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려 시대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Ⅱ. 대외관계3. 북방민족과의 관계1) 거란 및 여진과의 전쟁(1) 거란의 침입과 그 항쟁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1. 신분제도
          • 1) 신분제도의 형성과 구조
            • (1) 신분과 신분제도
            • (2) 신분구조의 구성
            • (3) 신분계층의 편성 단위와 기준
          • 2) 관인계층
            • (1) 관인층의 특성
            • (2) 음서제와 과거제
            • (3) 공음전과 한인전
            • (4) 문반·무반과 남반
            • (5) 귀족의 계층구성
          • 3) 향리
            • (1) 임무
            • (2) 향역의 세습과 종사
            • (3) 향리의 신분
          • 4) 군인
            • (1) 군역
            • (2) 군역의 세습
            • (3) 군인의 신분
          • 5) 잡류
            • (1) 이직으로서의 잡류
            • (2) 이족으로서의 잡류
          • 6) 양인농민
            • (1) 공과·공역의 부담
            • (2) 생산계층
            • (3) 세업으로서의 농업생산
          • 7) 공장
            • (1) 공장의 유형
            • (2) 공장의 신분
          • 8) 향·소·부곡인
            • (1) 사회·경제적 지위
            • (2) 신분상 지위
            • (3) 신분상 제약의 의미
          • 9) 진척·역민
          • 10) 양수척 (화척·재인)
          • 11) 노비
            • (1) 신분상 특성
            • (2) 사회·경제적 지위
          • 12) 신분제도의 성격
        • 2. 가족제도
          • 1) 가족과 혼인
            • (1) 가족
            • (2) 혼인
          • 2) 재산의 상속
          • 3) 친족조직
            • (1) 성씨와 계보관념
            • (2) 부변·모변과 양측적 계보관계
            • (3) 촌수와「나」를 기준으로 한 친속
            • (4) 양측적 친속의 특성과 기능상태
          • 4) 향촌사회의 친족관계망
            • (1) 생활권과 친족관계망
            • (2) 계급내혼에 의한 구성
        • 3. 사회정책과 사회시설
          • 1) 사회정책
            • (1) 진휼정책
            • (2) 의료정책
          • 2) 사회시설
            • (1) 의창
            • (2) 상평창
            • (3) 제위보
            • (4) 동서대비원
            • (5) 혜민국·기타 기구
            • (6) 지방의 의료기구
            • (7) 민간의 의료사업
        • 4. 형률제도
          • 1) 율령의 내용
            • (1)≪고려사≫형법지에 대한 검토
            • (2) 고려율의 내용
          • 2) 사법제도
            • (1) 고려율의 적용문제
            • (2) 고려물의 형벌체계
            • (3) 고려물의 행형체계
            • (4) 행형의 실태
      • Ⅱ. 대외관계
        • 1. 10∼12세기 동아시아 정세와 고려의 북진정책
          • 1) 10∼12세기 동아시아 정세
            • (1) 당송변혁기 중국의 정치적 동향
            • (2) 북방민족의 흥기와 송의 동향
            • (3) 일본의 정치동향
          • 2) 고려의 북진정책
            • (1) 국초 북진정책과 발해유민 대책
            • (2) 국초 여진문제의 발생
        • 2. 5대 및 송과의 관계
          • 1) 5대와의 관계
            • (1) 태조대의 대중국관계
            • (2) 혜종·정종대의 대중국관계
            • (3) 광종대의 대중국관계
          • 2) 송과의 관계
            • (1) 정치적 관계
            • (2) 문화적 관계
            • (3) 여송 교통로
            • (4) 경제적 관계
        • 3. 북방민족과의 관계
          • 1) 거란 및 여진과의 전쟁
            • (1) 거란의 침입과 그 항쟁
            • (2) 여진정벌과 9성
          • 2) 거란 및 금과의 통교
            • (1) 거란과의 통교
            • (2) 금과의 통교
        • 4. 일본 및 아라비아와의 관계
          • 1) 일본과의 관계
            • (1) 사절의 내왕
            • (2) 표류민의 송환
          • 2) 아라비아 및 남양 여러 나라와의 관계
            • (1) 고려와 아라비아와의 관계
            • (2) 남양 여러 나라와의 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3. 북방민족과의 관계

1) 거란 및 여진과의 전쟁

(1) 거란의 침입과 그 항쟁
가. 제1차 침입

 936년 후삼국의 혼란기를 수습하고 한민족의 재통합을 이룩한 고려 태조는 이어 고구려 고토회복을 위한 북진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북진정책은 곧 발해유민에 대한 포용정책을 표함으로써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요)과의 마찰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즉 거란은 고려와의 通交를 통해 국제사회의 고립에서 벗어나고자 하였으나, 동족국가로 인식하고 있던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 대한 고려의 입장은 강경하였으므로 두 나라는 오랫동안 정치적인 교류가 단절되었다.

 그 사이 고려는 꾸준한 북진정책의 결과 성종대에 고려의 영토는 청천강을 넘어 博川·寧邊·雲山·泰川 등지와 압록강 하류 일부 지역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11세기 초 자체내의 왕위계승분쟁을 수습한 거란은 본격적으로 대외 팽창정책을 실행에 옮길 수 있게 되고, 마침내 고려에 침입해 옴으로써 두 나라 사이에는 오랜 전쟁이 시작되었다. 거란은 팽창정책의 일환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濱海女眞과 定安國을 치고 마침내는 압록강변의 요지에 3柵(威寇·振化·來遠)을 세워 여진과 송의 통교를 완전히 봉쇄함으로써 여진문제 해결에 일단락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聖宗 統和 9년(991)경 송이 감행했던 對遼전쟁에서 송을 대패시켰다. 이로써 송·여진 모두로부터 後顧의 염려가 없게 된 거란은 마침내 고려문제에 전념할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거란 성종은 먼저 고려에 대한 탐색작전의 일환으로 厥烈을 고려에 보내어 화의를 요청하였다. 하지만 이에 대해 고려의 반응이 없자 고려원정을 단행하는 쪽으로 정책을 결정하였다. 그러자 성종 12년(993;성종 통화 11) 5월에 고려와 통하고 있던 서북계의 여진은 이러한 거란의 침략계획을 미리 탐지하고 고려조정에 이 사실을 통보하여 왔다.

 하지만 고려조정은 여진의 보고를 듣고도 의심하여 방어책은 세우지 않다가 8월에 거란병의 진격사실을 알려온 여진의 보고를 재차 받고서야 사태가 심각한 것을 깨닫고 시급히 대비책을 세우게 되었다. 이에 성종은 각 지방에 兵馬齊正使를 보내어 군사를 징집하게 한 다음, 10월 侍中 朴良柔를 上軍使로, 內史侍郎 徐熙를 中軍使로, 門下侍郎 崔亮을 下軍使로 임명하여 北界로 나가 거란을 막도록 하고 성종 자신도 서경으로 나갔다가 다시 安北府로 옮겨 정세를 관망하였다.

 한편 거란 성종은 10월에 東京(遼陽)留守 蕭遜寧(이름은 恒德)을 총지휘관으로 삼아 호칭 8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려 침략을 단행하였다. 소손녕이 이끄는 거란군은 蓬山郡을 쳐 고려의 선봉군인 尹庶顔을 사로잡은 뒤에 사신을 통해 글을 보내어 고려 군신의 항복을 요구하였다.608)

 이 때 거란이 고려를 침범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송과 중국내륙을 놓고 결전을 함에 앞서 고려와 송과의 동맹관계를 단절하고, 한걸음 나아가 고려를 거란에 복속시킴으로써 송 정벌에 전념할 수 있는 전기를 맞이하기 위함이었으며, 둘째는 고구려의 계승권을 가진 거란이 고구려의 옛 땅을 모두 장악해야 한다는 명분하에 고려가 개척해 차지하고 있던 압록강 하류 동쪽지역인 평안도 일대의 땅을 장악해서 고려의 도전을 사전에 봉쇄하겠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압록강을 건너온 거란군은 安戎鎭전투에서 고려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게 되자,609) 전략을 바꾸어 싸우지 아니하고 항복을 받는 방법을 택하였다. 이에 앞서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고려조정은 강·온 양론으로 나뉘어졌다. 처음에는 거란의 항복요구에 응하여 서경이북의 땅을 할양하고 절령(岊嶺)으로 경계를 삼자는 割地降服論이 강했으나, 중군사 서희와 前民官御事 李知白의 강력한 반대로 할지론은 봉쇄되었다.

 그 사이 고려측의 답변을 기다리던 거란이 재차 남하하여 안융진을 공격하였으나 中郎將 大道秀의 요격으로 실패하여 남진을 멈추었다. 이에 중군사 서희는 소손녕이 적극적인 군사행동을 취하지 않고 거듭 항복요구만 해오는 태도에서 화해의 가능성을 탐지하고, 안융진 승리를 계기로 和解使로 나아가 소손녕과 담판하겠다고 성종에게 자원하였다. 그리고 그가 협상을 성공리에 마치자 양국은 협정을 맺고 사태는 수습되었다.

 이 협정의 결과 고려는 ① 거란의 正朔을 받들며 ② 고려의 고구려계승권을 거란으로부터 승인받고 ③ 강동 6주, 즉 압록강 동쪽 280리에 있는 興化鎭(義州)·龍州(龍川)·鐵州(鐵山)·通州(宣川)·郭州(郭山)·龜州(龜城) 등을 영유하게 되었다.

 한편 거란은 ① 형식적이나마 고려를 복속시켰으며 ② 고려와 송과의 외교단절에 성공하고 ③ 거란과 송이 결전을 할 경우 배후에서 고려가 기습할 걱정을 덜게 되었다. 따라서 거란은 제1차 침략의 목적 중에서 첫째 목적인 고려의 事大 및 麗·宋同盟의 파괴라는 것에는 성공하였으나, 둘째 목적인 고구려계승의 명분을 빙자한 고구려 옛 영토의 점유에는 실패하였다고 볼 수 있다. 즉 여·요전쟁의 결과로 고려는 실리를 얻었고 거란은 명분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徐·蕭협정 후 고려는 성종 13년(994) 4월에 박양유를 奉表使로 삼아서 거란에 파견하여 거란 연호를 사용한 사실을 알리는 동시에 거란에 끌려간 고려인 포로를 석방해 주기를 요청하였다.610)

 그리고 역대의 숙원이었던 압록강 이동의 고구려 옛땅을 회복할 수 있게 되자, 성종은 서희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강동 6주지방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長興(泰川 동쪽) 및 歸化의 두 진과 곽주와 귀주에 성을 쌓게 하였다. 이후에도 다시 서희로 하여금 여진을 공격하게 해서 安義鎭(安州)·興化鎭(義州 동쪽)과 通州(宣川 동북쪽)·孟州(孟山의 동쪽) 등지에 성을 쌓았다.611) 이렇게 압록강변의 요지에 각각 성을 쌓은 다음 鴨江渡勾當使를 두어 거란의 來遠 城과 마주보며 渡江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이처럼 거란에 대한 서희의 외교적 성공과 민활한 영토개척 노력의 결과로 고려는 중국대륙에 대한 군사·교통의 요지인 압록강 하류유역을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거란의 제1차 침략을 받아 군략상 또는 외교상 자주국가로서 떳떳하게 대항함으로써 강동 6주를 얻게 된 고려는 송을 버리고 거란과 친밀한 외교(사대의 예)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러나 태조 이래로 야만족으로 낮추어 보아 왔던 거란과의 외교관계를 진정으로 바랐던 것은 아니었으므로 성종은 거란에 봉표사를 보낸 두 달 뒤인 6월에 元郁을 송에 밀파하여 전년의 거란의 침범사실을 알리는 동시에 구원병을 청하여 여·송이 단합해서 거란을 공격해 들어갈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송 태종은 송의 대거란전쟁이 소강상태에 있는 데다가 여·요투쟁에 개입하여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 이롭지 않다고 생각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이것은 지난 성종 4년(985;송 태종 雍熙 2) 5월에 송 태종이 장차 거란에 빼앗긴 燕雲 16州를 회수하기 위한 전쟁을 계획하고 韓國華를 고려에 밀파하여 출병할 때 협공을 청했다가 고려의 회피로 무산되었던 것에 대한 부정적 반응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자 성종은 송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는 한편 거란과의 외교관계를 강화해 나갔다.612)

 송의 원병거부 회신을 받은 고려 성종은 李周楨과 이지백을 거란에 파견하여 특산물을 바쳐 양국관계를 돈독하게 하고 소년 10명을 선발하여 거란에 유학시켜 거란의 말과 글을 배우게 하였다. 이 유학은 양국간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기 위한 수단인 것은 말할 것도 없으며 거란에 대한 효율적인 대비수단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성종은 또 趙之遴을 거란에 파견하여 혼인을 통한 유대강화를 제안하니, 거란은 이를 받아들여 당시 거란의 부마이며 동경유수로 있던 蕭恒德의 딸을 고려에 출가시켰다.613)

 성종에 이어 즉위한 목종은 곧 閤門使 王同■을 거란에 파견하여 즉위사실을 알리었고, 한편 거란도 千牛衛大將軍 耶律迪烈을 고려에 파견하여 전왕인 성종의 생일(千秋節)을 축하하였다. 또 그 이듬해 10월에 거란은 우상시 劉績 을 고려에 파견하여 목종에게 상서령을 더하여 책봉하기도 하였다.614) 이후 목종 재위 12년간도 고려와 거란은 활발한 교류는 아니었지만 대체로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고 보여진다.

 徐·蕭협정의 결과, 고려가 비록 거란에 대해 정삭과 예를 취하고 적대적 태도를 삼가했지만, 이것은 북진정책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실리추구를 위한 전략 변화에 불과했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로 고려측은 압록강 동쪽의 280리 고토를 회복하게 되어 영토확장과 서여진 진압 및 고려와 거란 사이의 완충지대를 갖는 실익을 거두게 되었다.

 사실 이 때 고려가 대륙국가에 대해 사대의 예를 취한 것은. 동아시아 전역에서 행해졌던 일반적인 외교방식의 하나로 약소국가가 강대국가에 대하여 적의없는 존경의 표시로 행하던 하나의 외교적 방편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리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는 때로 상대국을 바꾸어 사대의 대상을 삼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에, 고려가 그때까지 오랑캐의 나라로서 대해 오던 거란인에 대해 사대의 예를 취하게 된 것도 그리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615)

 반면 고려가 강동 6주를 차지하게 된 것은 거란과의 투쟁에 있어서 대단히 큰 수확을 거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고려가 강동 6주에 군사적 거점을 구축하여 서북면의 여진을 기미할 수 있게 된 것은 물론, 여진과 거란의 통로를 차단함으로써 대여진 회유와 기미에 유리했을 뿐만 아니라 대거란 방어와 외교를 유리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 당시 특기할 만한 사건은 고려와 거란의 保州(義州) 榷場의 개설인데, 각장은 互市 일종으로서 상호 특산물을 교환·구매하는 장소였다. 고려와 거란간에는 조공무역이 이루어져 朝貢品과 賜與品 형식으로 거래가 된 것은 물론이고 사신의 공적 행위 이외에 사적인 행위와 사신 수행원들의 부대무역이행해졌다.

 이 각장은 여·요간에 밀월외교가 이루어지고 있던 목종 8년(1005)부터 거란이 고려를 재차 침범하던 현종 즉위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각장은 보주 이외에도 振武軍에 설치되었으며 또한 이들 지역은 고려·거란·여진의 세력이 교차되는 곳이기도 하여 매우 번성하였다.616)

608)≪高麗史節要≫권 2, 성종 12년 10월.
609)성종 12년 10월 蕭遜寧은 安戎鎭을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中郎將 大道秀·郎將 庾方 등에 의해 패하였다(위와 같음).
610)≪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13년 4월.
611)≪高麗史≫권 82, 志 36, 兵 2, 城堡 및 권 58, 志 12, 地理 3.
612)≪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13년 6월.
613)≪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14년.
614)≪高麗史≫권 3, 世家 3, 목종 즉위년 11월·12월 임인 및 2년 10월.

≪高麗史節要≫권 2, 성종 16년 11월·12월 및 목종 2년 10월.
615)김상기,<단구와의 항쟁>(≪국사상의 제문제≫2, 국사편찬위원회, 1959), 128쪽.
616)李龍範,≪韓滿交流史硏究≫(同和出版公社, 1989), 241∼243쪽 참조.

≪遼史≫권 14, 本紀 14, 聖宗 統和 23년 2월 병술.

方東仁,≪高麗時代의 北界劃政에 관한 硏究≫(慶熙大 博士學位論文, 1983), 43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