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대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Ⅲ. 후삼국의 정립3. 태봉2) 후고구려의 건국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1. 중대에서 하대로
          • 1) 기로에 선 중대 전제왕권
          • 2) 혜공왕 말년(780)의 정변 ― 중대의 종말
          • 3) 하대의 개막과 원성왕계의 성립
        • 2. 귀족사회의 분열과 왕위쟁탈전
          • 1) 왕실가족에 의한 권력독점
          • 2) 무열왕계의 반발과 김헌창의 난
          • 3) 범진골 귀족세력 화합책의 시도
          • 4) 원성왕계 내부의 왕위계승쟁탈전
        • 3. 정치개혁의 실패
          • 1) 율령의 개정을 통한 집권체제의 정비 시도
          • 2) 근시기구와 문한기구의 합체화에 의한 권력집중 시도
        • 4. 골품제도의 퇴화
          • 1) 골품제의 사회적 기반의 축소
          • 2) 진골귀족의 분열
          • 3) 6두품세력의 성장
        • 5. 수취체제의 모순과 농민층의 피폐
          • 1) 귀족 및 사원의 농장경영과 왕경의 번영
          • 2) 농민층의 피폐와 자영농민의 몰락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1. 호족세력의 대두 배경
          • 1) 호족의 개념
          • 2) 호족세력의 대두 배경
        • 2. 호족세력의 대두
          • 1) 낙향귀족 출신의 호족
          • 2) 군진세력 출신의 호족
          • 3) 해상세력 출신의 호족
          • 4) 촌주 출신의 호족
        • 3. 장보고와 청해진
      • Ⅲ. 후삼국의 정립
        • 1. 후삼국기의 신라
        • 2. 후백제
          • 1) 후백제의 성립
            • (1) 견훤의 출신과 군사적 기반
            • (2) 후백제의 성립과정
          • 2) 후백제의 발전과 호족연합
            • (1) 영토의 확대
            • (2) 호족과의 연합
          • 3) 후백제의 대외정책
            • (1) 대신라정책
            • (2) 대고려정책
            • (3) 대중국·일본정책
          • 4) 후백제의 몰락
            • (1) 신검 형제의 정변
            • (2) 신검정권과 그 멸망
        • 3. 태봉
          • 1) 궁예의 출신과 사회적 진출
          • 2) 후고구려의 건국
            • (1) 자립과 세력기반의 확립―하층농민의 포섭
            • (2) 건국―호족들과의 제휴
          • 3) 마진과 태봉의 중앙정치조직
            • (1) 광평성체제의 성립과 호족연합정권-마진
            • (2) 광평성체제의 변화와 전제왕권―태봉
          • 4) 태봉의 몰락
            • (1) 궁예의 정교일치적 전제주의의 추구와 그 지지세력
            • (2) 반궁예세력의 동향과 918년 정변
      • Ⅳ. 사상계의 변동
        • 1. 유교사상의 변화
          • 1) 유교사상의 발달
          • 2) 숙위학생의 활동
          • 3) 유교사상의 변화
        • 2. 불교의 변화
          • 1) 교학 불교의 전개
            • (1) 화엄종
            • (2) 법상종
          • 2) 선종의 흥륭
            • (1) 북종선의 전래와 남종선의 도입
            • (2) 선종 유행의 사회적 기반
            • (3) 선종산문의 성립
            • (4) 선종사상의 경향
          • 3) 미륵신앙
            • (1) 미륵의 출현과 말법신앙
            • (2) 궁예의 이상세계 건설
          • 4) 유·불·선 3교의 융합
            • (1) 유·불 2교의 교섭
            • (2) 유·불·선 3교의 조화
        • 3. 풍수지리·도참사상
          • 1) 풍수지리설의 도입
          • 2) 유식론적 선사상의 성립
          • 3) 지방호족 중심의 국토 재구성안
          • 4)<삼국도>의 작성과 비보사상
          • 5) 도참사상의 전개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2) 건국―호족들과의 제휴

 궁예에게 귀부한 패서호족으로 우선 平州(平山)의 朴遲胤 가문을 들 수 있다.245) 그 아버지 朴直胤은 신라말 大毛達이었다고 한다. 대모달은 고구려의 장군직명인 大模達을 가리키는 것으로 신라의 장군에 견주어 볼 수 있다. 너무도 당연한 것이지만 신라 정부에서 박직윤을 대모달에 임명하였을 리는 없다. 그는 대모달을 자칭하였을 것이다. 신라 하대 대호족들이 장군을 자칭하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박직윤은 평주의 대호족으로서 패서 지역의 13군현246)을 거점으로 대두한 호족들에게 상당한 지배력을 행사하였으리라는 점, 그의 아들 박지윤도 역시 그러하였으리라는 점 등을 짐작할 수 있다.247) 그리고 박지윤이 궁예에게 귀부함248)에 따라 패서 지역의 다른 호족들도 궁예에게 귀부하였을 것으로 보아 좋을 듯하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패서호족들의 귀부는 일차적으로 궁예의 병력이 많고 강함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박지윤은 궁예와의 정면 대결을 피하고, 자신의 세력권에 대한 기득권을 최대한 보장받으려는 목적에서 궁예에게 귀부하였다고 할 수 있다.249) 하지만 대호족이었던 박지윤의 귀부를 그렇게 간단히 취급할 수는 없다. 그가 귀부하였던 것은 궁예와의 결합을 통해 얻고자 하는 더 큰 무엇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박지윤은 박혁거세의 후손으로 되어 있다. 그의 할아버지인 赤烏는 신라의 지방관을 역임하였으며, 그의 아버지 박직윤 이래 평주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가문은 본래 중앙의 귀족가문이었으나 박직윤대에 평주에 낙향하였던 것이다. 낙향하게 된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그가 중앙관리로서 출세하기를 기대하기 어려운 처지였을 것임은 짐작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박직윤은 반신라적인 성향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박직윤이 대모달이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패서 지역에서 대모달과 같은 고구려 직명이 통할 수 있었음을 일러준다.250) 나아가 그 지역 주민들의 상당수가 고구려 유민들이었으리라는 점, 당시까지도 그들이 고구려의 문물제도를 알고 있었으리라는 점 등을 시사한다. 요컨대 패서 지역의 주민들 중 상당수가 고구려 유민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박직윤이 장군이 아니라 하필 대모달을 칭하였던 것은 그가 고구려의 재건을 내세우면서 이 지역의 고구려 유민들을 지배하였음을 알려 주는 것이 아닐까.251) 그리고 그 아들 박지윤도 역시 그러하지 않았을까. 비록 그들이 견훤이나 궁예처럼 백제나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명분을 걸고 건국은 하지 못하였지만, 그 先驅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처럼 반신라적인 나아가 고구려를 재건한다는 기치를 내세우면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기미마저 보이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박지윤에게 있어 패서 지역에 대한 기득권의 유지라는 것은 그가 궁예에게 걸었던 최소한의 기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박지윤은 궁예와 제휴하여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 나아가 새로운 국가의 지배세력으로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향상시키려고 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박지윤을 따라 궁예에게 귀부하였던 다른 패서호족들도 이에 준하여 생각해서 좋을 줄 안다.

 한편 박지윤은 상당한 무력을 소유하고 있었고, 또 동원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고 여겨진다. 박지윤과 그의 영향력하에 놓여 있었을 패서호족들은 浿江鎭의 군사조직에 기대어 성장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252) 그렇다면 비록 궁예가 군사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자신에게도 상당한 손실이 예상되는 박지윤을 비롯한 패서호족들과의 무력 대결을 바람직하게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과의 제휴를 원하였을 법하다. 신라를 타도하고 새로운 국가를 세우겠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보다 확고한 군사적 기반을 필요로 하였을 궁예였음을 생각하면 이는 그럼직하게 여겨진다.

 패서호족들이 궁예에게 귀부할 즈음인 896년 松岳(開城)의 王隆(왕건의 父, 원명 龍建, 후에 世祖)이 귀부하였다. 귀부 당시 왕륭은 沙粲이었다고 한다. 사찬은 본래 중앙의 관등이었지만, 신라 하대에 上村主 혹은 第二村主가 사용하였던 예가 있다. 고려초에는 호족 휘하의 상급 촌주들이 이를 칭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왕륭이 郡을 들어 궁예에게 귀부하였다는 것은 당시 그가 송악군 전체를 대표하는 상촌주였음을 시사한다. 동시에 그것은 상촌주 왕륭이 송악군의 향배을 결정할 수 있었음을 일러 주기도 한다. 이에 비록 왕륭이 상촌주였지만, 이미 송악군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를 호족에 버금가는 존재로 취급하여 좋을 줄 안다.253) 그렇다면 왕건 가문의 호족적 기반은 그리 강한 것이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예는 왕건가를 후원하고 우대하였던 듯하다. 가령 궁예는 왕륭의 설득에 따라 송악에 勃禦塹城을 쌓도록 하고 그 성주에 왕건을 임명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왕건가의 송악군에 대한 지배권이 보다 확고하게 되었을 것이다. 귀부 당시 호족에 준하는 지위를 갖고 있었던 왕건가는 이제 본격적으로 송악의 호족으로서 행세를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한편 이와 같이 궁예가 호족적인 기반이 약한 왕건가를 후원하고 우대하였던 것은 궁예가 그들을 통해 얻고자 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왕건가는 그 선대로부터 해상무역에 종사하였으며, 그를 통하여 상당한 富를 쌓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궁예가 왕건가를 우대하였던 것은 특히 그들의 경제력을 자신의 기반으로 삼고자 함이었다고 이해된다.254)

 군사적 기반이 강하였던 평주의 대호족 박지윤을 비롯한 패서호족들과 상당한 경제력을 확보하고 있었던 왕건가와 제휴하였던 궁예는 898년 철원을 떠나 송악으로 천도하였다. 송악이 왕건가의 본거지라는 점이나 그 배후에 바로 평주가 위치한다는 점 등이 눈길을 끈다. 즉 궁예가 박지윤과 왕건가와의 결합을 공고히 하여 그들의 군사적·경제적 기반을 활용하려고 천도를 결정하였던 것으로 헤아려 볼 수 있다. 송악으로 천도한 이듬해인 899년 궁예는 북원을 중심으로 대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양길과 겨뤄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는 궁예의 송악 천도가 성과를 거두었음을 말해 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양길을 격파함에 따라 그 이듬해(900) 궁예는 남쪽으로 영역을 늘릴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廣州와 唐城(南陽)을 수중에 넣음으로써 궁예는 한강 하류 유역을 확보하고, 나아가 서해 활동의 기반을 다짐으로써 해상으로부터 후백제를 견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南漢江 유역의 요지인 國原(忠州)과 인근 지역을 확보함으로써 후삼국 관계에서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255) 그러므로 900년 정복활동의 성공적 수행은 901년 궁예가 후고구려256)를 세울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거니와, 이 역시 궁예가 송악 천도를 통해 박지윤과 왕건가와의 결합을 보다 공고히 하여 그들의 군사적 경제적 기반을 충분히 이용한 결과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처음 미륵신앙을 내세워 하층농민을 포섭하여 자신의 기반으로 삼았던 궁예였지만, 그러나 호족들과의 제휴를 통해 건국하게 되었다. 미륵하생의 이상세계에 대한 종교적인 염원만으로는 또 그것만을 지닌 농민들을 이끌고서는 국가를 건설한다던가 혹은 운영한다던가 하는 것이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궁예정권은 호족연합정권으로서 출범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245)이하 박지윤 가문에 관한 사실은<朴景仁墓誌>(≪朝鮮金石總覽≫上), 303쪽 및

<朴景山墓誌銘>(≪韓國金石文追補≫, 亞細亞文化社, 1968), 143쪽에 의함. 그 가문의 사회적 진출과 궁예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鄭淸柱,<新羅末 高麗初 豪族의 形成과 變化에 대한 一考―平山 朴氏의 一家門의 實例 檢討―>(≪歷史學報≫118, 1988), 3∼15쪽 참조.
246)李基東,<新羅 下代의 浿江鎭>(≪韓國學報≫4, 1976 ;≪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郞徒≫, 韓國硏究院, 1980, 212∼216쪽).
247)이상과 관련하여서는 金光洙,<高麗建國期의 浿西豪族과 對女眞關係>(≪史叢≫21·22, 1977), 138∼139쪽 참조.
248)鄭淸柱, 앞의 글(1988), 12쪽.
249)河炫綱,<高麗建國의 經緯와 그 性格>(≪韓國中世史硏究≫, 一潮閣, 1988), 25쪽.
250)金光洙, 앞의 글, 139쪽.
251)鄭淸柱, 앞의 글(1988), 10쪽.
252)李基東, 앞의 책, 216∼220쪽.
253)李基東, 위의 책, 227∼228쪽 참고.
254)朴漢卨,<後三國의 成立>(≪한국사≫3, 국사편찬위원회, 1976), 635쪽.
255)이상과 관련하여서는 河炫綱, 앞의 글, 27쪽 참고.
256)≪三國遺事≫권 1, 王曆 1, 後高麗 弓裔. 원래 국명은 고려였을 것으로 판단되지만 왕건의 고려와 구별하기 위하여 후고구려라고 한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