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대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Ⅲ. 후삼국의 정립3. 태봉2) 후고구려의 건국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1. 중대에서 하대로
          • 1) 기로에 선 중대 전제왕권
          • 2) 혜공왕 말년(780)의 정변 ― 중대의 종말
          • 3) 하대의 개막과 원성왕계의 성립
        • 2. 귀족사회의 분열과 왕위쟁탈전
          • 1) 왕실가족에 의한 권력독점
          • 2) 무열왕계의 반발과 김헌창의 난
          • 3) 범진골 귀족세력 화합책의 시도
          • 4) 원성왕계 내부의 왕위계승쟁탈전
        • 3. 정치개혁의 실패
          • 1) 율령의 개정을 통한 집권체제의 정비 시도
          • 2) 근시기구와 문한기구의 합체화에 의한 권력집중 시도
        • 4. 골품제도의 퇴화
          • 1) 골품제의 사회적 기반의 축소
          • 2) 진골귀족의 분열
          • 3) 6두품세력의 성장
        • 5. 수취체제의 모순과 농민층의 피폐
          • 1) 귀족 및 사원의 농장경영과 왕경의 번영
          • 2) 농민층의 피폐와 자영농민의 몰락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1. 호족세력의 대두 배경
          • 1) 호족의 개념
          • 2) 호족세력의 대두 배경
        • 2. 호족세력의 대두
          • 1) 낙향귀족 출신의 호족
          • 2) 군진세력 출신의 호족
          • 3) 해상세력 출신의 호족
          • 4) 촌주 출신의 호족
        • 3. 장보고와 청해진
      • Ⅲ. 후삼국의 정립
        • 1. 후삼국기의 신라
        • 2. 후백제
          • 1) 후백제의 성립
            • (1) 견훤의 출신과 군사적 기반
            • (2) 후백제의 성립과정
          • 2) 후백제의 발전과 호족연합
            • (1) 영토의 확대
            • (2) 호족과의 연합
          • 3) 후백제의 대외정책
            • (1) 대신라정책
            • (2) 대고려정책
            • (3) 대중국·일본정책
          • 4) 후백제의 몰락
            • (1) 신검 형제의 정변
            • (2) 신검정권과 그 멸망
        • 3. 태봉
          • 1) 궁예의 출신과 사회적 진출
          • 2) 후고구려의 건국
            • (1) 자립과 세력기반의 확립―하층농민의 포섭
            • (2) 건국―호족들과의 제휴
          • 3) 마진과 태봉의 중앙정치조직
            • (1) 광평성체제의 성립과 호족연합정권-마진
            • (2) 광평성체제의 변화와 전제왕권―태봉
          • 4) 태봉의 몰락
            • (1) 궁예의 정교일치적 전제주의의 추구와 그 지지세력
            • (2) 반궁예세력의 동향과 918년 정변
      • Ⅳ. 사상계의 변동
        • 1. 유교사상의 변화
          • 1) 유교사상의 발달
          • 2) 숙위학생의 활동
          • 3) 유교사상의 변화
        • 2. 불교의 변화
          • 1) 교학 불교의 전개
            • (1) 화엄종
            • (2) 법상종
          • 2) 선종의 흥륭
            • (1) 북종선의 전래와 남종선의 도입
            • (2) 선종 유행의 사회적 기반
            • (3) 선종산문의 성립
            • (4) 선종사상의 경향
          • 3) 미륵신앙
            • (1) 미륵의 출현과 말법신앙
            • (2) 궁예의 이상세계 건설
          • 4) 유·불·선 3교의 융합
            • (1) 유·불 2교의 교섭
            • (2) 유·불·선 3교의 조화
        • 3. 풍수지리·도참사상
          • 1) 풍수지리설의 도입
          • 2) 유식론적 선사상의 성립
          • 3) 지방호족 중심의 국토 재구성안
          • 4)<삼국도>의 작성과 비보사상
          • 5) 도참사상의 전개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1) 자립과 세력기반의 확립―하층농민의 포섭

 명주에 들어간 궁예는 3천 5백 명의 병력을 확보하였다. 그는 그들을 14隊로 나누고 舍上(部長)을 두었으며, 사졸들에 의해 장군에 추대되었다221). 궁예가 명주에 들어갈 당시 6백여 명을 이끌고 있었으므로 그는 명주에서 거의 2천 9백 명에 이르는 병력을 모았던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부대의 체제를 정비하고 지휘권을 확립하였다. 이에 궁예가 명주에 머무는 동안 즉 894년 10월부터 895년 8월 이전에 자립하였다고 본다.222)

 궁예가 명주에서 자립할 수 있었던 것과 관련하여 먼저 許越이 주목된다. 태조 왕건은 溟州將軍 金順式을 회유하기 위하여 內院의 승려였던 그의 아버지 허월을 보냈다.223) 왕건은 즉위 후 얼마 되지 않은 918년 8월에 각지의 호족들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그들을 포섭하려고 한 일이 있었으며, 허월이 파견된 것도 대략 그 때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순식은 태조에게 불복하다가 태조 5년(922)이 되어서야 비로소「귀부」하였다. 궁예가 자립하였던 곳이 바로 명주라는 점을 고려하면 궁예가 몰락한 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태조가 허월을 파견하여 회유를 시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상당 기간 왕건에게 불복하였던 김순식은 궁예세력이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224) 그리고 허월 역시 그러하였음직하다.

 왕건이 즉위한 후 얼마 되지 않은 918년 8월 무렵 허월이 내원의 승려였다면 그 내원은 궁예정권 이래의 것으로 여겨 온당할 듯하다. 그리고 허월은 이미 궁예가 집권하였을 당시부터 내원에 소속된 승려였을 것이다. 그런데 내원은 궁궐 안의 사원을 가리킬 것이므로 허월이 내원의 승려였었다는 것은 그가 궁예의 측근이었음을 말하여 준다. 나아가서 허월이 궁예가 명주를 떠날 때 함께 행동하였던 것으로 헤아려 보게도 된다.225) 허월이 명주 출신이었고, 궁예가 자립하였던 곳이 바로 명주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궁예가 명주에서 자립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았던 인물은 바로 허월이 아닐까.

 허월이 승려였다는 사실은 자연 신라말 명주 일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崛山門을 떠올리게 한다. 즉 허월이 본래 굴산문의 승려였을 것으로 짐작되거니와, 여기서 특히 889년 개조 梵日이 사망한 후 명주의 굴산사에 남아 있다가 같은 지역의 普賢山寺에서 활동하였던 開淸이 주목된다. 그는 신라 왕실은 물론 태조 왕건에 대해서도 비협조적이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에 개청 역시 궁예세력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226)

 한편 金敬信(元聖王)과의 왕위계승전에서 패배한 金周元이 명주에 퇴거한 이래 그 후손들이 명주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음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다. 궁예가 명주에서 자립할 수 있었던 것은 굴산문의 도움 외에도 김주원계 대호족의 협조 내지는 그들과의 타협 속에서 가능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김주원계 대호족은 신라 왕실에 대해 대항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을 법하다. 이 점 궁예와 통한다.227)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미 명주 일대에 확고한 기반을 갖고 있었던 그들이 아직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지 못했던 궁예와 굳이 손잡을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허월과 개청이 떠오른다.

 흔히 허월과 그의 아들 김순식을 명주에 토착한 김주원의 후손이었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는 김순식이 명주장군을 칭한 대호족이었다면 그가 김주원이나 명주에 토착한 김주원의 후손과 무관할 수 없었으리라는 점에 근거한 추정이다. 그러나 양자가 혈연적으로 관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다만 김순식의 가문은 본래 진골귀족에 속하였으나 늦어도 허월대에는 명주에 낙향하였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228) 개청도 그 선대에 낙향한 진골귀족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김주원 가문과 혈연적으로 관련이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허월과 개청이 김주원과 혈연이 닿지 않았으리라는 점에서 명주에서의 그들의 지위는 김주원계 대호족 휘하의 중소호족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229) 그러한 처지였다면 그들은 기회가 생기는 대로 그들 가문의 지위를 높이려고 하였을 것이다. 이에 허월과 개청은 궁예와의 결합을 통해 명주 일대에서 그들의 지배력을 보다 강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던 것은 아닐까 하는 짐작을 하게 된다. 그들은 궁예의 출현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김주원계 대호족의 협조를 끌어냄으로써 궁예가 명주에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왔고, 그 과정에서 중소호족이었던 허월의 아들 김순식이 김주원계를 대신하여 대호족으로 등장할 수 있었을 것으로 헤아려보는 것이다.

 궁예가 명주에서 확보하였던 약 2천 9백명에 달하는 병력의 대부분은 본래 그 지역의 농민들이었을 것이다. 농민들이라고는 하지만 자영농보다는 열악한 경제적 처지에 놓여 있었고, 따라서 흉년이 들기라도 하면 쉽게 유이민이나 도적이 되기도 하고 혹은 봉기에 가담하기도 하였던 佃戶라든가 품팔이꾼 등230) 하층농민들이 주로 궁예에게 호응하였을 것이다. 명주 일대의 도적이나 889년 이래의 봉기에 참여하였던 농민들이 궁예의 세력에 편입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단 궁예가 사상(부장)으로 삼았던 金大 등은 자영농 출신이었음직하다. 그들이 사상에 임명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식견이나 능력이 다른 자들에 비해 뛰어났음을 일러 준다. 자영농이 전호나 품팔이꾼 등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높은 사회경제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만큼 식견이나 능력 면에서도 역시 그러하였으리라고 짐작된다.231)

 궁예에게 가담하였던 농민들이 대체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면, 그들은 주로 경제적인 측면에서 불만을 강하게 갖고 있었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궁예는 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경제적인 어려움의 해소를 약속하고 또 그를 위해 노력하였을 것이다.232) 여기서 다시 진표의 미륵신앙에 눈을 돌려보자.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진표는 흉년으로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던 명주지역의 주민들을 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흉년이 들었다고 하여 그들 모두가 한결같이 심각한 위기를 맞았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진표의 도움으로 곤궁함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래도 주로 경제적으로 열악한 처지의 농민들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 진표는 특히 하층농민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것이다.

 하층농민들이 기근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진표가 설한 계법을 받들고, 三寶를 지극히 공경한 결과였다고 되어 있다.233) 진표가 계율을 매우 중요시하였음은 널리 알려진 바이거니와, 그것은 그가 地藏菩薩과 占察法會를 중요시하였던 사실과 깊은 관련이 있다.234) 진표가 점찰법회를 열었던 일차적인 목적은 점찰과 참회을 통해 戒를 얻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점찰법회는 지장보살이 五濁惡世의 末世衆生을 위하여 설하였다는≪占察善惡業報經≫에 의해 시행되는 것이다.235)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진표는 당시를 말세로 여겼음직하다.236) 그리고 진표의 포교 이래 명주 일대의 하층농민들도 역시 그러하였음직하다. 한편 수취가 가중되면 될수록 그리하여 생활이 어려워지면 질수록 하층농민들의 말세의식은 보다 깊어져 갔을 것이다. 진성여왕 3년(899) 정부의「貢賦」독촉에 반발하여 전국적으로 농민들이 봉기하였음을 떠올리면 궁예가 명주에 들어갔을 무렵 그 일대 하층농민들의 말세의식은 상당히 심화되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진표가 궁극적으로 추구하였던 것은 미륵신앙이었다. 점찰과 참회의 계법을 통하여 진표는 신라를 미륵불의 下生을 바라기에 적합한 불국토화하려는 뜻을 갖고 있었다거나237) 혹은 이 지상에 미륵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이상국가를 건설할 것을 꿈꾸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238) 미륵불은 본래 인간들이 말세의 상태를 반성하고 선심을 일으킴으로써 수명이 8만 4천세에 이르는 이상세계가 실현되었을 때 하생한다고 되어 있지만, 말법세계를 구제할 수 있는 것은 當來佛로서의 미륵불의 하생뿐이라고 믿어지기도 하였다.239) 그렇다면 궁예가 명주에 들어갔을 무렵 그 일대의 하층농민들은 미륵불이 하생하는 이상세계의 도래를 대망하고 있었음직하다.240)

 이미 살펴보았듯이 궁예는 이미 승려 시절 진표의 미륵신앙에 정통하였고, 그가 그것을 미륵신앙에 접하였던 곳이 바로 명주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궁예는 명주의 하층농민들에게 미륵불이 하생하는 이상세계의 실현을 내세움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휘어잡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가령 궁예는 사졸들과 더불어 동고동락하고 상벌을 공정히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신망을 얻어 장군에 추대되었다고 한다. 궁예가 사졸들과 즐거움은 물론이고 괴로움과 수고로움을 함께 하여 사졸들이 그를 사랑하였다는 것은 그가 내세운 미륵불 하생의 이상세계가 평등한 인간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세상이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상벌을 공정히 하여 사졸들이 궁예를 두려워하였다는 것은 그가 엄한 軍律을 제정하였으며 사졸들은 그것을 준수하였던 것으로 풀이된다. 그렇다면 이는 진표의 미륵신앙에서 계율이 중요시되었던 것과 서로 통하는 면은 없는 것일까.

 앞서 궁예의 자립에는 허월과 개청 등 굴산문 승려들의 도움이 있었으리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허월은 물론 개청을 비롯한 다른 승려들도 궁예가 미륵불 하생의 이상세계의 실현을 내세우면서 하층농민들을 포섭하는 데에 일정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241)

 명주를 떠난 궁예는 895년 8월까지 鐵圓(鐵原) 일대를 장악하였고, 그 다음 해인 896년 철원에 도읍하였다.242) 궁예가 나라를 열고 왕이라고 칭할 만하다고 하여 내외의 관직을 설치하였던 것은 896년 철원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궁예는 896년 철원에서 세력기반을 확립하였다고 본다.

 궁예가 건국의 태세를 갖출 수 있었던 것은 휘하에 많은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고, 浿西지역의 호족들이 많이 귀부하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 중 먼저 손꼽아야 할 것은 역시 궁예가 많은 병력을 확보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강력하였다는 점일 것이다. 패서호족들이 궁예에게 귀부하였던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궁예와의 무력 대결을 피하려고 한 때문이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궁예의 건국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궁예와 패서호족들과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잠시 미루어 두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당시 궁예가 확보하고 있었던 병력에 대해 검토하기로 한다.

 궁예가 패서호족들이 귀부할 정도로 많고 강한 병력을 갖게 되었던 것은 철원 등을 점령한 후였다. 그는 기왕에 확보한 병력에 더하여 철원 등 점령지의 주민들을 대거 자신의 병력으로 흡수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궁예는 철원을 비롯한 점령지역과 별 연고가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궁예가 이들 지역을 무력으로 차지하였다는 것에서 명주와는 사정이 다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궁예는 어떻게 병력을 늘릴 수 있었던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865년 철원 到彼岸寺의 鐵造毘盧遮那佛像이 만들어진 경위가 주목된다.243) 그에 따르면 香徒들은 釋迦가 입적한 후「三十(千)光」이 비치지 않은 지가 1806년이 되었음을 슬퍼하여 불상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석가가 입적한 후 正法 5백년(혹은 천년), 像法 천년이 지나면 말법의 시대 곧 말세가 온다고 한다. 향도들이 당시를 하필 석가가 입적한 해를 기준으로 계산하여 1806년이 되었다고 하였음은 곧 그들이 당시를 말세라고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도피안사의 향도들은 주로 철원 일대의 호족들과 자영농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한 처지의 향도들이 말세의식을 갖고 있었다면 하층농민들은 더욱 그러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흉년이라도 들면 굶주림에 시달리거나 유이민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여기서 진표의 점찰법회가 그의 생전에는 물론 사후에도 전국의 여러 지방에서 행하여졌으리라는 점, 그 포교 대상도 주로 하층농민들이었으리라는 점 따위를 떠올리게 된다. 그렇다면 철원 일대의 하층농민들도 명주의 그들과 마찬가지로 진표의 포교 이래 말세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미륵불이 하생하는 이상세계의 도래를 대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244) 그리고 궁예는 명주에서처럼 그러한 세상의 도래를 내세우면서 그 일대의 하층농민들을 포섭함으로써 많은 병력을 보유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한편 신라 하대에 석가의 입적을 기준으로 하여 佛紀를 적었던 다른 예들을 보면 그것들은 주로 연대를 표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반면 도피안사 향도들이 불기를 적었던 것은 불상의 제작 연대를 밝히고자 함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그보다는 자신들이 살고 있던 때가 석가가 입적하여 삼천광이 비치지 않게 된 지 1806년 후이므로 슬퍼할 수밖에 없는 말세라는 시대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상대적으로 도피안사 향도들의 말세의식이 보다 더 절실하였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렇다면 한산주 일대에서 말세의식이 강하였고, 따라서 미륵불이 하생하는 이상세계의 도래를 열망하였던 것이 바로 철원 지역의 하층농민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궁예가 하필 철원을 도읍으로 삼은 이유 중의 하나는 이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짐작해본다.

221)궁예의 건국과정에 대한 자료는≪三國史記≫권 50, 列傳 10, 弓裔·권 11 新羅本紀 11, 진성여왕·권 12, 新羅本紀 12, 효공왕 및≪高麗史≫권 1, 世家 1, 太祖 卽位前條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하여 이들 사료를 인용할 경우 그 전거를 밝히지 않을 것이다.
222)궁예는 895년 8월에 鐵圓(鐵原)을 비롯한 漢山州 일대를 점령하였으므로, 그가 명주를 떠난 것은 그 이전일 것이다. 한편 궁예가 명주에서 자립하였음은 이미 지적된 바이다(金杜珍,<新羅下代 崛山門의 形成과 思想>,≪省谷論叢≫17, 省谷文化財團, 1986, 314쪽).
223)이하 허월과 김순식에 대해서는≪高麗史≫권 92, 列傳 5, 王順式傳 참조.
224)金杜珍, 앞의 글(1986), 315쪽. 특히 주 59 참조.
225)金甲童,<羅末麗初 地方勢力의 動向>(≪羅末麗初의 豪族과 社會變動硏究≫, 高麗大 出版部, 1990), 68쪽.
226)金杜珍, 앞의 글(1986), 315∼319쪽 참고.
227)鄭淸柱, 앞의 글, 29쪽.
228)이와 관련하여서는 金貞淑,<金周元世系의 成立과 그 變遷>(≪白山學報≫28, 1984), 190∼191쪽 참고.
229)尹熙勉에 의하면 대호족은 자기의 세력 범위 내에 있는 여러 중소호족들을 지배하였을 것이라고 한다(尹熙勉,<新羅下代의 城主·將軍>,≪韓國史硏究≫39, 1982, 65쪽).
230)洪承基,<後三國의 분열과 王建에 의한 통일>(≪韓國史市民講座≫5, 一潮閣, 1989), 62∼63쪽.
231)洪承基, 위의 글, 65∼66쪽.
232)洪承基, 위의 글, 68∼69쪽.
233)≪三國遺事≫권 4, 義解 5, 關東楓岳鉢淵藪石記.
234)이하 진표의 말세의식과 그 영향에 대해서는 趙仁成,<新羅末 農民反亂의 背景에 대한 一試論―農民들의 世界觀과 관련하여―>(≪新羅末 高麗初의 政治·社會變動≫, 신서원, 1994), 19∼21쪽 및 27∼29쪽 참조.
235)金煐泰,<新羅占察法會와 眞表의 敎法硏究>(≪佛敎學報≫9, 1972), 105∼107쪽. 지장보살은 석가가 입적한 후 미륵불이 출현하기까지의 말법시대인 無佛세계에 나타나 천상에서 지옥까지의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라고 한다(金南允, 앞의 글, 139쪽).
236)金南允, 위의 글, 143쪽.
237)蔡印幻,<新羅 眞表律師硏究 2―占察의 戒義와 方法―>(≪佛敎學報≫24, 1987), 62쪽.
238)李基白, 앞의 책(1986), 273∼274쪽. 한편 진표의 미륵신앙을 미륵상생신앙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金南允, 앞의 글, 136쪽).
239)金三龍,<總說>(≪韓國彌勒信仰의 硏究≫, 同和出版公社, 1983), 64∼65쪽.
240)신라 中古期에 원광에 의해 점찰법회가 열렸었다. 그런데 그것은 말법 도래의 위기감에서 비롯되었으며, 그에 따라 미륵불에 가탁된 이상세계의 건설에 대한 갈망이 고조되어 花郞을 미륵의 화신으로 여기게 되었을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李基東,<新羅 花郞徒 硏究의 現段階>,≪李基白先生古稀紀念 韓國史學論叢≫上, 1994, 一潮閣, 168∼169쪽). 여기서 말세의식과 미륵신앙이 연결되는 또다른 예를 찾을 수 있다. 단 중고기의 말세의식―미륵신앙과 진표 이래 하대의 그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어 보인다. 언뜻 생각하여도 전자가 체제유지적인 성격의 것인 반면 후자는 오히려 반체제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241)이와 관련하여 굴산문의 개조인 범일이 진표의 미륵신앙과 무관하지 않았으리라는 지적이 참고된다(金南允, 앞의 글, 146쪽). 한편 필자는 앞의 글(1993), 18∼19쪽에서 崔彦撝가 940년 찬술한<地藏禪院朗圓大師悟眞塔碑>(≪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를 인용하면서 개청이 “굴산사를 떠나 보현산사에 옮겨 간 후 그 이름을 地藏禪院이라고 바꾸었다”고 하고, 거기에는 “지장보살의 역할을 자임하면서 말세의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개청의 뜻이 담겨져 있을 것”이라고 풀이하여 그가 미륵신앙을 내세우면서 하층농민들을 포섭하려고 했던 궁예에게 협조하였을 것으로 보았다. 비문에 따르면 개청이 보현산사에서 입적하였다고 하므로 그가 보현산사의 이름을 지장선원으로 바꾸었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 아마 그의 생전부터 보현산사는 지장선원으로도 불리웠을 것으로 여겨진다. 단 그러하더라도 그것은 개청이 지장보살을 중요시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명의 제목에서 엿볼 수 있듯이 지장선원이 공식적인 명칭으로 생각된다는 점도 고려할 일이다.
242)≪三國遺事≫권 1, 王曆 1, 後高麗 弓裔.
243)<到彼岸寺毘盧遮那佛造像記>(≪譯註 韓國古代金石文≫3, 韓國古代社會硏究所, 1992), 314∼315쪽.
244)도피안사 향도들은 말세를 벗어나기 위해 비로자나불상을 만들었지만, 철원 일대의 하층농민들은 미륵불의 하생을 기대하였을 것으로 헤아려진다는 점에서 양자는 구별의 여지가 있다(趙仁成, 앞의 글, 1994, 16쪽, 주 17).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