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대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Ⅲ. 후삼국의 정립3. 태봉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1. 중대에서 하대로
          • 1) 기로에 선 중대 전제왕권
          • 2) 혜공왕 말년(780)의 정변 ― 중대의 종말
          • 3) 하대의 개막과 원성왕계의 성립
        • 2. 귀족사회의 분열과 왕위쟁탈전
          • 1) 왕실가족에 의한 권력독점
          • 2) 무열왕계의 반발과 김헌창의 난
          • 3) 범진골 귀족세력 화합책의 시도
          • 4) 원성왕계 내부의 왕위계승쟁탈전
        • 3. 정치개혁의 실패
          • 1) 율령의 개정을 통한 집권체제의 정비 시도
          • 2) 근시기구와 문한기구의 합체화에 의한 권력집중 시도
        • 4. 골품제도의 퇴화
          • 1) 골품제의 사회적 기반의 축소
          • 2) 진골귀족의 분열
          • 3) 6두품세력의 성장
        • 5. 수취체제의 모순과 농민층의 피폐
          • 1) 귀족 및 사원의 농장경영과 왕경의 번영
          • 2) 농민층의 피폐와 자영농민의 몰락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1. 호족세력의 대두 배경
          • 1) 호족의 개념
          • 2) 호족세력의 대두 배경
        • 2. 호족세력의 대두
          • 1) 낙향귀족 출신의 호족
          • 2) 군진세력 출신의 호족
          • 3) 해상세력 출신의 호족
          • 4) 촌주 출신의 호족
        • 3. 장보고와 청해진
      • Ⅲ. 후삼국의 정립
        • 1. 후삼국기의 신라
        • 2. 후백제
          • 1) 후백제의 성립
            • (1) 견훤의 출신과 군사적 기반
            • (2) 후백제의 성립과정
          • 2) 후백제의 발전과 호족연합
            • (1) 영토의 확대
            • (2) 호족과의 연합
          • 3) 후백제의 대외정책
            • (1) 대신라정책
            • (2) 대고려정책
            • (3) 대중국·일본정책
          • 4) 후백제의 몰락
            • (1) 신검 형제의 정변
            • (2) 신검정권과 그 멸망
        • 3. 태봉
          • 1) 궁예의 출신과 사회적 진출
          • 2) 후고구려의 건국
            • (1) 자립과 세력기반의 확립―하층농민의 포섭
            • (2) 건국―호족들과의 제휴
          • 3) 마진과 태봉의 중앙정치조직
            • (1) 광평성체제의 성립과 호족연합정권-마진
            • (2) 광평성체제의 변화와 전제왕권―태봉
          • 4) 태봉의 몰락
            • (1) 궁예의 정교일치적 전제주의의 추구와 그 지지세력
            • (2) 반궁예세력의 동향과 918년 정변
      • Ⅳ. 사상계의 변동
        • 1. 유교사상의 변화
          • 1) 유교사상의 발달
          • 2) 숙위학생의 활동
          • 3) 유교사상의 변화
        • 2. 불교의 변화
          • 1) 교학 불교의 전개
            • (1) 화엄종
            • (2) 법상종
          • 2) 선종의 흥륭
            • (1) 북종선의 전래와 남종선의 도입
            • (2) 선종 유행의 사회적 기반
            • (3) 선종산문의 성립
            • (4) 선종사상의 경향
          • 3) 미륵신앙
            • (1) 미륵의 출현과 말법신앙
            • (2) 궁예의 이상세계 건설
          • 4) 유·불·선 3교의 융합
            • (1) 유·불 2교의 교섭
            • (2) 유·불·선 3교의 조화
        • 3. 풍수지리·도참사상
          • 1) 풍수지리설의 도입
          • 2) 유식론적 선사상의 성립
          • 3) 지방호족 중심의 국토 재구성안
          • 4)<삼국도>의 작성과 비보사상
          • 5) 도참사상의 전개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3. 태봉

1) 궁예의 출신과 사회적 진출

  205)

 ≪三國史記≫권 50, 列傳 10, 弓裔傳을 보면 궁예는 憲安王 혹은 景文王의 아들이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태어나자마자 부왕으로부터 죽임을 당할 뻔하였으나 乳婢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206) 이 점에서 궁예는 신라의 왕자 출신으로 아마도 정권다툼에 희생된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207) 하지만 궁예의 가계에 대한 서로 다른 설이 있다는 점, 그가 구사일생 하게 된 경위가 지나치게 극적이라는 점 등을 염두에 두면 그가 과연 왕자였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208)

 궁예와 더불어 후삼국시대를 이끌었던 甄萱은 眞興王의 5대손이었다고 하고,209) 王建의 시조 虎景은 聖骨將軍을 칭하였다고 한다.210) 하지만 그들 누구도 실제로 신라 왕실과 혈연이 닿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궁예도, 이들과 마찬가지로 실제로는 그러하지 않았지만, 신라 왕실과의 혈연상의 연결을 도모하였다고 여겨 좋지 않을까. 단 견훤이나 왕건이 자신들을 중고시대 신라 왕실의 먼 후손으로 꾸몄던 점에 비해 궁예만이 바로 앞 시대의 왕들과 자신을 연결시켰으리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호족 출신이었던 견훤이나 왕건과는 달리 궁예가 중앙의 유력한 가문 출신이었음을 시사한다고 믿어진다. 왕실을 제외하고 중앙의 유력한 가문을 생각한다면 眞骨貴族의 가문을 떠올리게 된다. 이에 궁예가 진골귀족 출신이었을 것으로 본다.

 진골귀족 출신이었다고 하여도 궁예가 성장하였던 곳은 경주가 아닌 듯하다. 그는 낙향한 진골귀족이었던 셈이다. 한편 궁예가 비록 낙향한 진골귀족이었을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리고 어려서부터 장성할 때까지 승려였다고는 하지만, 호족세력이나 사원세력 등을 배경으로 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가령 승려생활을 그만두고 竹州(安城·龍仁)의 세력가 箕萱의 부하가 되었던 궁예는 기훤으로부터 푸대접을 받았으며, 그로 말미암아 우울하여 스스로 안정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만약 궁예가 호족세력이나 사원세력 등을 이끌고 있었거나 그들로부터 후원을 받았다면 기훤이 그를 푸대접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궁예로서도 기훤이 자신을 무시하였다고 하여 그렇게 불안해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이에 궁예의 가문은 이미 몰락하였던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진골귀족 가문의 몰락이 정치적 사건과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가문은 아마 정권의 장악을 둘러싸고 벌어진 진골귀족들 사이의 투쟁에서 패함으로써 몰락하게 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처럼 궁예가 정권 다툼에서 패배하여 몰락한 진골귀족 출신이었다면 그는 자연 반신라적인 성향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 그는 몰락하지 않았다면 누릴 수 있었을 진골귀족으로서의 특권과 권위를 회복하려고 하는 집념을 품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궁예는 일찍부터 신라를 타도하고 자신이 지배하는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꿈꾸었을 것으로 헤아려지는 것이다.211)

 궁예는 소년시절 寧越의 世達寺212)에 출가함으로써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잘 알려진 바이지만 건국 후 궁예는 彌勒佛을 자칭하였다. 뿐만 아니라 20여 권의 경전을 저술하고 강설도 하였다고 한다. 그 경전이나 강설의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궁예가 미륵불을 자칭하였다면 적어도 거기에는 자신이 하생한 미륵불이며, 자신의 치세가 미륵불이 하생한 이상세계임을 주장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궁예가 그러한 내용의 경전을 쓰고, 강설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불교 전반 특히 미륵신앙에 대하여 정통하였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궁예가 세달사에서 승려생활을 하였던 사실과 떼어놓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궁예의 미륵신앙과 관련하여 그보다 약 50년 정도 앞서 활동하였던 세달사의 승려 調信이 溟州에서 미륵신앙과 관련을 맺었음이 주목된다.213) 洛山寺의 觀音菩薩像 앞에서 金昕의 딸과 맺어지기를 기원하였던 조신은 꿈에서나마 소원을 이루었다고 한다. 하지만 가난에 시달리다가 15세 된 큰 아들이 굶어 죽자 명주 蟹縣嶺에 묻었다고 한다. 꿈에서 깨어난 조신이 그 곳을 파보니 돌미륵이 나와 그것을 인근의 절에 안치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승려 궁예의 활동 범위는 영월을 중심으로 하여 太白山脈을 넘어 동해안에까지 미치고 있었던 것 같다. 궁예는 北原(原州)의 세력가 梁吉의 명에 따라 북원의 동부지역과 酒泉(寧越)·奈城(영월)·鬱烏(平昌)·御珍(蔚珍) 등을 비롯한 명주 관내의 여러 군현을 정복하였던 일이 있다. 이처럼 양길이 궁예에게 위의 여러 지역의 정복을 맡겼던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그 곳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그렇다면 조신의 예에서 보듯이 궁예도 명주에서 미륵신앙을 접하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추측하게 된다.

 통일신라시대의 미륵신앙은 크게 太賢系와 眞表系로 나누어 파악되고 있다.214) 그 중 진표는 명주에서 戒法을 설하고, 金剛山에 鉢淵藪를 열고 7년 동안 거주하였다215). 그 때 그는 흉년으로 인하여 굶주렸던 명주 일대의 백성들을 구제하였다고 한다. 주민들은 진표가 설한 계법을 저마다 받들었고, 그로 인해 굶어 죽을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때 발연수를 떠났던 진표는 그 만년을 다시 발연수에서 지냈다. 이러한 사실들은 명주 일대의 주민들을 상대로 한 진표의 교화가 대체로 성공적이었을 것이라는 점, 진표 이후에도 명주 지역에는 그의 미륵신앙이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 등을 알려 준다. 그렇다면 궁예가 명주에서 접하였을 미륵신앙은 진표 이래의 그것이었음직하다.216)

 진표는 미륵보살로부터 그의 뼈로 된 簡子를 받았으며, 미륵보살은 그가 現身의 육체를 버리고 大國王의 몸을 받으리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진표가 미륵보살의 대행자로 현세에서 이상국가를 만들려고 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217) 그런데 이 진표의 소망에는 종교적 혹은 정신적으로 百濟를 부활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으며, 그가 미륵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반신라적 이상국가의 건설을 꿈꾸었다는 지적이 주목된다.218)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궁예는 신라를 타도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고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점에서 궁예와 진표의 희망은, 현실과 종교라는 차이는 있지만, 서로 통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진표의 미륵신앙은 주로 지방의 농민들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219) 궁예가 호족세력이나 사원세력의 후원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면 궁예는 진표의 미륵신앙을 이용하여 반신라적인 농민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일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였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를 통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던 것은 아닐까. 궁예는 이미 대국왕이자 미륵불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궁예가 승려생활에 언제까지나 만족하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壯年이 된 후 궁예는 僧律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기상이 활발하고 膽氣가 있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그의 면모는 일반 승려의 그것과 크게 다르거니와, 이는 이제 궁예가 현실의 정치적·사회적 상황에 보다 관심을 갖게 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891년 궁예는 드디어 세달사를 떠나 기훤에게 투신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대두하고 있었던 호족들이나 眞聖女王 3년(889)부터 전국적으로 시작되었던 농민봉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었던 신라정부를 보면서 궁예는 신라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였던 듯하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호족세력이나 사원세력으로부터 이렇다 할 후원을 받을 수 없었을 궁예로서는 우선 기훤과 같은 기왕의 세력가에 의지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만들어 가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기훤의 푸대접을 받았던 궁예가 그 밑에서 자신의 세력을 모을 수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궁예가 그러한 기회를 얻었던 것은 892년 기훤을 떠나 양길의 부하가 된 이후였다고 여겨진다. 양길의 명에 따라 성공적으로 정복활동을 수행하였던 궁예는 양길의 신임을 얻었던 것이다. 하지만 궁예가 양길의 부장으로 만족할 수 없었을 것임은 물론이다.

 궁예는 894년 6백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북원으로부터 명주에 들어갔다. 이는 양길의 명에 따른 것일 터이지만, 그 때 궁예가 將軍을 자칭하였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신라 하대에는 대호족들이 장군을 자칭하였다. 그렇다면 궁예는 양길로부터 얻은 병력을 기반으로 하여 독립을 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05)이하의 서술은 趙仁成,≪泰封의 弓裔政權 硏究≫(西江大 博士學位論文, 1991), 7∼30쪽에 주로 의지하였다.
206)이 절과 관련된 자료는≪三國史記≫권 50, 列傳 10, 弓裔傳과 권 11, 新羅本紀 11, 진성여왕조에 실려 있다.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앞으로 이 자료에 나오는 기사를 인용할 경우에는 전거를 밝히지 않겠다.
207)李基白,≪韓國史新論(新修版)≫(一潮閣, 1991), 142쪽. 궁예가 헌안왕과 경문왕 중 누구의 아들인가를 밝히려는 연구로는 申虎澈,<弓裔의 政治的 性格―특히 佛敎와의 관계를 中心으로―>(≪韓國學報≫29, 1982), 33∼36쪽과 鄭淸柱,<弓裔와 豪族勢力>(≪全北史學≫10, 全北大, 1986), 2∼7쪽 등을 들 수 있다.
208)洪淳昶,<變革期의 政治와 宗敎―後三國時代를 中心으로―>(≪人文硏究≫2, 嶺南大, 1982), 227∼228쪽.

崔圭成,<弓裔政權의 性格과 國號의 變更>(≪論文集≫19, 祥明女大, 1987), 289∼290쪽.
209)≪三國遺事≫권 2, 紀異 2, 後百濟 甄萱條에 인용된≪李碑家記≫.
210)≪高麗史≫, 高麗世系에 인용된 金寬毅의≪編年通錄≫.
211)鄭淸柱, 앞의 글, 28∼29쪽 참고.
212)세달사의 위치에 대해서는 申虎澈, 앞의 글, 37쪽 및 鄭淸柱, 위의 글, 8쪽 참조.
213)조신에 대해서는≪三國遺事≫권 3, 塔像 4, 洛山二大聖 觀音 正趣 調信條 참조.
214)金南允,<新羅 中代 法相宗의 成立과 信仰>(≪韓國史論≫11, 서울大, 1984), 141∼146쪽.
215)이하 진표의 행적에 대해서는≪三國遺事≫권 4, 義解 5, 關東楓岳鉢淵藪石記條에 의거함.
216)궁예와 진표의 미륵신앙을 연결시켜 이해하였던 논자는 李基白이었다(<眞表의 彌勒信仰>,≪新羅思想史硏究≫, 一潮閣, 1986, 274∼276쪽. 특히 274쪽의 주 16 참조). 한편 궁예를 태현계 미륵신앙과 관련짓는 견해도 있다(金杜珍,<高麗 初의 法相宗과 그 思想>,≪韓㳓劤博士停年紀念 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1 ;<‘性相融會’思想 成立의 思想的 背景―高麗初의 法相宗과 그 思想―>,≪均如華嚴思想硏究≫, 一潮閣, 1983, 117∼118쪽).
217)李基白, 위의 책, 271쪽.
218)李基白, 위의 책, 274∼276쪽.
219)金南允, 앞의 글, 135·147쪽.

李基白, 위의 책, 272∼273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