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대외관계
1. 10∼12세기 동아시아 정세와 고려의 북진정책
1) 10∼12세기 동아시아 정세
고려 전기, 즉 10∼12세기 동아시아의 정세는 격동의 시대였다. 중국 대 륙만하여도 300년간 통일정권을 유지해 왔던 당나라가 멸망하고 5대 10국의 분열기를 거쳐 다시 송에 의해 재통일되는 왕조의 변혁을 거듭하였다. 이러 한 중원의 분열은 곧 북방의 거란족으로 하여금 군사력의 성장뿐 아니라 국가 의식까지 고취시켜 북방민족에 의한 최초의 정복국가 건설을 이룩케 하였다. 따라서 송이 중원을 재통일하였을 때 그 영토의 일부, 즉「燕雲 16州」는 이미 거란에게 빼앗긴 상태였다. 이에 송은 이 지역 회복을 위해 거란과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러나 거란의 군사력 또한 만만치 않아 결국 두 나라는 1004년 澶淵의 盟約을 맺고 외형적으로 평화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12세기 초 여진족에 의해 금이 건국됨에 따라 대륙의 정세는 다시 바뀌었 다. 왜냐하면 금은 거란을 멸망시키고(고려 인종 3년;1125) 이어 2년 뒤에는 송까지 남천시켰기 때문이다. 이로써 12세기 이후 대륙에는, 하북과 만주에는 여진족의 금나라가, 그 이남에는 한족의 남송이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한편 당시 고려정국도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을 거쳐 마침내 무신란에 의 해 무신정권이 수립되는 큰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고려는 대외적으로 거란과 송이 대치되어 있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명분보다는 실리를 앞세우는 외교정책을 관철시켜 갔다. 금에 대하여는 정치적인 관계를, 송에 대하여는 상인을 통한 민간차원의 경제·문화교류를 지속하였으므로 고려는 국제적으로 실리에 바탕을 둔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북송과 거란이, 그리고 뒤에는 남송과 금이 서로 대치하고 있을 때 서쪽 사막에는 黨項族이 세운 西夏가 있었다. 비록 그 국력은 이들 왕조와 비교될 정도는 아니었으나 서하는 중개무역으로 실리를 얻으면서 오랫동안 국운을 유지하였다.
이상과 같이 10∼12세기 중국대륙에서 중국과 북방의 정복왕조 사이에 갈등과 대립의 국면이 전개되고 있을 때 일본의 국내사정도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그것은 바로 藤原氏·平氏 등의 귀족정권이 지방무사인 源氏에 의해 몰락하고 幕府政權(1185∼1333)이 수립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