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대09권 통일신라Ⅰ. 삼국통일1. 삼국통일 과정2) 대여제항쟁과 나당군사동맹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1. 삼국통일 과정
          • 1) 7세기 신라의 내정변화
          • 2) 대여제항쟁과 나당군사동맹
            • (1) 대여제항쟁
            • (2) 나당군사동맹
          • 3) 백제의 패망과 부흥운동
            • (1) 백제의 패망
            • (2) 백제국 부흥운동의 진압
            • (3) 새로운 나제관계
          • 4) 고구려의 패망과 부흥운동
            • (1) 고구려의 패망
            • (2) 고구려국 부흥운동
          • 5) 대당전쟁
            • (1) 대당전쟁의 원인
            • (2) 대당전쟁의 승리
        • 2.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의
          • 1) 민족융합의 문제
          • 2)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의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1. 무열왕계의 왕권확립
          • 1) 문무왕의 왕권강화
          • 2) 김흠돌란의 발생
          • 3) 신문왕의 개혁정치
        • 2. 전제왕권과 귀족
        • 3. 중앙통치조직의 정비
          • 1) 중앙통치조직의 정비과정
          • 2) 중앙통치조직
          • 3) 내정기관의 정비
          • 4) 재상제도의 운영
        • 4. 지방·군사제도의 재편성
          • 1) 9주 5소경
          • 2) 군사조직
            • (1) 중앙의 군사조직
            • (2) 지방의 군사조직
          • 3) 진과 성곽시설
        • 5. 토지제도의 정비와 조세제도
          • 1) 토지제도
            • (1) 관료전
            • (2) 녹읍
            • (3) 정전·연수유전답
          • 2) 조세제도
            • (1) 전조
            • (2) 호조
            • (3) 부역
      • Ⅲ. 경제와 사회
        • 1. 수공업과 상업의 발달
          • 1) 수공업의 발달
            • (1) 궁중수공업과 관영수공업
            • (2) 민간수공업
            • (3) 각종 수공업 기술의 발달
          • 2) 상업의 발달
            • (1) 국내 상업
            • (2) 대외교역
        • 2. 귀족의 경제기반
          • 1) 사유지와 목장
          • 2) 식읍
          • 3) 녹읍과 녹봉
          • 4) 문무관료전
        • 3. 농민의 생활
          • 1) 신라장적
            • (1) 문서의 성격과 작성연도
            • (2) 신라장적과 농민생활
          • 2) 촌락과 농민의 지위
        • 4. 천민의 생활
          • 1) 향·부곡
          • 2) 노비
        • 5. 의식주 생활
          • 1) 의생활
            • (1) 머리장식
            • (2) 의복
          • 2) 식생활
          • 3) 주생활
      • Ⅳ. 대외관계
        • 1. 당과의 관계
          • 1) 친당외교의 추진
          • 2) 나당 친선외교의 확립
        • 2. 일본과의 관계
          • 1) 7세기 후반∼8세기 일본과의 국가간 교섭
          • 2) 9세기 전반 일본의 사신파견
          • 3) 신라상인에 의한 무역의 전개
          • 4) 9세기 후반 일본의 신라에 대한 경계강화
        • 3. 해상활동
          • 1) 항로의 개척과 항해술의 발전
            • (1) 북방해로(노철산항로)
            • (2) 황해횡단항로
            • (3) 남방해로
            • (4) 선박과 항해술
          • 2) 해외무역
            • (1) 수출품
            • (2) 수입품
            • (3) 일본과의 교역
            • (4) 이슬람과의 교역
          • 3) 당에서의 활동
            • (1) 유학생과 문인의 교유
            • (2) 구법승의 순례
            • (3) 재당신라인과 무역상
      • Ⅴ. 문화
        • 1. 유학과 역사편찬
          • 1) 유학의 발달
            • (1) 성격
            • (2) 유학의 발달
            • (3) 도당유학생의 활동
          • 2) 역사의 편찬
        • 2. 불교철학의 확립
          • 1) 교학의 발달
            • (1) 유식사상
            • (2) 원효 교학
            • (3) 화엄교학
            • (4) 계율학
          • 2) 불교신앙의 일반화
            • (1) 미타신앙
            • (2) 관음신앙
            • (3) 미륵신앙
            • (4) 지장신앙
          • 3) 승려들의 국가적 활동
        • 3. 과학과 기술의 발달
          • 1) 하늘의 과학
            • (1) 첨성대와 천문현상의 기록
            • (2) 천문도의 도입과 천문기관의 발달
            • (3) 해시계와 물시계
            • (4) 역법과 연호
            • (5) 수학과 도량형
          • 2) 땅의 과학과 기술
            • (1) 풍수지리와 지리학
            • (2) 농업기술과 생물 지식
            • (3) 풀·나무·흙의 기술:종이·직물·유리·도자기
            • (4) 쇠붙이의 기술
          • 3) 사람의 과학과 기술
            • (1) 의약학
            • (2) 빙고-얼음의 저장 이용
            • (3) 인쇄술
            • (4) 간단한 기계와 자동 장치
            • (5) 탑과 건축
            • (6) 선박 기술
        • 4. 언어와 문학
          • 1) 이두와 언어
            • (1) 고대국어의 자료와 표기법
            • (2) 차용어
            • (3) 문법
          • 2) 향가
          • 3) 한문학
            • (1) 한문학의 전개
            • (2) 한문학의 의의
        • 5. 예술
          • 1) 회화
          • 2) 서예
            • (1) 초기의 서풍
            • (2) 서풍의 발전
            • (3) 후기의 선풍 글씨
          • 3) 조각
            • (1) 불교조각
            • (2) 탑과 부도의 조각
            • (3) 일반 조각
          • 4) 공예
            • (1) 금속공예
            • (2) 토기 및 와당과 전
          • 5) 건축
            • (1) 사원 건축(목조)
            • (2) 궁실 및 연못
            • (3) 고분
            • (4) 석조건축
            • (5) 성곽
          • 6) 음악
            • (1) 역사적 배경
            • (2) 향악과 향악기
            • (3) 당악과 불교음악의 대두
            • (4) 일본에서의 고려악
          • 7) 무용·체육
            • (1) 무용
            • (2) 체육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2) 대여제항쟁과 나당군사동맹

(1) 대여제항쟁

 4, 5세기의 신라는 고구려를 통하여 前秦과 외교하는 한편 백제·가야·왜 등을 견제하여 자국의 성장을 도모하였다. 그런데 고구려가 長壽王 15년(427) 평양천도를 단행하자 더욱 위협을 느낀 것은 백제였다. 이에 신라는 백제의 제의에 동감하여 訥祗王 17년(433) 羅濟共守同盟을 맺었다. 이 동맹은 고구려의 남진을 신라·백제가 공동방어하는 동시에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을 배제하고 독자성을 표방한 것이었다.

 신라와 고구려간의 최초 충돌은 눌지왕 34년이었지만 이때 고구려는 신라와 修好國임을 강조했고 신라는 공손한 말로 사과했다는 것이다.0018) 이후 고구려의 신라 침공이 계속되었으나 신라 炤知王 3년(481)의 彌秩夫(興海)전투를 고비로 점차 신라의 반격에 밀려 후퇴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 시기에는 나제간에 상호 원병이 효과를 거두었지만, 中原高句麗碑의 건립 추정연대가 소지왕 3년인 점을 고려하면 5세기말까지 고구려는 역시 신라의 두려운 존재였을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 장수왕 63년(475)에 百濟 漢城이 고구려군에 의해 함락되고 蓋鹵王이 전사했지만, 백제와 동맹국으로서의 신라는 고구려와 곧 대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진흥왕 12년(551)에는 백제군과 나란히 北進하여 신라는 고구려 10郡을 정복했고 백제는 한강하류의 6군을 탈환하였다. 그런데 진흥왕 14년에 백제로부터 이 6군을 탈취함으로써 나제동맹은 파기되고 삼국의 相互抗爭期로 접어들었다. 이 시기 고구려는 귀족간의 정쟁과 밖으로 突厥의 위협으로 인해 南顧의 여지가 없었던 상황이나,0019) 신라는 한강유역을 확보하여 통일기반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백제간의 국경을 차단함으로써 양국의 침공을 받게 되어 신라는 孤立을 면할 수 없었다. 6세기 후반은 삼국간의 전쟁이 소강상태였으나, 7세기 전반에 신라·고구려 사이에는 5차례의 격돌이 나타나 있다.

연도 신라 교전 고구려 교 전 지 역 전 황
603 眞平 25 嬰陽 14 北漢山城 진평왕이 率兵하고 漢水를 건너서 항전하니 高句麗軍 퇴각.
608 眞平 30 嬰陽 19 新羅北境, 牛鳴山城 고구려군이 침습하여 8천 인을 노획하고 신라 우명산성도 함락.
629 眞平 51 榮留 12 高句麗 娘臂城 신라군이 娘臂城을 함락하고 참살 5천.
638 善德 7 榮留 21 七重城外 고구려군 퇴각.
655 武烈 2 寶臧 14 新羅北境 고구려·백제·말갈 침입, 신라 33城을 함락

<표 1>7세기 羅麗交戰

 이 시기 고구려는 수·당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방어하여 중국과 대등한 자존적 입장을 취하면서 北守南進의 자세로 다시 신라를 침공했던 것 같다. 처음은 北漢山城을 침공해 왔고, 다음은 신라 북경을 침입하여 8천 인을 포로해 갔고 牛鳴山城을 함락하였다. 이 두 차례의 침입이 5년의 간극을 두었으나 모두 고구려 영양왕 때 사실이고 고구려의 대수전쟁기간이라는 면에서도 주목된다. 수의 침략을 방어하면서 고구려는 한강유역을 재탈환하려는 의도였던 듯하다. 특히 溫達장군이 빼앗긴 雞立峴·竹嶺 以西지역을 회복하기 위해 출정했다가 阿且城 밑에서 전사한 것도 영양왕 때의 일이었다.0020) 또 선덕여왕 7년(638)에 七重城(積城)을 침입한 고구려군은 알천의 군이 격퇴하였다. 또 태종무열왕 2년(655)에 고구려·백제·말갈이 連兵하여 북경의 33성을 습취해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갈은 고구려에 복속된 부류이며 麗濟의 連兵이라는 기록이 문제된다. 흔히 이 시기에 고구려와 백제가 동맹했다고 서술하지만 이는 신라의 對唐外交과정에서 교묘히 날조된 것이며, 실은 고구려와 백제가 각각 신라 변경을 침입하여 도합 30여 성을 습취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0021) 이에 반하여 신라가 고구려를 공격한 예는 진평왕 51년(629)에 娘臂城을 함락하여 5천여 명을 참살했다는 것이 유일한 전과이다.

 이상≪三國史記≫에 나타난 羅麗간의 항쟁에서, 진흥왕 12년부터 진평왕 24년 사이에는 전쟁이 없고, 7세기 전반 50여 년간에 5∼6회의 전쟁뿐이며 접전지역도 북한산성·칠중성이므로 낭비성 또한 북방이라 추측된다.0022) 따라서 신라는 고구려의 北守南進을 방어하여 확장된 북경을 착실히 수호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7세기에 접어들면서 백제와의 항쟁은 더욱 격렬하고 심각했다.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탈환한 한강하류를 신라가 진흥왕 14년(553)에 탈취함으로써 동맹이 파기되고 적대관계로 돌변하였다. 이에 격분한 백제 聖王은 재위 32년(554)에 3만 군으로 신라 管山城(沃川)을 침공하였으나 신라의 선방으로 참패하면서 백제는 거의 50여 년간 신라와 항전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즉 6세기 후반에는 단지 威德王 24년(577)·25년의 공방전이 보일 뿐이다. 그러나 진평왕 24년부터 무열왕 2년까지는 총 25회의 전쟁에서 백제의 선제공격이 20회, 신라의 선제공격이 5회이므로 백제의 침공이 압도적이었다. 이 시기는 백제 武王·義慈王代이고, 신라에서는 진평왕·선덕여왕·진덕여왕대에 해당하여 신라는 내적인 권력투쟁과 왕권다툼이 계속되었던 관계로 백제의 도발에 적극 대처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나제 양국관계가 긴박해짐에 따라 국경에 築城이 더욱 많았을 것인데, 신라 眞智王 2년(577)에는 內利西城을 쌓아 梗蒜城·麻知城과 나란히 하여 백제의 침공을 방어코자 했더니, 백제에서는 熊峴城·松述城을 쌓아 위의 신라 성과 맞선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격렬한 신라·백제간의 실전을 살피면 花郞徒를 비롯한 당시 젊은이들이 圓光의 世俗五戒 중「臨戰無退」를 護國의 시대정신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진평왕 24년의 阿莫城전투에서는 貴山과 箒項이 분전하다가 전사하였다. 또 진평왕 33년에는 椵岑城(居昌郡?)에 침입한 백제군과 100일 동안 싸우다가 縣令 讚德 등이 전사하고 성도 함몰되었다. 이에 北漢山城主 邊品은 진평왕 40년에 가잠성 탈환작전을 전개했는데 찬덕의 아들 奚論이 20여 세로 종군하여 전사했다는 것이다. 또 진평왕 46년에는 백제군이 신라의 速含(咸陽郡) 등 6城을 침공하였는데 급찬 訥催가 城兵과 함께 역전했지만 눌최는 전사하고 6성도 함락당했다.

 당시 신라정부는 上州·下州·貴幢·法幢·誓幢의 5軍을 동원하여 구원케 했지만, 백제군의 당당함을 겁내어 진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눌최의 武勇과 대조되는 한편 5군의 작전이 歸一되지 못하고 사기가 저하되어 있었던 점을 볼 수 있어서, 전세가 신라쪽에 불리하게 나타나 있다. 이 같이 해이한 수세로 인하여, 善德女王 11년(642)에는 國西의 40여 성을 백제에게 빼앗기고, 이해 8월에는 백제 장군 允忠의 1만 군에게 大耶城(陜川)이 함락되고 都督 品釋 등이 전사하여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되었다. 이런 신라군의 참패는 백제 大軍의 집요한 공격에도 있었겠지만, 신라군 내부의 불화도 큰 원인이었다. 즉 품석은 그 幕客인 黔日에게 원한을 샀던 바, 검일이 백제군에게 內應했으며, 품석의 보좌관인 西川은 은밀히 백제군에게 항복할 것을 약속하는 등 대야성군의 내적 불화와 戰意의 상실을 엿볼 수 있다.

연도 신 라 교전 백 제 교 전 지 역 전 황
554 眞興 15 聖王 32 신라 管山城(沃川) 백제 성왕, 4인의 좌평이 전사함과 동시에 3만 명의 군대가 무너집
562 眞興 23 威德 4 신라 國邊 왕이 군사를 내어 백제군 1천 인을 살획함
577 眞智 2 威德 24 신라 西邊 州郡 이찬 世宗이 一善北에서 격파하여 3,700급을 참획.
578 眞智 3 威德 25 백제 閼也山城(礪山) 신라가 알야산성을 공격
602 眞平 24 武王 3 신라 阿莫城(雲峯) 백제군을 대파했으나 貴山·箒項이 전사.
605 眞平 27 武王 6 백제 영역 신라가 發兵하여 백제를 침공.
611 眞平 33 武王 12 신라 椵岑城 100일간 전투, 신라 현령 讚德이 전사. 성이 함몰.
616 眞平 38 武王 17 신라 母山城(雲峯) 백제가 내공.
618 眞平 40 武王 19 백제가 영유한 가잠성 漢山州 軍主 邊品이 가잠성을 회복하려고 침공. 奚論이 전사.
623 眞平 45 威德 24 신라 勒弩縣  
624 眞平 46 威德 25 신라 速含(咸陽)·櫻岑·岐岑·烽岑·旗縣·穴柵 이 6성은 백제군에게 함락·항복하였다. 訥催가 전사.
626 眞平 48 威德 27 신라 主在城 신라 주재성주 東所가 전사.
627 眞平 49 威德 28

 
신라 西邊 2城 백제장군 沙乞이 2성을 함락시키고 300여 인을 포로해 감.
628 眞平 50 威德 29 신라 가잠성 진평왕이 군사로 격퇴
633 善德 2 威德 34 신라 西谷城 백제군이 13일 만에 서곡성 함락
636 善德 5 威德 37 신라 西南邊의 玉門谷(女根谷)·獨山城 근처 신라장군 알천이 백제군 500인을 참살.
642 善德 11. 7 義慈 2 신라 獮猴城 등 40여 성 의자왕이 大兵으로 침공하여 40여 성을 공취해 감
善德 11. 8 義慈 2 신라 大耶城(陜川) 백제장군 允忠군사가 대야성을 攻拔. 도독 品釋과 竹竹·龍石 등이 전사
644 善德 13. 9 義慈 4 백제 7성 대장군 金庾信이 백제 7성을 攻取.
645 善德 14. 1 義慈 4 신라 買利浦城 백제 大軍이 침입하자 대장군 김유신이 반격하여 2,000급 참수.
善德 14. 3 義慈 4 신라 西邊 대장군 김유신이 출정.
善德 14. 5 義慈 4 신라 國西 7성 백제군이 습취해 감.
647 眞德 1.10 義慈 7 신라 茂山·甘勿·桐岑 金庾信의 步騎 1만 명이 방어. 丕寧子·擧眞 전사. 백제병 3천급 참수.
648 眞德 2. 3 義慈 8 신라 腰車城(尙州) 등 10여 성 백제장군 義直이 침습. 김유신군이 3路로 협격하여 격퇴
649 眞德 3. 8 義慈 9 신라 石吐 등 7성

道薩城(天安?) 부근
백제장군 殷相군이 7성을 攻陷. 대장군 김유신과 장군 陳春·竹旨·天存 등 군이 방어하여, 백제 장사 100인·군졸 8,980급 참수. 戰馬 1만필 획득. 병기 무수.
655 武烈 2 義慈 15 신라 北境 33성 고구려·백제·말갈이 연합하여 33성을 공취해 감
660 武烈 7 義慈 20 백제 泗沘城 羅唐聯合軍에게 백제 패망.

<표 2>羅·濟相爭

≪三國史記≫, 新羅本紀를 중심으로 작성.

 또 참패요인에는 城 중심의 방어체제에도 있었다고 본다. 백제는 대병을 동원하여 기습하므로 신라의 여러 성에 흩어져 있는 소수의 守城軍이 방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믿어진다. 따라서 수세에 있던 신라는 대야성전투를 전후하여 적극적 방어와 공세로 전환하기 위해서 군사체제에 새로운 정비가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선덕여왕 13년(644)에는 김유신군이 백제 7城을 습취했고, 그 이듬해에는 백제군 2천 명을 참수했으며, 선덕여왕 14년에는 步·騎 1만 명을 거느린 김유신이 적 3천 명을 참수했다고 하였다. 진덕여왕 2년에 김유신을 押督州(慶山)都督으로 삼은 것은 이 해에 백제장군 義直이 腰車城(尙州)을 침입한 때문이라 했는데, 이는 대야성·加兮城(居昌)지역을 방어하려는 계획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진덕여왕 3년에는 김유신군이 道薩城(天安) 밑에서 백제 장사 100인, 군졸 8,980명을 참했고 戰馬 1만 필을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백제군의 침입은 현재의 경상·충청도의 전 국경선에서 일어났는데 주로 김유신이 방어에 나서고 있는 점은 주목된다. 생각건대 선덕여왕 11년(642) 김춘추가 고구려에 원병외교로 갔을 때 김유신이 군대를 동원했고, 선덕여왕 14년에 당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신라는 3만 군을 동원하여 고구려 남경을 공격하였으며, 선덕여왕 16년 김유신이 비담의 난을 평정하였다. 이러한 과정에 김유신은 1만 명 이상의 大兵을 거느리고 백제의 침입을 방어하는 동시에 金春秋가 후일에 왕위를 획득하는 군사적 기반으로 작용했다고 믿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의 빈번한 침공으로 수세에 몰려 있던 신라는 국방상 위기의식을 느꼈던 것이다.

0018)≪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눌지마립간 34년.
0019)盧泰敦,<高句麗의 漢水流域 喪失의 原因에 대하여>(≪韓國史硏究≫13, 1976), 29∼57쪽.
0020)李基白,<溫達傳의 檢討>(≪白山學報≫3, 1967), 148쪽.
0021)李昊榮,<麗·濟連和說의 檢討>(≪慶熙史學≫9·10합집, 1982), 30쪽.
0022)李元根,<百濟 娘臂城考>(≪史學志≫10, 檀國大, 1976), 11쪽에서 淸州로 비정했고, 李丙燾,≪國譯 三國史記≫(乙酉文化社, 1977), 319쪽에서는 咸鏡道 어느 곳으로 추측했다. 이 낭비성은 최근에 抱川 半月山城이라는 주장이 있어 주목된다(徐榮一,<高句麗 娘臂城考>,≪史學志≫28, 1995, 36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