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토광목곽묘
土壙木槨墓는 앞에서 본 토광목관묘와 같은 다호리·양동리·대성동의 고분군에서와 같은 장소에 분포되어 있다. 그러나 다호리 고분군에서는 토광목관묘가 主이고, 양동리 고분군에서는 토광목관묘가 17기, 토광목곽묘가 287 기로 목곽묘가 주다. 대성동에서는 구역을 달리하여 토광목곽묘는 구릉의 정상부에 수기가 분포되어 있었다.
양동리 토광목곽묘의 구조는, 235호의 경우 묘광의 길이 760cm, 너비 390cm, 현 깊이 116cm, 목곽의 길이 540cm, 너비 320cm, 높이 73cm이다. 장축을 남북으로 취하고 南枕하였다. 출토유물로는 와질토기의 단경호·고배·유개대부장경호 등이 있고, 판상철부 30개·대형 철모(길이 227cm)·철부 환두대도·銅鍑·유리 구슬 등이다. 이 무덤은 규모나 출토 유물면에서 보아 首長墓로 추측되며, 연대는 기원 후 2세기말∼3세기초로 추정된다. 이들 유물은 漢의 낙랑계 유물이라기보다는 부여 등 북방계 유물이라는 점이 주목되는데, 낙랑·대방의 멸망 등 한반도 서북지방의 정세변화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594) 그리고 162호 토광목곽묘에서는 다량의 철기와 함께 2면의 한경과 8면의 倣製鏡이 출토되기도 하였다.595)
대성동 토광목곽묘는, 13호분의 경우 주곽과 부곽이 구비된 토광묘인데, 주곽은 길이 595cm, 너비 390cm, 부곽의 길이 370cm, 너비 400cm이다. 목곽의 바닥 전면에는 朱漆을 하였으며, 출토 유물로는 大形巴形銅器 6개, 璧玉製석촉, 철촉 50개, 대도 2개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3인분 이상의 인골이 확인되었다. 이 고분은 규모의 거대함, 출토유물의 탁월함, 殉葬 등의 양상으로 미루어 적어도 王墓가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 파형동기와 석제품이 일부에서 추측하고 있듯이 倭제품이라고 한다면 당시 금관가야와 왜와의 교통을 짐작하게 하는 것으로 주목된다.5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