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대09권 통일신라Ⅰ. 삼국통일1. 삼국통일 과정3) 백제의 패망과 부흥운동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1. 삼국통일 과정
          • 1) 7세기 신라의 내정변화
          • 2) 대여제항쟁과 나당군사동맹
            • (1) 대여제항쟁
            • (2) 나당군사동맹
          • 3) 백제의 패망과 부흥운동
            • (1) 백제의 패망
            • (2) 백제국 부흥운동의 진압
            • (3) 새로운 나제관계
          • 4) 고구려의 패망과 부흥운동
            • (1) 고구려의 패망
            • (2) 고구려국 부흥운동
          • 5) 대당전쟁
            • (1) 대당전쟁의 원인
            • (2) 대당전쟁의 승리
        • 2.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의
          • 1) 민족융합의 문제
          • 2)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의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1. 무열왕계의 왕권확립
          • 1) 문무왕의 왕권강화
          • 2) 김흠돌란의 발생
          • 3) 신문왕의 개혁정치
        • 2. 전제왕권과 귀족
        • 3. 중앙통치조직의 정비
          • 1) 중앙통치조직의 정비과정
          • 2) 중앙통치조직
          • 3) 내정기관의 정비
          • 4) 재상제도의 운영
        • 4. 지방·군사제도의 재편성
          • 1) 9주 5소경
          • 2) 군사조직
            • (1) 중앙의 군사조직
            • (2) 지방의 군사조직
          • 3) 진과 성곽시설
        • 5. 토지제도의 정비와 조세제도
          • 1) 토지제도
            • (1) 관료전
            • (2) 녹읍
            • (3) 정전·연수유전답
          • 2) 조세제도
            • (1) 전조
            • (2) 호조
            • (3) 부역
      • Ⅲ. 경제와 사회
        • 1. 수공업과 상업의 발달
          • 1) 수공업의 발달
            • (1) 궁중수공업과 관영수공업
            • (2) 민간수공업
            • (3) 각종 수공업 기술의 발달
          • 2) 상업의 발달
            • (1) 국내 상업
            • (2) 대외교역
        • 2. 귀족의 경제기반
          • 1) 사유지와 목장
          • 2) 식읍
          • 3) 녹읍과 녹봉
          • 4) 문무관료전
        • 3. 농민의 생활
          • 1) 신라장적
            • (1) 문서의 성격과 작성연도
            • (2) 신라장적과 농민생활
          • 2) 촌락과 농민의 지위
        • 4. 천민의 생활
          • 1) 향·부곡
          • 2) 노비
        • 5. 의식주 생활
          • 1) 의생활
            • (1) 머리장식
            • (2) 의복
          • 2) 식생활
          • 3) 주생활
      • Ⅳ. 대외관계
        • 1. 당과의 관계
          • 1) 친당외교의 추진
          • 2) 나당 친선외교의 확립
        • 2. 일본과의 관계
          • 1) 7세기 후반∼8세기 일본과의 국가간 교섭
          • 2) 9세기 전반 일본의 사신파견
          • 3) 신라상인에 의한 무역의 전개
          • 4) 9세기 후반 일본의 신라에 대한 경계강화
        • 3. 해상활동
          • 1) 항로의 개척과 항해술의 발전
            • (1) 북방해로(노철산항로)
            • (2) 황해횡단항로
            • (3) 남방해로
            • (4) 선박과 항해술
          • 2) 해외무역
            • (1) 수출품
            • (2) 수입품
            • (3) 일본과의 교역
            • (4) 이슬람과의 교역
          • 3) 당에서의 활동
            • (1) 유학생과 문인의 교유
            • (2) 구법승의 순례
            • (3) 재당신라인과 무역상
      • Ⅴ. 문화
        • 1. 유학과 역사편찬
          • 1) 유학의 발달
            • (1) 성격
            • (2) 유학의 발달
            • (3) 도당유학생의 활동
          • 2) 역사의 편찬
        • 2. 불교철학의 확립
          • 1) 교학의 발달
            • (1) 유식사상
            • (2) 원효 교학
            • (3) 화엄교학
            • (4) 계율학
          • 2) 불교신앙의 일반화
            • (1) 미타신앙
            • (2) 관음신앙
            • (3) 미륵신앙
            • (4) 지장신앙
          • 3) 승려들의 국가적 활동
        • 3. 과학과 기술의 발달
          • 1) 하늘의 과학
            • (1) 첨성대와 천문현상의 기록
            • (2) 천문도의 도입과 천문기관의 발달
            • (3) 해시계와 물시계
            • (4) 역법과 연호
            • (5) 수학과 도량형
          • 2) 땅의 과학과 기술
            • (1) 풍수지리와 지리학
            • (2) 농업기술과 생물 지식
            • (3) 풀·나무·흙의 기술:종이·직물·유리·도자기
            • (4) 쇠붙이의 기술
          • 3) 사람의 과학과 기술
            • (1) 의약학
            • (2) 빙고-얼음의 저장 이용
            • (3) 인쇄술
            • (4) 간단한 기계와 자동 장치
            • (5) 탑과 건축
            • (6) 선박 기술
        • 4. 언어와 문학
          • 1) 이두와 언어
            • (1) 고대국어의 자료와 표기법
            • (2) 차용어
            • (3) 문법
          • 2) 향가
          • 3) 한문학
            • (1) 한문학의 전개
            • (2) 한문학의 의의
        • 5. 예술
          • 1) 회화
          • 2) 서예
            • (1) 초기의 서풍
            • (2) 서풍의 발전
            • (3) 후기의 선풍 글씨
          • 3) 조각
            • (1) 불교조각
            • (2) 탑과 부도의 조각
            • (3) 일반 조각
          • 4) 공예
            • (1) 금속공예
            • (2) 토기 및 와당과 전
          • 5) 건축
            • (1) 사원 건축(목조)
            • (2) 궁실 및 연못
            • (3) 고분
            • (4) 석조건축
            • (5) 성곽
          • 6) 음악
            • (1) 역사적 배경
            • (2) 향악과 향악기
            • (3) 당악과 불교음악의 대두
            • (4) 일본에서의 고려악
          • 7) 무용·체육
            • (1) 무용
            • (2) 체육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3) 백제의 패망과 부흥운동

(1) 백제의 패망

 이미 唐 貞觀 22년(진덕여왕 2년, 648)에 나당군사동맹이 이루어졌더라도 양국의 動兵은 좀체로 쉽지 않았다. 당은 정관 19년의 고구려정벌에 실패한 이후 장기전략으로 들어갔고 고구려가 의연히 존재하는 한 백제정벌은 어렵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런데 신라에서는 김춘추가 태종무열왕으로 즉위(654)한 이후 律令政治를 표방하고 왕자인 文王을 中侍로, 김유신을 상대등으로 삼아 자파의 세력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당의 장기전략에 따른 고구려의 대응양상을 통찰한 위에 백제를 先攻하자고 당에 제의했던 듯하다.

 당에서는 고종이 즉위(649)하여 태종의 遺業을 완수하려고 고구려에 대한 침략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열왕 6년 4월에는 백제의 잦은 침범으로 당에「乞師」 했고, 10월에는 청병에 대한 당의 응답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왕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면 나당이 백제를 선공하기로 약속한 시기는 언제쯤일까 하는 문제이다. 우선 나당동맹이 체결된 진덕여왕 2년(648)에는 백제의 선공이 논의되기 어려웠다면, 신라 무열왕과 당 고종이 즉위한 650년부터 654년을 그 논의의 上限으로 고려될 문제라고 본다. 여기에는 그렇게 추단한 몇 가지 단서가 있다.

 신라에서 百濟呑倂이 구체화되기는 무열왕 2년경이다. 김유신이 당시 백제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佐平 任子를 심리적으로 교란시키기 위하여 二重間諜 租未坤을 이용했던 바, 동요하는 임자의 의중을 헤아리고 급히 백제탄병을 꾀했다는 것이다.0030) 이런 謀議가 김유신 개인이 아니라 신라정부 차원에서 획책된 일이라면, 이를 통하여 백제의 형편을 알고 당에게 백제를 선공하자고 제의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수가 백제를 통하여 고구려 내정을 정탐하려 했듯이 신라는 당과 연결되어 적대국의 정보를 교환했을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사실 신라는 일찍부터 백제의 사정을 당에 전하여 당 태종의 백제관을 형성하였던 것인데,0031) 여기서 김유신은 백제가 無道함을 왕에게 말하면서 탄병의 책략을 의논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 북경의 30여 성을 앗아간 무열왕 2년(655)을 주목하여, 무열왕이 당에 구원을 요청하면서 먼저 백제를 공벌하자고 제의하여 당의 內諾을 얻은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0032) 그런데 무열왕 3년·4년의 양년은 당의 고구려 침략이 없었고, 고구려는 보장왕 15년(656) 당의 皇太子冊封 賀使를 보냈다. 당에서는 賀魯의 亂을 맞아 顯慶 2년(657)까지 이를 진압하고 있었다. 한편 신라에서는 진덕여왕 5년(651)에 入唐한 金仁問이 무열왕 3년에 귀국하면서 王子인 文王을 입당시키는데 이는 宿衛로서 당의 황태자책봉 축하의 의미도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무열왕 3년에 문왕을 통하여 백제를 선공하자고 제의했고 당은 현경 2년 12월 蘇定方이 하로를 사로잡은 뒤 확약했을 것이다.0033)

 이렇게 결정된 백제 선공전략은 당의 고구려정벌 장기전략의 연장선상에서 수행되었다. 왜냐하면 정관 19년(645) 이후 당은 장기전략으로 전환하고 소수병력으로 자주 요동을 침공하여 고구려가 피폐하기를 기다리면서 거의 15년간을 지속해 오는 동안 고구려는 물론 백제까지도 이러한 전쟁방식에 길들여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허를 찔러 기습적으로 감행한 작전이 곧 백제선공이라 하겠다. 따라서 현경 3년·4년의 양년에 걸쳐 요동을 공격함으로써 고구려의 관심을 요동으로 집중시키는 한편, 다음해인 현경 5년에는 백제정벌을 단행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신라에서 唐軍의 내도를 고대하던 중 태종무열왕 7년(660;당 고종 顯慶 5년) 3월, 당의 출병을 통보 받았다. 이때 唐軍指揮官으로,

左武衛大將軍 蘇定方;神丘道行軍大摠管 金仁問;神丘道行軍副大摠管 師左驍衛將軍 劉伯英 左武衛將軍 憑士貴 左驍衛將軍 龐孝泰

등이 水·陸 13(10)만 군을 거느리고 6월 18일 萊州(山東半島)를 출발하여 바다로 德勿島(德積島)에 도착해서 여기서 신라의 군지휘관과 만남으로써 실제 나당연합군이 형성된 셈이다.

 한편 신라에서는 5월 26일 왕과 태자 法敏·金庾信·眞珠·天存 등을 장군으로 삼아 大兵을 거느리고 수도 慶州를 출발하여 6월 18일 南川停(利川)에 도착했다. 21일에 법민 등은 兵船 1백 척으로 덕물도로 나아가 당군을 맞아들이는 동시에 법민·소정방 양인은 백제정벌의 구체적 전략을 논의하였다. 결국 신라군은 7월 10일 백제 伎伐浦에서 당군과 합동하여 泗沘城(扶餘)을 공격 입성하기로 전략을 세웠던 듯하다.

 주목되는 것은, 당이 신라왕을 嵎夷道行軍摠管으로 임명한 것 외에 당에서 숙위하고 있었던 金仁問을 당군의 水路를 안내하는 향도역활로서 副大摠管으로 임명한 듯한 것인데, 이는 신라가 藩臣國이었다는 당의 의식 표출이라 믿어진다.

 법민이 소정방과 전력을 의논하고 돌아오자, 법민, 대장군 김유신, 장군 品日·欽春(欽純) 등에게 精兵 5만을 주었으며 왕은 今突城(尙州 白華山)에 住次하였고, 7월 9일 유신이 거느린 신라군은 黃山으로 진군했다. 이러한≪三國史記≫의 기록대로 動兵했다면, 신라 대군이 경주에서 남천정까지 와서 이 중의 5만 정병을 뽑아 다시 남하하여 백제정벌로 들어간 것이다. 여기서 신라군의 百濟征伐 進軍路 문제도 있지만,0034) 대병력이 왜 그렇게 먼 거리를 우회했는지 그 이유가 납득되지 않는다. 이를 긍정하는 입장에서는 ① 唐兵을 영접하는데 신라군의 盛勢를 보여주려는 것,0035) ② 고구려군의 남하를 우려한 것,0036) ③ 對백제전략으로서 백제의 防禦主力을 분산·교란시키려는 의도 등으로 추측할 수 있다. 아마도 황산으로 향하는 백제진입로인 報恩 혹은 沃川에 먼저 군대를 집결시켜 놓고 여기서 왕을 비롯한 법민·김유신 등 주요 지휘관과 일부 병력만이 북상해서 남천정까지 갔다가 다시 남하하여 합류하지 않았겠나 추측된다. 따라서 위에서 보이지 않는「新羅督軍 金文穎」과 良圖 등도 도중에 離合했을 것이다.0037)

 7월 9일 신라군이 황산에서 階伯의 5千決死隊를 격파했는데 이 전쟁이 백제정벌의 승패를 가늠하는 중대한 고비로≪삼국사기≫는 기록했다. 계백이 먼저 험한 곳에 三營을 설치했으므로 신라군도 三道로 나누어 진격했지만 戰勢는 신라군에게 불리하여 4戰 모두 패배하고 士卒은 力竭한 형편이었다. 이때 김유신의 弟 흠순은 아들 盤屈을 출전케 해서 전사했고,0038) 품일도 官昌을 출전시켜 전사했다.0039) 반굴은 화랑인지 알 수 없지만 관창은 화랑으로서 勇戰하다가 전사함으로써 여타의 병사들이 분전할 수 있는 기폭제 역할을 해서 강개한 신라군의 力戰으로 大勝을 가져왔다. 이에 계백 등 대부분의 백제군을 함몰시키고 佐平 忠常과 常永 등 20여 인을 사로잡음으로써 黃山大捷을 거두었다. 병력의 다과가 반드시 승패를 좌우한다고 말할 수 없지만, 5만 신라군이 5천 백제군 격파에 시일이 지연될 수 있다는 것은 인정된다.

 따라서 7월 10일이라는 軍期를 넘기고 다음날인 7월 11일에야 신라군은 당군과의 약속장소인 기벌포에 도착하여 당군과 합류하였다. 그러나 당병은 9일에 도착했기 때문에 백제병의 저항을 받았다.0040) 만일 신라군이 기일내에 도착했다면 당군은 백제병과 싸우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소정방은 기일을 지키지 못한 책임을 신라독군 김문영에게 지워 그를 군문에서 斬하겠다고 문책하였다. 아마 唐將으로서 신라 지휘관을 억압하여 그 복종을 강요한 첫 조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응하여 김유신은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하되,

대장군은 황산의 戰役을 보지 못하고 기일을 넘긴 것을 罪하려고 하니 내가 죄없이 욕을 당할 수는 없다. 먼저 당군과 決戰하고 뒤에 백제를 깨뜨리겠다(≪三國史記≫권 5, 新羅本紀 5, 무열왕 7년).

라고 一喝怒聲으로 장부다운 기상을 보였다. 이에 소정방의 右將 董寶亮이 “신라병이 장차 變하려 한다”고 하여 일단 무마되었다. 이것은 김유신의 울분에 동조한 신라군이 당군과 一戰不辭의 태세를 갖추었던 험악한 상황으로 이해되며 이로 인해 신라군의 사기가 크게 앙양되었고, 이후 唐將이 신라군을 업신여기지 못한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신라군이 기벌포에 이르자, 백제의 왕자(隆?)가 좌평 覺伽로 하여금 글을 당의 장수에게 보내어 退兵을 요구했지만, 7월 12일 사비성을 포위하였다. 위의 진격과정에도 나당군 사이에 누가 선봉에 서느냐를 놓고 다투다가 양군이 나란히 진격했다는 사실로 보아 신라군이 적극적으로 백제병을 攻破했을 것으로 믿어진다. 7월 13일에 백제 왕자인 隆, 大佐平 千福 등이 법민 앞에 항복했다는 것도 신라군이 城下에 접근하여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0041) 다시 熊津城으로 피난갔던 의자왕 등이 18일에 돌아와 항복함으로써 백제는 멸망한 것이다.

 따라서 今突城에 주차했던 태종무열왕은 7월 29일 所夫里城에 이르러 弟監 千福을 시켜 戰功을 告했고, 8월 2일 酒宴을 베풀어 승리를 자축하고 당병을 위로했는 바,

王과 定方 및 諸將은 堂上에 앉고 義慈王과 子 隆은 堂下에 앉아서 혹은 의자왕에게 술잔을 나르게 하니 백제 좌평 등 群臣은 슬피 울지 않는 자 없었다(≪三國史記≫권 5, 新羅本紀 5, 무열왕 7년).

고 하여, 승리자의 당당함과 패배자의 참담한 모습을 여실히 묘사하고 있다.

 비록 왕과 大臣의 일부가 항복했지만, 백제군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당군은 郎將 劉仁願에게 1만 명의 병력을 주어 사비성을 지키게 했다. 이에 신라는 왕자 仁泰, 사찬 日原 등에게 7천 명의 병력을 주어 함께 주둔시켰다. 그리고 9월 3일 당군은 백제의 포로로 왕 및 태자 孝, 왕자 泰·隆·演과 大臣·壯士 등 88인과 백성 12,807인을 끌고 唐京(長安)으로 돌아갔다.

 신라의 대당관계는 처음부터 평등한 입장이 아니었고 따라서 신라왕도 唐의 일개 장군으로 임명된 형편이었지만, 당은 신라의 권익을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백제 본래의 5部 37郡 200城 76萬戶0042)를 재편성하여 熊津·馬韓·東明·金漣·德安의 5都督府를 설치해서 州縣을 통치케 했고 백제인으로 도독·刺史·縣令을 삼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5도독부는 웅진과 덕안을 제외하고는 계획에 그쳤다고 하나0043) 백제 옛땅에 대한 당의 직접 지배는 나당 사이의 領土分割約定의 위반이었으므로 신라의 자주성과 권익을 되찾기 위해 후일 나당전쟁이 불가피했다.

 사실 신라는 당 13만 군의 성원을 얻어 단시일에 백제를 패망시켰지만, 신라군은 계백군과 같은 강력한 백제군의 저항을 격파하면서 깊숙히 백제영역을 가로질러서 기벌포까지 진격했고 사비성 함락에도 앞장서서 싸웠던 것이다. 이에 비하면 당군은 13만이라는 숫자적 대세로 산동반도→덕물도→기벌포까지 바다로 순항했고 겨우 사비성 함락에 진군함으로써 그 聲勢만 가하고 오히려 모든 實利를 앗아갔다. 그러나 신라는 또 하나의 강적인 고구려정벌이 남아 있었으므로 對唐戰爭을 결단하기까지는 더 많은 인내와 기다림이 요청되었다.

 그러면 백제는 왜 그렇게 쉽게 패망했을까. 여기서 백제의 패망원인을 개략하면, 첫째 백제는 6세기말부터 빈번한 전쟁을 무궤도하게 펼침으로써 국력소모가 과다하였다. 둘째 王을 비롯한 백제 지배자들이 사치와 방일에 빠져 국가를 충실히 지키려는 애국심이 없었기 때문에 국가를 수호하는 일이 곧 자기를 유지하는 것이라는 의식이 철저하지 못했던 듯하다. 셋째 그 말기에 이를수록 애국적 충신은 도태되었고 害國的 姦臣들이 득세했던 것이다. 의자왕 16년(656)에 좌평 成忠은 “王과 宮人의 淫荒 耽樂과 그칠 줄 모르는 음주”를 極諌하자 投獄으로 보상되었고, 이 성충과 興首가 炭峴과 白江(기벌포)에서 水陸으로 침입하는 외적을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런 최후의 忠言마저 묵살되었다. 넷째 백제는 신라의 변경을 기습하여 신라를 괴롭히는 데 만족하고, 강력한 외적의 침공에 대비한 근본적 대책에 소홀했던 듯하다. 따라서 나당연합군의 기습에 방어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무너지고 말았다. 앞에서 말한 성충의 탄현·기벌포 방어전략이 의자왕 19년(660) 나당의 침공을 받은 뒤에야 다시 흥수에 의해 건의되었으나 이것이 채택되지도 않았거니와, 이미 이때는 신라군이 탄현을 넘어섰고 당군이 백강에 들어온 이후였다. 여기서 당군을 먼저 치면 신라군은 겁내어 돌아갈 것이라는 좌평 의직의 전략도 적용될 상황이 아니었다. 외적의 침입을 당하여 화급한 방어전략이 지리멸렬했다는 것은 국가를 수호하려는 방어책에 얼마나 소홀했었는지 알 수 있다. 다섯째 백제의 外交에서 백제가 隋와 軍期를 정하여 함께 고구려를 共伐키로 약속했지만, 이를 실천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수를 이은 당에 있어서 백제의 외교가 不信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외교에도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백제에서는 倭와 親交하여 왜를 믿었는지 모르지만 親倭는 勢가 될 수 없었다. 여섯째 당시 3국은 모두 城 中心의 防禦體制였는데 백제는 史上 유례가 없는 신라의 5만 대병을 맞아 일시에 방어할 병력과 기동력이 없었다고 판단된다.0044)

 요컨대 신라는 국제관계 변화의 물결을 타고 당과 군사동맹을 체결하여 무열왕 7년(660) 숙적인 백제를 패망시켰지만, 이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할양 받지 못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나당동맹의 와해와 나당전쟁의 잠재적 도화선이 되었다.

0030)≪三國史記≫권 42, 列傳 2, 金庾信 中.
0031)≪三國史記≫권 5, 新羅本紀 5, 선덕왕 12년조 唐 太宗의 말.
0032)李丙燾,≪韓國史≫ 古代篇(震檀學會, 1959), 507쪽.
0033)李昊榮,≪新羅의 三國統合過程 硏究≫(慶熙大 博士學位論文, 1985), 133쪽.

또 이 시기의 對唐外交를 보면 태종무열왕 원년(654) 양국 사신의 왕래, 2년의 “王遣使入唐 救援”, 6년의 “遣使入唐 乞師”가 기록되었고, 文王은 4년(657)에 唐에서 돌아와 中侍가 되었다.
0034)池內宏은 新羅軍이 報恩·沃川을 경유하였다고 보았고, 炭峴은 忠淸南·北道 道界의 고개인 오늘의 馬道嶺이라 하였다(池內宏,<百濟滅亡後の活動及び唐·羅·日關係-附說 白江及び炭峴について>, 앞의 책, 213∼236쪽).

鄭永鎬는 新羅軍의 進軍路程을 南川停→三年山城(報恩)→山桂里土城(沃川)→장군재(沃川)→구진베루(沃川)→郡西(沃川)→馬山(錦山)→炭峴(→伎伐浦→泗沘城)으로 추정하였다(鄭永鎬,<金庾信의 百濟攻擊路硏究>,≪史學志≫6, 檀國大, 1971, 61쪽).
0035)≪三國史記≫ 권 5., 新羅本紀 5, 태종무열왕 7년.
0036)洪思俊,<炭峴考>(≪歷史學報≫35·36합집, 1967), 66쪽.
0037)軍期를 어겼다고 金庾信과 蘇定方 사이에 爭論이 일어난 속에 金文穎이 등장하는데, 이 드라마틱한 사건이≪三國史記≫의 新羅本紀에는 보이고, 金庾信傳에는 기록되지 않은 점은 좀 이상하다. 良圖는 문무왕 2년(662) 唐兵에게 軍糧을 운반하고 돌아올 때 “良圖以兵八百人 泛海還國”(金庾信 中)이라 한 점으로 보아, 이때도 水軍을 지휘하여, 신라군 지휘관을 德積島에 往復시킨 海軍大將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이 양도는 金仁問傳에서 入唐해 西京에서 죽었다고 했는데, 이는 本紀에서 문무왕 10년 唐의 圓獄에서 죽었다는 것과 부합된다.
0038)≪三國史記≫권 5, 新羅本紀 5, 태종무열왕 7년. 이 때 흠순이 “爲臣莫若忠 爲子莫若孝 見危致命 忠孝兩全”(≪三國史記≫권 47, 列傳 7, 金令尹)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0039)≪三國史記≫권 5, 新羅本紀 5, 태종무열왕 7년 및 권 47, 列傳 7, 官昌.
0040)≪三國史記≫권 5, 新羅本紀 5, 무열왕 7년 7월 9일조에 “是日 定方與副摠管金仁問等 到伎伐浦 遇百濟兵 逆擊大敗之”라 했고 11일까지는 날짜의 기록이 없다. 그러나 軍期는 7월 10일이고, 12일에는 사비성을 포위·함락시키고 있으므로 신라군이 기벌포에 도착한 것은 11일이 분명하다.
0041)그러나≪三國史記≫권 28, 百濟本紀 6 의자왕 20년조에서는 이들이 唐將에게 항복했다고 기록하였다.
0042)≪舊唐書≫권 199上, 列傳 149上, 東夷 百濟.
0043)李丙燾, 앞의 책, 512쪽.
0044)李昊榮,<百濟 敗亡原因論>(≪朴性鳳敎授回甲紀念論叢≫, 1987), 151쪽 참조.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