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대10권 발해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1. 발해의 건국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1. 발해의 건국
          • 1) 고구려 멸망 후 그 유민과 말갈족의 동향
            • (1) 고구려유민의 동향
            • (2) 말갈 부족들의 상태
          • 2) 676년 이후 동북아 국제정세
          • 3) 대조영집단의 동주와 건국
        • 2. 발해의 발전
          • 1) 대외적 팽창
          • 2) 국가체제의 정비
        • 3. 발해국의 주민구성
          • 1) 요·금대의 발해인과 여진인
          • 2) ‘토인’과 말갈
          • 3) 발해 왕실의 출자
          • 4) 발해인의 귀속의식
          • 5) 발해국의 성격에 대한 인접국인의 인식
      • Ⅱ. 발해의 변천
        • 1. 발해의 융성
          • 1) 내분의 발생
          • 2) 해동성국의 구현
          • 3) 발해국의 위상
        • 2. 발해의 쇠퇴와 멸망
          • 1) 멸망의 배경
          • 2) 요동의 상실과 멸망
        • 3. 발해유민의 부흥운동
          • 1) 발해유민의 의미
            • (1) 발해유민과 발해유예
            • (2) 발해국 지배층의 성씨 분포와 그 유민
          • 2) 전기 부흥운동-후발해와 정안국-
          • 3) 후기 부흥운동-흥요국과 대발해국-
            • (1) 대연림의 흥요국
            • (2) 고영창의 대발해국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1. 신라와의 관계
          • 1) 발해 건국기의 남북교섭
          • 2) 발해 왕권확립기의 남북대립
          • 3) 신라 귀족항쟁기의 남북교섭
          • 4) 발해의 영토확장과 신라·당 밀착기의 남북대립
          • 5) 발해 멸망기의 남북교섭
        • 2. 당과의 관계
          • 1) 발해 건국 초기의 양국교섭
          • 2) 양국의 전쟁과 교섭
          • 3) 전쟁의 경과와 신라·발해의 대립
        • 3. 일본과의 관계
          • 1) 발해 건국 초기의 양국교섭
          • 2) 발해와 일본의 신라협공계획과 양국교섭
          • 3) 신라협공계획 무산 후의 양국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1. 중앙통치조직
          • 1) 조직의 정비과정과 성격
          • 2) 조직의 내용
        • 2. 지방·군사제도
          • 1) 지방제도
          • 2) 군사제도
        • 3. 사회·경제구조
          • 1) 사회구조
            • (1) 신분제도
            • (2) 토인과 수령
            • (3) 사회생활
          • 2) 경제구조
            • (1) 경제생활
            • (2) 대외무역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 불교와 기타 신앙
        • 2. 유학과 한문학
          • 1) 유학
          • 2) 한문학
        • 3. 예술
          • 1) 건축
            • (1) 성곽과 건물지
            • (2) 사원과 탑
            • (3) 고분
          • 2) 미술
            • (1) 회화
            • (2) 공예
          • 3) 음악과 무용
        • 4.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 국내의 발해사 인식과 연구
          • 2) 국외의 발해사 인식과 연구
          • 3) 주요 연구 주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3) 대조영집단의 동주와 건국

 대조영집단이 徙居되어 있던 영주지역은 大凌河 상류로 비교적 건조한 지대였다. 이 지역은 5세기 이래 중국세력의 동북 관문이요, 동북아시아 여러 종족들의 교역 중심지였다. 7세기 이후 당제국에 흡수되어진 종족들로 구성된 羈靡州가 다수 이 지역에 설치되었으며, 고구려 멸망 후 많은 고구려인과 말갈족이 이 지역에 옮겨져 생활하고 있었다. 이들의 영주지역에서의 거주 양태는 아마도 그들이 이곳에 옮겨오게 된 동기에 따라 일부는 집단적으로 예속된 기미주로 편제되었고, 일부는 영주 성내나 성 옆에 거주하며 편호되어 영주도독부의 직접 지배를 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대조영집단은 기미주 형태로 편제되어 집단적으로 예속되어 있었다.021)

 영주지역은 이른바 異族的 氣風이 강한 곳이어서 한문화의 압력이 덜 하였고, 주위에는 상대적으로 저급한 문화를 지닌 종족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런 환경은 이곳에 강제로 옮겨진 고구려인들이 그들의 독자성을 유지하는 데 상대적으로 유리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그들은 기미주형태로 집단적으로 예속되었으므로 자체의 조직과 결속력을 상당히 유지할 수 있었다. 나아가 멀리 떨어진 이국 땅에서 幽居生活을 하는 피복속민으로서의 동일한 처지로 인하여, 문화적·역사적 친연관계에 있는 고구려인과 말갈족 사이에는 상호 이해와 화합으로 진전된 동류의식이 형성될 수 있었다.

 전란과 이주에 따라 극도로 피폐해진 상태는 세월이 흐를수록 어느 정도 회복되어 갔을 것이다. 특히 戶口의 증식이라는 면에서 그러하였을 것이다. 696년 5월 거란족의 수령 李盡忠이 돌궐의 후원을 받으며 봉기하여 당의 영주를 엄습하고 스스로 無上可汗이라 칭하며 당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이에 따라 영주지역 일대는 큰 혼란에 빠졌고, 일부 이종족 집단들은 당의 지배에서 벗어나 이탈해 나갔다. 당황한 唐 조정은 영주지역에 설치하였던 기미주들을 대거 장성 이남지역으로 옮겨 이에 대처하였다. 이런 와중에서 고구려유민들과 말갈족의 동향은 일정하지 못하였다. 일부는 계속 이 지역에 남아있거나 당군과 함께 행동하였다. 그래서 영주가 다시 당의 지배 아래 들어간 이후 이 지역에 거주하며 당의 군병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고구려유민으로서 유명한 李正己 집안은 그 대표적 예이다. 다른 일부는 이탈하였으니, 대조영집단과 말갈족의 乞四比羽집단은 東走를 택하였다. 이 때 거란은 남으로 하북성지역으로 진격하는 등 당에 대한 공격에 주력하고 있었고 당은 이를 저지하기에 급급하였기 때문에, 이들 집단의 동주는 상대적으로 용이하였다. 그런데 이 때 대조영집단이 영주를 벗어나 바로 동만주로 가서 나라를 세웠던 것은 아니다. 중간에 어느 곳에서 일정 기간 머물며 주변지역을 경략하면서 자체의 힘을 배양하며 정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한편 이진충이 이끈 거란군은 신속히 북중국의 하북지역으로 남진하였다. 그 해 9월 이진충이 죽자 孫萬榮이 무리를 이끌고 당군을 격파하며 크게 세력을 떨쳤다. 수세에 몰린 당은 돌궐에 물자를 제공하며 서로 밀약을 맺어 거란을 양면에서 협공하는 방책을 도모하였고, 돌궐이 이에 응하여 거란의 배후를 기습하였다. 이에 정세는 크게 역전되었다. 거란은 본거지를 돌궐에게 유린당하였고 거란의 동맹군이었던 奚族이 돌궐에 투항하였다. 당군의 방어망이 강화되자 거란군은 궁지에 몰려 마침내 당군에 격파되어 697년 6월 진압되었다. 이 무렵 거란 장수였던 李楷固·駱武整 등이 당에 항복하였다.022)

 당은 영주지방을 벗어나 동쪽으로 달아나 형세를 관망하고 있던 대조영집단과 걸사비우집단에 대한 회유의 손길을 뻗쳐, 대조영의 아버지라는 乞乞仲象에게 震國公을, 걸사비우에게는 許國公의 작위를 주면서, 다시 이들 집단을 당 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려 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이를 거부하자 당은 거란 항장 출신의 이해고를 장수로 한 토벌군을 보내어 공격해왔다. 이 무렵 걸걸중상이 병사하고 대조영이 그 집단의 수장이 되었다. 이해고가 이끈 당군의 공격에 맞서 말갈족의 걸사비우집단이 먼저 교전을 벌였으나 패배하여 걸사비우가 전사하였다. 대조영은 당군의 예봉을 피하여 일단 더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걸사비우집단의 잔여세력들을 규합하였다. 당군이 계속 추격해오자 대조영은 이를 天門嶺에서 맞아 싸워 대파하였다. 그리고 계속 동진하여 동만주 牧丹江 유역에 자리잡아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 나갔다. 당은 천문령전투 이후 더 이상의 추격은 포기하였다. 이는 영주지방을 돌궐이 유린하여 북중국에서 만주지역으로 이어지는 육로가 크게 위협을 받고 있었고 요동지역에 대한 보급도 해로에 의존해야 할 형편이어서, 대조영집단에 대한 더 이상의 공격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023) 당은 699년 요동에 두었던 안동도호부를 安東都督府로 격하시킨 뒤, 보장왕의 아들 高德武를 안동도독으로 삼아 이 지역 고구려유민을 통치하게 하였다.024) 이어서 700년대초 다시 안동도독부를 도호부로 격상시켰으나 幽州지역으로 그 치소를 옮긴 것에서 알 수 있듯이,025) 당의 동북아 방면에 대한 정책은 소극적인 방어 위주로 전환하였다.

 이와 같은 대조영집단의 동주와 건국과정과 관련하여 그 동안 논란이 있어왔던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할 것이 있다. 먼저 대조영집단이 영주에서 탈주하여 일시 정착한 지역이 어느 곳인가 하는 점이다. 이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천문령전투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조영집단과 이해고의 당군이 싸웠던 지점인 천문령은 북류 송화강의 지류인 揮發河와 渾河의 분수령 지대인 哈達嶺으로 여겨진다.026) 자연 천문령전투 이전에는 대조영집단은 그 서쪽의 어느 곳에 있었던 것이 된다. 근래 대조영집단의 일차 정착지를 瀋陽으로 비정하거나,027) 太子河유역으로 여기는 설이028) 제기되었다. 그 주요 논거로 발해 멸망 후 발해인을 요동으로 강제 이주시킬 것을 제안한 遼의 耶律羽之가 태자하유역을 발해인의 ‘고향’이라고 표현한 기사와,029)≪五代會要≫에서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走保遼東 分王高麗故地’하였다는 기사를 들고 있다.030) 당시 영주와 요동의 안동도호부의 치소인 新城(지금의 撫順)간의 교통로는 세 갈래가 있었다. 우선 영주-燕郡-懷遠-通定鎭(지금의 신민현 高台山)-신성으로 이어지는 北道와, 영주-연군-회원-險瀆-요동성(遼陽)-蓋牟(지금의 蘇家屯)-신성으로 이어지는 中道, 그리고 영주-연군-汝羅守捉-遼隊-요동성-개모-신성의 南道가 있었다.031) 그런데 696년 가을 거란군이 안동도호부성을 공격해오자, 안동도호 裵玄珪가 이를 저지하였으며,032) 이듬해 초 요동주도독 高仇須에 의해 거란의 공격군은 격파되었다.033) 이어 그 해 5월 고구려유민인 高文·高慈 부자가 당군을 이끌고 거란군과 싸우다 요동의 磨米城에서 전사하였다.034) 또한 같은 해에 당의 中郞將 薛訥이 이끄는 5만의 병단이 해로로 요동에 파견되었다.035) 실제 5만이 아닐지라도 이 때 상당한 병력을 투입하여 요동지역의 당군을 보강한 것은 사실로 여겨진다. 이렇듯 신성과 요동성에 당군이 버티고 있는 당시 상황으로 보아 대조영집단이 태자하유역으로 가서 그 곳에 자리잡기는 불가능한 것이다.

 요동성은 바로 태자하 하류유역에 있다. 그리고 거란군과 당군이 영주에서 요동에 이르는 街道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데 대조영집단이 바로 그 길을 택하여 동주하였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또한 대조영집단이 태자하유역에 있었다면 당연히 안동도호부의 군대가 동원되었을 것인데도, 대조영 등에 대한 공격이 서쪽에서 온 이해고의 군대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볼 때도 그러하다. 천문령전투 이전에 대조영과 걸사비우집단은 당과 거란의 전투 와중에서 비켜서서, 영주에서 요동으로 이어지는 가도의 북쪽 요서지역 어느 곳에 머물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오대회요≫의 기사는 東走과정에서의 구체적인 사실을 시기별로 서술하였다기보다는, 발해의 건국과정에 대한 개괄적 언급을 한 것일 뿐이라고 여겨진다. 굳이≪오대회요≫의 기록처럼 대조영집단이 요동에 왔다고 볼 경우에는 안동도호부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개원·창도 방면 쪽의 요동 북부지역에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036)

 다음은 발해의 건국 연대에 관한 논란이다.≪舊唐書≫에서는 발해가 聖曆(698∼700) 연간에 건국하였다고 하였다. 발해가 존립하고 있을 당시에 편찬된 일본의≪類聚國史≫에서는 698년에 건국하였다고 하여 구체적인 시기를 언급하고 있다.037)≪유취국사≫의 이 기사는 발해인으로부터 전해 들은 내용을 기술한 것으로 여겨지며, 발해 조정의 공식적 견해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면 이 때 건국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698년에 대조영집단이 목단강유역의 東牟山지역에 정착하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천문령전투가 있었던 시기가 그보다 앞선 것이었다는 점이 확실하여야 한다. 천문령전투는 거란 장수였던 이해고가 당에 항복한 697년 6월 이후부터 ‘거란 餘黨’을 토벌하고 장안에 개선한 700년 6월038) 사이에 있었다. 이해고는 대조영집단과의 천문령전투에서는 패배하였고 거란 여당 토벌전에서는 승리하여 700년 개선하였던 셈이 된다. 그러면 이 두 전투는 별개의 작전으로, 이해고는 두 차례 출정하였던 것일까. 이는 시간적으로나 거란 항장 출신이었던 이해고의 처지로 볼 때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거란 여당에 대한 토벌전의 일환으로 대조영집단을 공격하였던 것이다. 비록 천문령전투에서는 패배하였지만 걸사비우집단을 격파하였고 그 밖의 거란 잔당들에 대한 작전에서 성공하였기 때문에 개선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039) 대조영과 걸사비우집단도 이진충의 난 때 당의 지배에서 벗어나 동주하였으므로 당의 입장에서는 그들을 ‘거란 餘黨’이라고 간주하였을 수 있다. 그리고 이해고의 대조영집단에 대한 추격전은 영주 방면 등 요서지역의 거란족들에 대한 토벌전을 행한 후에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순리적이라고 여겨진다.

 영주 방면은 거란족의 본거지와 접해 있고 장성 이남의 당의 본토와 요동을 잇는 길목이다. 이 지역을 먼저 평정하지 않고 멀리 요동지역에까지 대조영집단을 추격해갔다는 것은 역시 전략상으로 무리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해고는 요서지역의 거란 여당들을 토벌·회유한 뒤에 그 여세를 몰아 대조영과 걸사비우집단을 공격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천문령전투는 670년 6월에서 그리 멀지않은 시기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그러면 천문령전투 이전인 668년에 발해가 건국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아마도 대조영이 이 때 ‘震國公’ 걸걸중상에 이어 집단의 통수권자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걸사비우의 전사 후 그 집단까지 아울러 東走하였던 무리들 전체의 통수권자로 취임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발해 건국 후 대조영이 震(振)國王을 칭했던 것도040) 이와 연관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발해국의 실질적 건국은 목단강유역에 자리잡은 뒤인 700년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은 발해의 초기 도읍지인 ‘舊國’의 위치문제이다. 이 구국에 대하여 그 동안 돈화현의 평지성인 傲東城으로 비정해 왔으나, 오동성은 성의 짜임새나 그 곳에서 출토된 유물로 볼 때 발해의 도성으로 보기 어려우며 목단강 상류쪽의 永勝유적이 초기 도읍지로 여겨진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041) 대조영집단이 처음 자리잡았던 ‘東牟山’은 지금의 敦化市 賢儒鄕 城山子村의 성산자산성으로 보고 있다. 이 산성은 목단강의 지류인 대석하를 끼고 있는 해발 600m의 산 위에 구축되어 있다. 이는 “奧婁河를 방어용으로 하고 성을 쌓아 스스로를 지켰다”는≪신당서≫발해전의 기사와 부합한다. 이 산성의 동편의 평지에 영승유적이 있다. 이 영승유적과 성산자산성 및 발해 초기의 귀족들의 무덤들이 있는 육정산고분군이 하나의 組를 이루고 있다. 성산자산성은 비상시의 방어처이지만 일단 국가를 건설한 뒤에는 평상시의 거주지는 아니었다. 아직 본격적인 발굴이 행해지지 않았지만 영승유적이 초기 도읍지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盧泰敦>

021)盧泰敦, 앞의 글(1981a).
022)이진충의 난의 전개과정은 宋基豪,<大祚榮의 出自와 渤海의 건국과정>(≪아시아文化≫7, 翰林大, 1991) 참조.
023)≪舊唐書≫권 199 下, 列傳 149 下, 北狄 渤海靺鞨.
024)≪舊唐書≫권 199 上, 列傳 149 上, 東夷 高麗.
025)津田左右吉,<安東都護府考>(≪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 1915).
026)潭其驤 主編,≪中國歷史地圖集≫(釋文匯編 東北卷, 中央民族學院出版社, 1988), 126∼127쪽.
027)楊保隆,<新舊唐書渤海傳考辨>(≪學習與探索≫1984­2).
028)宋基豪, 앞의 글.

林相先,<渤海 建國 參與集團의 硏究>(≪國史館論叢≫42, 國史編纂委員會, 1993).
029)≪遼史≫권 75, 列傳 5, 耶律羽之.
030)≪五代會要≫권 30, 渤海.
031)王綿厚·李健才,≪東北古代交通≫(1990), 138∼152쪽.
032)≪舊唐書≫권 59, 列傳 9, 許欽寂.

≪資治通鑑≫권 205, 唐紀 21, 則天武后 萬歲通天 원년 9월.
033)≪陳白玉文集≫권 4, 爲建安王破賊表.
034)<高慈墓誌銘>(≪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 韓國古代社會硏究所), 511쪽.
035)≪陳白玉文集≫권 10, 爲建安王與遼東書.
036)宋基豪,≪渤海政治史硏究≫(一潮閣, 1995), 65쪽.
037)≪類聚國史≫권 193, 殊俗部 渤海 上.
038)≪舊唐書≫권 89, 列傳 39, 狄人傑.
039)池內宏,<渤海の建國者について>(≪東洋學報≫5­1, 1914 ;≪滿鮮史硏究≫中世篇 1, 岡書院, 1993).

松井等,<契丹勃興史>(≪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 1915).

盧泰敦, 앞의 글(1981b).
040)≪舊唐書≫권 199 下, 列傳 149 下, 北狄 渤海靺鞨.
041)방학봉,<발해 초기의 수도에 대한 몇가지 문제>(≪발해사연구≫1, 1991).

―――,<발해수도의 변화 발전과정에 대한 연구>(≪발해사연구≫3, 1992).

리강 저·방학봉 역,<발해 수도 오동성에 대한 의문>(≪발해사연구≫2, 1991).

宋基豪, 앞의 책, 80∼84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