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향촌사회의 친족관계망
(1) 생활권과 친족관계망
고려시대 향촌사회와 친족관계망에 대해서는 호적대장 등과 같은 전반적 양상을 전해주는 자료들이 없어 이해에 어려움이 있다. 그러한 가운데 고려시대에 들어와 성립한 각 지방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인 토성과 관련하여 부계친족 집단으로서의 성씨집단이 향촌사회의 구성에 기본단위가 되는 것으로 보는 이해가 제기되었다.228) 그러한 이해는 구체적인 증거에 의해 도출된 결론이라기 보다는 조선 후기의 동족촌의 양상을 소급시켜 연결시킨 것이었으며, 그에 따라 고려시대의 향촌사회도 동족촌의 형태로 파악하였다.
고려시대의 동족촌에 대해서는 현종대의 若木郡 지역의<淨兜寺五層石塔造成形止記>(이하<形止記>로 약함) 자료를 통해서 추구되어, 약목군이 토성의 성씨집단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연구가 제기되기도 하였다.229)
이<형지기>의 연구에서는 표기된 인명의 앞 글자가 姓字일 가능성에 대해,<형지기>에서 나타나는 빈도와 후대에 성자로 알려진 것인지의 여부를 기준으로 하여, 개연성이 높은 것으로 李·金, 개연성이 있는 것으로 成·柳·文·元·廉·洪 그리고 이상의 8가지 이외는 개연성이 없는 것으로 구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지리지에 기록된 약목현의 토성들이 성씨집단을 이루었을 것이라는 가정에 의거함으로써 그 결론은<형지기>의 기록상황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 되고 말았다. 즉≪世宗實錄地理志≫에는 약목현의 토성으로 李·柳·韓, 그리고 촌성으로 金이 기록된 것에 의거하여 당시 약목군이 이들 성씨의 동족촌적인 집단들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이러한 주장이<형지기>의 기록을 통해 근거를 가지려면, 적어도 앞의 이 씨·유씨·한씨 및 김씨가<형지기>에 열거된 인명 중에서 다수임을 입증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 토성은<형지기>의 성씨일 가능성을 갖는 세 부류들과도 잘 부합되지 않으며, 전체 71명의 인명 중에서 약목군 성인 李가 4명, 柳가 1명, 韓은 없고, 촌성인 金이 6명에 불과하다. 그리고 토성 ‘韓’에 맞추기 위해<형지기>의 ‘漢’이 후에 ‘韓’으로 쓰게 되었을 것이라고도 하였는데, 그렇다 해도 ‘漢’은 1명에 불과하다.230)
이는 토성에 해당하는 성씨를 갖는 자들이 그 지역에 살고 있었음을 반영해 주는 것일 수는 있지만, 그 성씨를 갖는 자들이 주민의 주류를 이루고 동족촌과 같은 집단을 이루었다는 증거는 될 수 없다. 또한 만일 인명의 앞 글자들이 위와 같이 토성을 갖는 자들의 존재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토성 이외의 다른 성씨의 존재에 대해서도 동일한 의미를 가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실제로 고려 초에도 그 지역 토성이 아닌 성씨를 갖는 인물들이 존재하는 사례들이 확인되므로, 그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그렇다면 성씨였을 개연성이 있다고 분류한 것 중에 토성 이외의 成·文·元·廉·洪 등도 토성에 해당하는 것들과 마찬가지로 성씨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겠다. 다만 원씨의 경우는 주변지역의 토성에서 뿐만 아니라 경상도 지역 전체의 토성에서도 나타나지 않으므로 가능성이 그만큼 적을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지리지들의 성씨조의 기록이 서로 출입이 있는 것으로 보아,231) 지리지에서 누락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다. 그리고<형지기>에서 보이는 吉이나 明도 경상도지역의 성씨조에서 나타나는 것으로232) 이들도 성씨일 가능성이 없다고 속단하기는 어렵다.
이렇게 보면,<형지기>에서 결코 성씨집단·동족촌의 존재가 검출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인명을 통한 검토만이 아니라 다른 어떠한 내용에서도 당시 약목군 내부의 친족집단의 기능을 반영해 주는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조선시대 지리지에 보이는 약목군 토성 중의 일부가 소수의 인명 중에서 존재했을 가능성은 인정되고, 토성 이외의 다른 성씨들이 소수의 인명 중에서 역시 존재할 가능성도 있어 오히려 토성들과 함께 이성들도 섞여서 사는 상황으로 보인다. 그리고 보다 분명한 것은<형지기>의 대다수 인명은 성씨를 표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漢字式 성씨제도가 대다수의 약목군주민들에게 아직 일반화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동일기록에서 성씨를 사용하는 소수의 부류와 사용하지 않은 대다수가 나뉘어지고 있는 것은 그만큼 그들 사이의 이질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향촌사회의 친족관계망의 구성은 통혼의 지역적 범위 그리고 혼인에 따른 거주지역의 변동을 결정하는 방식이나 이주 등에 의해 결정된다. 그렇다면 호적대장과 같은 향촌사회의 전반적인 친족관계망을 보여주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는 이러한 혼인에 따른 거주지의 결정 방식이나 이주 등의 양태를 통해 친족관계망의 구성을 추정해 보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단편적인 사료일지라도 향촌의 친족관계망의 일면을 보여주는 자료를 통해 그렇게 추정된 결과를 확인해 보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통혼과 이주의 지역적 범위는 당시의 지역적 생활권의 범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대부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출생과 사망이 거듭되는 것과 함께 진행된 통혼이나 이주는 그 지역 향촌사회의 친족관계망을 형성시키는 요인이었다.
고려시대의 혼인은 앞 절에서 본 바처럼 率壻婚으로서, 결혼 초기의 일정기간을 처가에서 지낸 후 夫家쪽 지역에서 살게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妻家쪽 지역에서 사는 경우들도 있었다. 실제로 처부모와 동거하거나 그의 부양을 책임지는 가족들이 적지 않은 비중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혼인제는 혼례 후 신부가 夫家쪽으로 즉시 들어가는 중국식의 親迎制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촌락내의 혈연관계망을 형성시키는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혼인제가 보다 여러 지역 단위를 포괄하는 통혼권 속에서 빈번히 행해진다고 할 때, 그 결과는 동성촌과 같은 부계적인 촌락내의 혈연관계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양태를 만들게 된다.
고려시대의 통혼의 지역적 범위는 동일 군현의 한 촌락내의 통혼도 있고 동일 군현내에서도 다른 촌락들간에서의 혼인이 많았겠으나, 인근 군현 등과의 지역간의 혼인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군현 중에서 1,000정 이상의 규모가 되는 것도 있었지만 20정 이하의 작은 것들도 있었으니233) 이러한 소규모 군현들은 그 자체만으로서는 지역적 생활권이 되기도 어렵고 폐쇄적인 통혼의 단위가 되기도 어려웠다. 따라서 이러한 소규모 군현에서는 인근 군현 등과의 지역간의 혼인이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군현간의 혼인이 금지된 것이 아니라면 큰 군현의 주민이 다른 지역주민과 혼인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다른 군현주민간 혼인의 실례는 이미 신라 말기의 촌락문서에서도 나타나는 데, 沙害漸村의「他郡中妻」를 따라 이주해 나간 烟의 夫妻는234) 서로 다른 군현 출신간의 혼인사례이다. 고려시대로 들어와서 각 지방출신 중앙관인의 개경 진출 후 통혼사례를 제외하면, 중앙 중심으로 기록된 자료들에서 지방민간의 통혼사례를 찾을 수는 어렵겠지만, 당시의 자료에서 소수나마 그 실례들을 찾아볼 수 있다. 광종 23년(972)에 29세의 나이로 鄕貢 급제한 柳邦憲의 부모는 고려초의 혼인사례이다. 유방헌의 부는 전주인으로서 檢務 租藏과 大監을 역임한 지방세력이었고, 유방헌의 모는 潭陽郡人이었다.235) 또 고려 중기의 인물인 李喬의 부모도 본관을 달리한 지방사람간의 혼인사례였다. 黃驪(驪州)가 본관인 이교의 부는「戶長 軍尹」을 지냈고, 그 모는 慶州가 본관으로「戶長 中尹」을 지낸 사람의 딸이었다.
공민왕 21년(1372)에 작성된 朴得賢의 准戶口에서는 지방에서의 혼인사례 가 여럿 발견된다. 당시 호주의 나이는 81세였으므로 그 출생년대는 충렬왕 17년(1291) 경이다. 호주에서 4세대로 올라가는「호주의 祖妻의 父의 부모」의 혼인은 상층 향리 집안간의 혼인이였다. 夫妻의 본관은 羽溪와 同村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동촌」이 바로 앞에 나오는 우계를 의미한다면 동일 본관 안에서의 혼인이 되고, 호주의 본관과 같은 登州를 의미한다면 다른 본관간의 혼인이 된다. 이 혼인의 시점은 12세기 말부터 13세기 초 무렵이다.
같은 무렵에「호주의 증조의 父」毛善은 본관이 密陽인 호장으로서 嵐谷이 본관인 倉正 朴先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 경우는 다른 본관과의 혼인이 명확하다. 역시 같은 시기에「호주의 曾祖妻(증조모)의 父」는 그 선대가 호장·倉正 등 상층 향리출신인 朴奉吉로, 權知戶長인 李仁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들 부처의 본관은 모두「동촌」으로 표기되어 있어 동일 본관간의 혼인이었다.
「호주의 外祖妻의 父의 父」인 沈沖玄은 부호장으로, 兵正인 金呂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들 부처의 본관은 각각 三陟과「동촌」으로 기록되어 있어, 동촌이 지칭하는 바에 따라 동일 본관간의 혼인이 될 수도 있고, 다른 본관간의 혼인이 될 수도 있다.
고려말 우왕 10년(1384)에 작성된 단편적인 豊山柳氏의 계보기록에서도 지방에서의 혼인사례로 호장 柳得公과 부호장 柳實의 딸의 혼인사례가 발견된다. 이들의 본관은 같은 豊山이었다. 공민왕 3년(1391)에 작성된 金得雨의 호 구단자에서도 지방에서의 혼인사례를 볼 수 있다. 증조의 부모와 증조모의 부모의 혼인이 그것으로, 이들은 모두 본관이 안동이었고 대대로 호장을 역임하는 층이었다.
이상의 사례는 주로 지방의 상층인 향리층의 혼인사례였지만, 신라촌락문서에서 보이는 사례에서와 같이 일반 평민층의 경우에도 동일 군현내에서의 혼인만이 아니라 인근 군현간에 혼인이 있었다.
군현인과 津·驛·部曲人의 交嫁所生은 모두 진·역·부곡에 속하게 하고, 진·역·부곡인과 雜尺의 교가 소생은 반씩 나누되 남는 수는 모쪽에 따른다(≪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戶婚).
부곡 등의 특수구역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었던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 규정에서는 특수구역민의 확보를 위해 군현인과의 혼인에 의한 소생을 이들 특수구역민으로 소속시키도록 하고 있다. 이 규정의 주된 적용 대상은 일반 하층 군현인들임이 분명한데, 이러한 규정은 군현인들이 거주 군현 밖에서 배우자를 구하기도 하는 사회적 상황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군현인이 특수구역민과 혼인하는 경우에는 위에서와 같은 불이익이 따르는 것이지만, 일반 인근 군현인과의 혼인에는 그러한 계약도 존재하지 않았다.
고려시대에 이처럼 군현간에 이루어진 혼인은 솔서혼과 결합하여 군현간의 인구 및 호의 이동을 수반하게 된다. 솔서혼에 의해 壻의 처가쪽으로의 이동, 처가에서 살던 호 중에 夫家쪽으로 돌아오는 경우 등이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소생 자녀들 중에는 李承休의 사례처럼 자녀 균분상속에 의해 외가쪽으로 거주지를 이동하는 호들도 있게 된다.
그런데 고려시대의 생활권 및 이주와 관련하여서는 거주지가 본관지역으로 통제되었다고 보는 이해와 유망 등이 아닌 한 합법적인 이주에 제약이 없었다고 보는 이해가 제기되고 있다. 고려시대의 군현의 규모가 작은 것이 많았음을 감안한다면, 향·소·부곡 등의 특수구역 민이 아닌한 단일 군현단위에 거주가 통제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시의 혼속인 솔서혼에 의한 인구와 호의 이동을 고려한다면 동일 군현내에 거주가 긴박되어 있다는 것은 더욱 성립되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이주가 가능하다고 해서 원거리 지역으로 이주해 가는 경우는 당시의 교통이나 그에 따른 전통적인 생활권의 제약을 감안하면 비교적 특수한 경우에 한정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행정적 단위와 관련해서 본다면 소규모의 군현들이 많은 상황에서 군현 단위보다는 주속현으로 구성되는 몇 개의 인근 군현이나 인근 임내의 향·부곡·소 등을 포함하는 범위가 대체적인 생활권이 되고, 이러한 지역범위 속에서 통혼이나 이주 등이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군현의 평균규모가 작고, 100정 이하가 다시 60정·30정·20정을 경계로 세분될 정도로 소규모 군현이 많았음을 고려한다면, 이들 소규모의 개별 지역집단들이 인구 규모의 전체적 변동이나 연령별·성별 인구의 균형을 자체만으로서는 조절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구가 남는 지역과 부족한 지역간의 부단한 인구이동은 필연적인데, 그러한 이동을 제도화하여 인구상의 문제를 조정하는 대처방식을 가족단위에서 보면 두 가지를 볼 수 있다.
중국과 같은 부계사회에서 흔히 나타나는 養子制도 그러한 대처방식의 한가지였다. 고려시대의 범제에서도 양자제는 있었으나, 이미 밝혔듯이 실제로 는 양자제가 거의 시행되지 않았다. 그런데 양자제가 시행된다 하더라도 아들들만의 부계친족에 의존하는 양자제는 대를 이어가기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기가 쉽다.
고려시대에는 이러한 인구문제를 양자제가 아닌 양측적 친속관계에 의한 거주와 자녀간의 균분상속 등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솔서혼과 분가 후의 다양한 거주는 딸(사위와 외손)과 아들 모두를 이용함으로써 그러한 인구문제에 대한 극히 유연한 대처를 가능하게 해주는 제도였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그러한 인구이동의 결과는 촌락내의 혈연관계망을 다양한 계보관계로 얽혀지게 하였다.
혼인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때로는 이주와 이주 후의 통혼도 혈연관계망의 변화요인이 되고 있었다. 그 예를 보면, 무인집권 말기의 인물인 林衍의 열전에는 그 父에 대해 “그 아버지는 어떤 사람인지 알려지지 않았으나, 鎭州에 옮겨와 살며 州吏의 딸에게 장가들어 衍을 낳고는 마침내 진주로 貫을 삼았다”236)고 하였다.
이 임연의 아버지는 진주로 이주해 와 그 곳에서 혼인을 하고, 임연을 출생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주목되는 것은 때로 이러한 처가지역에서의 정착이 처가쪽의 본관 등을 따르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는 임연의 아버지가「妻貫」을 따라 鎭州(鎭川)林氏가 되었다고 보면서 당시에 同姓同本婚이 일반적이었음을 들어 그 부계도 진천 임씨일 가능성이 크다는 해석도 있고,237) 임연은 고려 전기의 진천 임씨와 부계로 연결되지 않으며 貫鄕과 함께 성도 鎭川의 모의 것을 따른 것으로 보는 입장도 있다.238) 여기서 임연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그 성관을 포함한 출신이 알려지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으로 보이고, 그 아버지대에 진천에 이주해 온 점을 보면, 후자의 해석이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생각된다. 적어도 임연의 아버지대에 진천을 본관으로 했다는 사실은 그 전에는 진천이 본관이 아니었음을 뜻하므로, 만일 임연의 가계가 본래 진천 임씨였다면 중간에 다른 어떤 본관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진천을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는 것이 된다. 따라서 임연의 경우는 성관 모두나 또는 적어도 貫을 모쪽으로 따른 사례라 하겠다.
임연의 부와 비슷한 경우로는 金希磾의 선대를 볼 수 있다. 고종대에 활동한 김희제의 열전에는 “金希磾는 본래 群山島 사람이다. 그 선조가 상인을 따라 배편으로 개성에 도래하여 머물러 살며, 마침내 籍으로 삼았다”239)고 하였다. 김희제의 선대도 군산도에서 개성으로 이주하였는데, 그 후로는 개성을 적으로 하면서 그 곳에서 통혼을 하고 있있던 것이다. 이 경우도 성관 모두, 적어도 貫을 바꾼 경우로서 여기에는 임연의 아버지처럼 외족관계나 인척관계의 연고가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 촌락의 혈연양상이 성별에 의해 계고를 한정하는 등, 어떤 일정한 기준 의 사람을 중심으로 결집될 경우, 그 기준에 맞는 사람은 그 촌락에 머물러 두고, 그 기준에 벗어나는 사람은 촌락에서 내보내는 행태로 人의 이동이 진 행되게 된다. 예컨대 아들들을 머물게 하고 결혼 등을 계기로 딸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는 형태의 人의 이동이 계속되면, 각 촌락은 부계적인 친족들로써 이루어지게 된다. 반대로 모계적인 혈족들을 머물게 하거나 받아들이고 부계적인 혈족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는 형태의 人의 이동이 계속되면, 각 촌락은 모계적인 혈족들로써 이루어지게 된다. 예컨대 부계 친족집단으로서의 동성촌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父處制이자 夫處制인 거주에 의해 남성들은 그 지역에 남고 여성들을 내보내는 한편 혼인을 통해 다른 집단으로부터 여성들을 받아들이는 제도가 성립되어야 한다.
그러나 솔서혼이나 처부모와의 동거 등 처가쪽에서의 거주, 자녀 균분상속 등에 의해 유발되는 다양한 연고지에서의 거주는 그러한 부처제적인 거주와 는 근본적인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양측적 친속관계에 의한 다양한 연고지에서의 거주에 의해서는 촌락내의 친족관계망도 동성촌 형태의 부계친족집단 형태가 아닌 양측적 친속관계 형태를 갖게 된다. 그러한 다양한 연고지에서의 거주는 같은 군현 안에서 이루어진 혼인이라도 촌락을 달리 하면 촌락의 혈연 관계망을 다양한 계보로 연결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것을 성씨와 관련해서 본다면, ‘一姓一村’이라는 식의240) 단일 성씨집단 또는 몇 개의 성씨별 집단들이 촌락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여러 성씨들이 뒤섞여 있는 상태가 된다. 고려말의 경우 촌락구성이 소가족형태를 갖는 여러 성씨의 집합체였던 사례를 제시한 연구가 있었다.241) 고려초에도 승려들의 俗籍과 土姓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들이 많음은242) 토성으로 파악된 것 이외에도 다른 성씨들이 섞여 있었음을 보여준다. 본가쪽에서의 거주에 못지않게 처가쪽에서의 거주가 있었던 상황에서 여러 성씨들이 섞여 촌락을 이루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고 할 것이다.243)
앞 절에서 고려시대의「∼씨의 족」,「∼씨의 종」으로 지칭되는 계보관계가 부계적인 계보만이 아니라 성별로 계보를 한정하지 않는 스톡형태의 계보였음을 보면, 촌락사회의 혈연관계망도 성씨별 단위집단이 아니라 스톡형태의 계보관념이 존재하는 속에서 여러 성씨들을 포함한 양측적 친속관계로 얽혀 있는 것임을 예상하게 된다. 居平部曲의 경우 여러 성씨들이 섞여 살고 있는 상태가 확인된 것은 그 한 예가 될 것이다.244)
그리고 촌락사회의 혈연관계망의 실제를 확인해 볼 수 있게 하는 것으로는 소략하지만 우선 다음과 같은 水州의 한 촌락의 노파와 관련된 자료를 볼 수 있다.
왕이 水州 廷谷村에 나이가 104세나 되는 老軀가 있는데 자손 95명이 모두 요역에 이바지한다는 말을 듣고, 그 할머니에게 곡식 30석을 내려 주었다(≪高麗史節要≫권 13, 명종 25년 정월).
위에서는 정곡촌에 사는 104세의 할머니에게 요역 징발대상이 되는 자손이 무려 95명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 요역 징발대상이 되고 있는 95명은 사망한 자손이 제외되고, 생존자 중에서도 16세 미만의 어린아이들과 60세 이상을 제외하고,245) 다시 그 중에서도 여성들은 제외된 숫자이다. 따라서 이 95명이 딸이 개재되는 계보들의 후손들을 제외한 부계적인 계보 한 가지만의 후손 중에서 위의 조건에 해당하는 자들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많다. 104세라는 노파의 나이로 보아 당시 그 자손은 대체로 5∼6세손 이내의 범위까지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아들과 딸이 다양하게 개재되는 모든 계보들과 5·6 세손 이내라 할지라도 위의 조건에 해당하는 자들이 95명임은 많은 숫자로 생각된다. 이렇게 보면, 그 95명의 자손은 그 노파를 祖先으로 하는 스톡형태 계보범위의 후손들 중에서 요역을 부담한 자들이었다고 하겠다. 즉 위의 자료는 향촌사회의 하층 지방민 속에서도 스톡형태의 계보관념이 존재했음을 보여 주는 실례라고 하겠다.
그런데 스톡형태의 계보관념은 친족관계를 인지하는 범주일 뿐 그 자체가 집단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95명의 몇 배에 달했을 것으로 보이는 노파의 전체 후손은 가족적인 생활단위를 이루었을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앞 절에서 가족제도와 관련하여 검토한 黃守의 형제·자매들과 그 자손은 부모의 나이로 보면 3∼4세대 범위의 모든 내외 후손범위인데, 그 정도의 범위가 동거하는 경우도 극히 드물었던 것이다. 위에서 파악되고 있는 것도 정곡촌이라는 촌 단위의 파악이라기 보다는 노파가 살고 있는 정곡촌을 중심으로 그 주변촌락들에도 살고 있었을 노파의 전체 후손 중 요역대상자를 파악한 것이라고 하겠다.
夫家쪽 또는 妻家쪽에서의 거주나 기타 양측적 친속들과의 연고지에서의 거주가 행해질 때, 촌락내의 친족관계망은 단일 스톡형태의 계보범위로 유지될 수 없게 된다. 촌락내에는 보통 몇 개의 스톡범위-직계의 내외 선대계보가 함께 모아지는 범위-들이 있게 되고, 그 범위들 간에는 서로 일부가 겹쳐지는 경향이 있게 된다.246) 특히 인근 촌락들로 구성되는 지역생활권 내에서는 스톡범위들은 더 확대되고 서로 겹쳐지는 정도가 더욱 커지게 된다. 그러한 상태에서 스톡범위가 배타적인 폐쇄성을 갖기는 극히 어렵다.
앞에서 스톡형태의 계보인식이 양측적 친속관계와 결합되어 있었음을 보았는데, 실제의 친족유대는 각 개인을 중심으로 존재하며 촌수에 따른 친소의 차를 갖는 양측적 친속관계로서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한 실체를 다음과 같은 李義旼의 친속과 관련된 사건에서 볼 수 있다.
경주 부유수 房應喬를 면직시키고, 郎中 魏敦謙으로 그를 대신케 했다. 처음에 최충헌이 李義旼의 族을 멸함에 경주 별장 崔茂가 州官의 命을 받아 이의민의 족인 思敬 등 여러 사람을 잡아 죄주었다. 이에 思敬의 族 伯瑜·直材 등이 그를 원망하여 방응교에게 참소하여 이르기를 ‘최무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하였다. 방응교가 그것을 믿고 최무를 잡아 가두니, 백유·직재가 밤에 옥에 들어가 최무를 죽였다. 방응교는 擅殺之罪를 묻지 않고 도리어 최무의 족인 用雄·大義 등을 잡아죽이려 하니, 州人들이 분하고 원통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용웅·대의는 백유·직재를 죽이고, 용웅도 다시 다른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에 이르러 대의 등은 州中의 무뢰배들을 모아 마음대로 횡포를 부리니 방응교가 또한 제어할 수가 없었다. 조정에서 그것을 들은 까닭에 이 命이 있게 된 것이다(≪高麗史≫권 21, 世家 21, 신종 3년 12월 정미).
위에서 보면, 이의민의 族인 思敬 등이 崔茂에게 잡혀 처형되자, 사경의 족인 伯瑜·直才 등이 그에 원한을 품고 최무를 죽였다. 그리고 다시 최무의 족인 用雄·大義 등이 백유·직재를 죽이고, 다시 용웅은 백유 등의 편으로 보이는 자에게 살해되는 꼬리를 문 사건이 일어났다.
「이의민의 족」이라 함에서「족」의 의미는 이의민의 양측적 친속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高麗史節要≫나 李義旼傳에는 위의「족」이 본족·외족·인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3족」이라고도 되어 있다. 당시 다른 무신집권자들의 족당세력들을 보아도 역시 본족·외족·인족으로 된 양측적 친속들이었다.247) 이러한 친속조직은 각자를 중심으로 존재하는 범주이기 때문에 이의민을 중심으로 설정되는「이의민의 족」에 포함된 사경에게는「이의민의 족」과는 일부는 겹치나 나머지는 겹치지 않는 각자 나름의 친속 범주가 존재하는 것이 고「사경의 족」은 바로 사경 나름의 친속 범주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위의 백유·직재 등은「이의민의 족」이 아닌「사경의 족」으로서 이의민에 연루되지는 않았으나 사경이 처형되자 그를 처형한 최무에게 복수하였다.「최무의 족」도 최무의 친속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향촌사회 의 친족관계망이 어떤 출계집단별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계보관계들이 뒤얽혀 있는 속에서 양측적 친속관계가 작용하고 있는 면을 보여준다.
한 개인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계보의 친족관계망은 때로는 비교적 큰 범위를 갖게 되는 것이니, 다음의 金州 사람 大文의 사례는 그 한 예이다.
金州民인 大文이라는 자는 族黨이 백 명 정도였는데, 李英柱가 세력을 믿고 억눌러 奴로 삼으려 하였다. 都官佐郎 李舜臣은 성품이 아부를 잘하여, 이영주의 뜻에 아부하려고 거짓으로 문서를 꾸며 이들을 賤으로 만들었다. 대문이 王府斷事官 趙仁規에게 호소하니, 조인규가 그 案을 살펴보고 왕에게 이영주의 간사함과 거짓됨을 모두 아뢰었다. 이에 왕이 이순신을 가두고 이영주의 관직을 파직시켰다(≪高麗史≫권 123, 列傳 36, 嬖幸 1, 李英柱).
위「大文의 族黨」도 고려에서의「∼의 族黨」이라고 하는 일반적 용례에서처럼 본족·외족·인족 등 한 개인의 다양한 계보의 친속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248) 그러한 대문의 족당들은 대체로 金州 일대에 살았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백 명에 가까운 그 수는 한 개인의 친속들이 때로는 비교적 많은 수가 되기도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문은「壓良爲賤」의 대상이 되고 있었으니, 이 자료는 특히 평민층의 사례를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228) | 旗田巍, 앞의 글(1960). 武田幸男, 앞의 글(1962). 姜晋哲, 앞의 글(19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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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 | 武田幸男, 위의 글. |
230) | 武田幸男, 위의 글에서<形止記>의 人名 첫 글자에서 ‘漢’을 ‘韓’으로 보는 한편, ‘■’을 ‘漢’으로 보아 ‘韓’ 성의 사례가 2명 더 추가될 가능성을 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그 자신도「妄說」의 범위를 벗어나기 힘든 추측이라 하였다. |
231) | 金東洙,<世宗實錄地理志 姓氏條의 검토>(≪東亞硏究≫6, 1985). |
232) | ≪世宗實錄地理志≫에서 보면 ‘吉’은 南界部曲姓(淸河縣)과 加恩縣姓(聞慶縣) ‘明’은 청하현 토성에서 나타난다. 다른 성씨들의 경우 ‘成’은 迎日縣과 鎭海縣의 토성, ‘文’은 蔚山縣·玄風縣·靈山縣·開寧縣의 토성, ‘廉’은 安康縣(慶州) 토성, ‘洪’은 豊山縣(安東大都護府)·缶溪(義興縣)·加利(星州牧)·開寧縣 토성에서 나타난다. |
233) | ≪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公廨田柴 성종 2년 6월. 이 자료에서의 丁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200정 미만의 작은 규모가 다시 여러 등급으로 나누어지고 있는 것은 고려시대에 소규모의 군현들이 많았던 때문으로 보인다. |
234) | 李基白, 앞의 책(1980), 29쪽. |
235) | <柳邦憲墓誌>(≪朝鮮金石總覽≫上, 1919), 265쪽. |
236) | ≪高麗史≫권 130, 列傳 43, 叛逆 4, 林衍. |
237) | 李樹健, 앞의 책(1984), 290쪽. |
238) | 蔡雄錫, 앞의 글(1986). |
239) | ≪高麗史≫권 103, 列傳 16, 金希磾. |
240) | 武田幸男, 앞의 글(1962). 姜晋哲, 앞의 글(1975). |
241) | 李佑成, 앞의 글(1966). |
242) | 李樹健, 앞의 책, 121∼124쪽. 蔡雄錫, 앞의 글, 367∼368쪽. |
243) | 이러한 거주 상태에 따른 촌락의 혈연관계망이 다양한 계보 관계로 얽히고 여러 성씨들이 섞여 살게 되는 양상을 후대에서 찾아 보면, 17세기 초 산음현의 촌락들의 예를 볼 수 있다(盧明鎬, 앞의 글, 1979). |
244) | 李佑成, 앞의 글(1966). |
245) | ≪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戶口. |
246) | 후대의 상황이지만 스톡형태의 계보가 촌락의 구성에서 나타나는 실례는 盧明鎬, 앞의 글(1979) 참조. |
247) | 무인집권자들의 족당세력에 대해서는 盧明鎬,<高麗後期의 族黨勢力>(≪李載龒博士還曆紀念史學論叢≫, 1990) 참고. |
248) | 族黨의 용례에 대해서는 盧明鎬, 앞의 글(1987)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