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기원과 편년
적석목곽분은 신라지역 외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그 祖型과 조형으로부터 발전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도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고, 정형화된 典型 고분만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기원을 밝히기가 대단히 어렵다. 따라서 기원을 구명하기 위해서는 고분을 구성한 요소별로 분석하여 추구하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다. 적석목곽분 특히 대형에 속하는 고분은 목곽부·적석부·봉토부·호석부 등 4개의 중요한 요소로 형성되었다. 이 4 요소 중 기원을 따질 수 있는 것은 목곽부와 적석부이다. 목곽은 이미 세형동검을 출토하는 토광묘와 前漢鏡·黑陶를 출토하는 목곽토광묘에서 설치·사용한 바가 있는데, 이 목곽에서 온 것으로 추측된다. 적석부는, 고분에서 봉토를 제하면 대략 14∼15m의 방형적석부만이 남는데, 이 형상과 규모는 압록강 유역의 고구려 적석총과 대단히 흡사하여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경주 조양동의 목곽토광묘 5호분에서는 목곽의 상위부분에 두 겹의 적석이 있었고, 또 토광 내의 陷沒部에서도 약간의 돌이 발견된 일이 있어서581) 이것이 양은 적지만 초기의 적석부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582) 그리고 경주 入室里에서 가까운 蔚山郡 農所面 中山里의 적석목곽분은 연대가 올라가는 고식인데 이미 적석부가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었다.583) 경주 적석목곽분의 출현시기는 고구려 적석총이 신라의 경주에 영향을 미친 시기, 즉 기원 후 2∼3세기로 추정된다.584)
581) | 崔鍾圭, 앞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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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2) | 姜仁求, 앞의 글(1991b), 96쪽. |
583) | 昌原大 박물관,<울산중산리유적 2차발굴조사성과>보도자료, 1993. |
584) | 그러나 필자의<적석목곽분 고구려 적석총 기원설>에 대하여 崔秉鉉은<적석목곽분 시베리아 기원설>을 주장하고 있다. 이 설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의 납득할 수 없는 모순을 안고 있다. ①구조상 큰 차이가 있다. 시베리아 목곽분은 지하에 토광을 깊이(지하 6∼7m)파고, 그 안에 대형 목곽을 설치한다. 목곽 위는 지표면 가까이까지 原木을 높게 쌓고, 그 위에 봉토를 올리고 최종으로 적석을 얇게 덮어서 분구를 완성한다. 이에 비해 경주의 적석목곽분은 대형분의 경우, 지면 위에 목곽을 설치하고 그 위에 바로 적석을 올리고 최종으로 봉토를 축조한다. 그러므로 시베리아의 목곽분은 그야말로 목곽분의 구조이고, 적석은 단지 葺石형태로 덮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구조적 차이가 있는 것이다. ②연대상 큰 차이가 있다. 시베리아의 목곽분은 대략 기원전 9∼4세기가 일반적인데 비해, 경주의 적석목곽분의 연대는 崔說에 의하여도 기원후 4세기 정도밖에 올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연대 폭은 1,000년∼1,500년이다. 설사 구조형식이 동일할 경우라고 가정하여도 이만한 연대 폭이 있다면 상호 영향관계는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③남부 시베리아의 파지리크와 경주사이는 너무 거리가 멀다. 비행기가 없던 시대에서는 불가능한 거리이다. 그리고 중간지대인 長城地帶·遼寧省지방·한반도의 서북부지방·중부지방에서 시베리아의 목곽묘와 경주의 적석목곽분과 동일한 형식이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만일 남부 시베리아의 영향을 받았다면 두 지역 사이 경로에 유사한 형식의 흔적이 반드시 유존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설은 김원룡,≪한국의 고분≫(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4, 52∼54쪽)에서 처음으로 내놓았는데, 그 후 이은창도 지지한 바 있다. 姜仁求, 앞의 글(1991b), 96쪽 및 앞의 글(1993). 崔秉鉉,≪新羅古墳硏究≫(一志社, 199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