서 比流王과 契王을 거쳐 근초고왕에 이르는 약 50여 년간은 낙랑군과는 긴장이 계속되나 신라와는 화평을 이룩하게 되었다. 근초고왕시대(346∼374)에는 대외적으로는 대고구려 전쟁을 주도적으로 유리하게 이끌고, 晋과의 친교를 두터이 하고, 신라와도 계속 화평을 유지하였다. 대내적으로는 대고구려전을 좀더 유리하게 수행하기 위하여 前進的으로 漢山으로 천도하고, 高興의≪書記≫편찬 사업 등이 있어 백제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기를 맞이하였다. 역시 백제에서도 고이왕 이후 관제정비를 계기로 꾸준히 성장한 귀족관료층이 대방군을 통하여 흡수한 선진문화의 토대 위에 새로운 국가의 기운이 일어나는 분위기 속에서 원시적이고 多岐的인 묘제를 경제적이고 발전적인 묘제인 횡혈식 석실로 묘제형식을 통일하여 보급해 나간 듯 보인다.565)
559) | 姜仁求,<新羅の墓制變遷と紀年問題>(≪古文化談叢 第30集 小田富士雄 代表還曆紀念論集≫1, 九州古文化硏究所, 1993), 29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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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0) | 小田富士雄,<橫穴式石室の導入とその源流>(≪朝鮮三國と倭國≫, 學生社, 1980), 287∼291쪽. |
561) | 姜仁求,<考古學측면에서 본 三國時代 時期區分問題>(≪韓國史學≫16,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5), 104쪽. |
562) | 평사천정식은 漢代의 塼室墓에서 유행하였다. 河南省文化局文物工作隊,<一九五五年洛陽澗西區小型漢墓發掘報告>(≪考古學報≫1959-2). |
563) | 김원용,≪한국의 고분≫(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4), 107쪽. |
564) | 능산리 고분군에 대하여는 일제시대의 조사보고서에 실려 있다. 朝鮮總督府,≪昭和二年度朝鮮古蹟調査報告≫第二冊(≪昭和十二年度朝鮮古蹟調査報告≫). 姜仁求, 앞의 책(1976). |
565) | 姜仁求, 앞의 글(1995), 104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