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수혈식 석실분
수혈식 석실분은 낙동강 유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데, 부산·김해·대구·창녕·합천·안동·고령 등지에 다수 분포되어 있다. 묘지는 구릉 또는 산능선의 정상부에 입지하며 분구도 거대하게 축조하여 장엄한 외관을 자랑한다. 석실은 반지상식 또는 지상식이 많으며, 석실의 형태는 細長形과 장방형의 두 종류가 있다. 석실의 존재 형태상으로 볼 때, 하나의 분구 내에 하나의 석실만을 배치한 것, 하나의 분구 내에 두 기의 석실을 T자형 또는 Ⅱ자형으로 배치한 것, 하나의 분구 내에 세장형 석실과 횡혈식 석실을 함께 배치한 것 등이 있고, 또 主室의 장축 방향으로 副室을 조영한 것 등이 있다. 석실은 괴석이나 할석으로 4벽을 수직으로 축조하고 그 상단에 수매의 판상석을 덮어 평천정식을 이루었다. 그러나 부산 복천동의 경우는 부실을 주실과는 달리 토광목곽의 형태로 한 것도 있다.
대구 內唐洞 51호분은 하나의 분구 내에 주석실과 부석실을 T자형으로 배치한 형식인데, 지상식이다.602) 부산 福泉洞 11호분은 주석실과 土壙副室로 형성된 석실분이다. 주실의 크기는 길이 430cm, 너비 150cm, 깊이 220∼320cm이고, 부실은 길이 600cm, 너비 350cm, 깊이 150∼200cm의 수직토광으로 되었다. 大邱 不老洞 古墳(解顔面 1호분)은 석실의 길이 805cm, 너비 120cm, 깊이 220cm인데, 석실의 중간에 界壁을 설치하여 주·부실을 구성하였다.603) 高靈 池山洞 44호분의 제1주석실은 길이 940cm, 너비 175cm, 높이 210cm이며, 옆에는 제2·제3석실과 주위에 32기의 석곽을 배치하였다.604)
장방형 석실의 기원은 석곽묘와 같이 고구려 적석총의 곽실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에서는 지석묘의 하부구조라든가 선사시대의 석곽묘의 석곽이 크게 자라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고분의 구조는 편의에 따라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때 그 때 선진지역으로부터 새로운 양식·형식이 들어와 정착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중국의 황하 유역으로부터 遼河와 요동반도를 거쳐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낙동강 유역의 세장형 석실은 발견되지 않는다. 중국지역에서는 오로지 양자강 유역에 특정적으로 분포하는 石室土墩墓의 석실에서 유사한 형식을 발견할 수 있다. 석실의 길이 대 너비의 比가 낙동강 유역의 세장형과 같아 역시 土葬土墩墓와 함께 한반도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