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려 시대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Ⅱ. 대외관계3. 북방민족과의 관계1) 거란 및 여진과의 전쟁(1) 거란의 침입과 그 항쟁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1. 신분제도
          • 1) 신분제도의 형성과 구조
            • (1) 신분과 신분제도
            • (2) 신분구조의 구성
            • (3) 신분계층의 편성 단위와 기준
          • 2) 관인계층
            • (1) 관인층의 특성
            • (2) 음서제와 과거제
            • (3) 공음전과 한인전
            • (4) 문반·무반과 남반
            • (5) 귀족의 계층구성
          • 3) 향리
            • (1) 임무
            • (2) 향역의 세습과 종사
            • (3) 향리의 신분
          • 4) 군인
            • (1) 군역
            • (2) 군역의 세습
            • (3) 군인의 신분
          • 5) 잡류
            • (1) 이직으로서의 잡류
            • (2) 이족으로서의 잡류
          • 6) 양인농민
            • (1) 공과·공역의 부담
            • (2) 생산계층
            • (3) 세업으로서의 농업생산
          • 7) 공장
            • (1) 공장의 유형
            • (2) 공장의 신분
          • 8) 향·소·부곡인
            • (1) 사회·경제적 지위
            • (2) 신분상 지위
            • (3) 신분상 제약의 의미
          • 9) 진척·역민
          • 10) 양수척 (화척·재인)
          • 11) 노비
            • (1) 신분상 특성
            • (2) 사회·경제적 지위
          • 12) 신분제도의 성격
        • 2. 가족제도
          • 1) 가족과 혼인
            • (1) 가족
            • (2) 혼인
          • 2) 재산의 상속
          • 3) 친족조직
            • (1) 성씨와 계보관념
            • (2) 부변·모변과 양측적 계보관계
            • (3) 촌수와「나」를 기준으로 한 친속
            • (4) 양측적 친속의 특성과 기능상태
          • 4) 향촌사회의 친족관계망
            • (1) 생활권과 친족관계망
            • (2) 계급내혼에 의한 구성
        • 3. 사회정책과 사회시설
          • 1) 사회정책
            • (1) 진휼정책
            • (2) 의료정책
          • 2) 사회시설
            • (1) 의창
            • (2) 상평창
            • (3) 제위보
            • (4) 동서대비원
            • (5) 혜민국·기타 기구
            • (6) 지방의 의료기구
            • (7) 민간의 의료사업
        • 4. 형률제도
          • 1) 율령의 내용
            • (1)≪고려사≫형법지에 대한 검토
            • (2) 고려율의 내용
          • 2) 사법제도
            • (1) 고려율의 적용문제
            • (2) 고려물의 형벌체계
            • (3) 고려물의 행형체계
            • (4) 행형의 실태
      • Ⅱ. 대외관계
        • 1. 10∼12세기 동아시아 정세와 고려의 북진정책
          • 1) 10∼12세기 동아시아 정세
            • (1) 당송변혁기 중국의 정치적 동향
            • (2) 북방민족의 흥기와 송의 동향
            • (3) 일본의 정치동향
          • 2) 고려의 북진정책
            • (1) 국초 북진정책과 발해유민 대책
            • (2) 국초 여진문제의 발생
        • 2. 5대 및 송과의 관계
          • 1) 5대와의 관계
            • (1) 태조대의 대중국관계
            • (2) 혜종·정종대의 대중국관계
            • (3) 광종대의 대중국관계
          • 2) 송과의 관계
            • (1) 정치적 관계
            • (2) 문화적 관계
            • (3) 여송 교통로
            • (4) 경제적 관계
        • 3. 북방민족과의 관계
          • 1) 거란 및 여진과의 전쟁
            • (1) 거란의 침입과 그 항쟁
            • (2) 여진정벌과 9성
          • 2) 거란 및 금과의 통교
            • (1) 거란과의 통교
            • (2) 금과의 통교
        • 4. 일본 및 아라비아와의 관계
          • 1) 일본과의 관계
            • (1) 사절의 내왕
            • (2) 표류민의 송환
          • 2) 아라비아 및 남양 여러 나라와의 관계
            • (1) 고려와 아라비아와의 관계
            • (2) 남양 여러 나라와의 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다. 제3차 침입

 거란의 제2차 침입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현안문제로 등장한 것이 고려왕의 친조와 강동 6주의 반환요구였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요구는 실제로 실현하기 어려운 그들의 일방적인 요구였으므로 결국 제3차 침구의 구실이 되었다.

 고려왕의 입조 요구가 고려측의 거부로 실현되지 않자 요의 성종은 강동 6주의 반환을 강력히 요구하며 재침 준비를 서둘렀다. 고려에서는 수차례 사신을 파견하여 평화 유지에 힘쓰는 한편,634) 요의 재침에 대비하여 현종 2년 8월에는 개경의 松嶽城을 증수하고 서경의 皇城도 새로이 쌓았다. 이어서 10월에는 병부상서 庾方을 승진시켜 참지정사 서경유수 겸 서북면행영도병마사로 삼아 서북면 방어의 총책임을 맡겼다. 또 일찍이 정종이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30만의 군사를 뽑아 설치했다가 뒤에 축소·개편되었던 光軍都監을 다시 강화시켜 光軍司로 개편하는 등 제도적 보완작업도 병행하였다.635)

 그러나 현종 3년 6월에 고려에서 파견한 병부시랑 田拱之가 왕이 병으로 인해 친정할 수 없다는 최종 통고를 하자, 요의 성종은 강동 6주를 무력으로 빼앗겠다는 공식성명을 내고 군사행동에 들어갔다. 현종 5년 9월에 요의 성종은 먼저 李松茂를 파견하여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한 다음, 10월에 國舅詳穩 蕭敵烈을 보내어 통주와 흥화진을 공격하였다. 이 때 흥화진 각군 鄭神勇과 별장 周演이 이를 맞아 패퇴시켰는데, 죽인 적들만 100여 명이고 물에빠져 죽은 수효는 더욱 많았다.

 요의 성종은 소적렬 군대의 참패를 계기로 더욱 적극적인 군사작전을 꾀하였다. 현종 6년 정월 거란은 고려 침공을 원활히 하기 위하여 내원성을 중심으로 하여 압록강에 다리를 놓는 동시에 그 다리를 끼고 동서로 성책을 쌓아 거란군의 도강을 준비하였다.636)

 이 작전을 분쇄하기 위하여 고려는 군대를 파견해 파괴하려 하였으나 실패했고 요는 이 군사적 통로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압록강 동쪽 강안에 偉州城을 쌓는 한편 宣化鎭라 定遠鎭 등 의주 근처의 두 진을 뻬앗은 후 성을 쌓아 요새화하였다. 그리고 압록강 서쪽에는 지금의 鳳凰城 지방에 해당되는 開州에 開封府를 설치하고 開遠軍節度를 두었다.637)

 현종 6년 정월에 이 다리를 건너 거란군이 다시 침입하여 興化鎭을 포위하자 將軍 高積餘와 趙弋 등이 격퇴하였고, 이어서 같은 달에 거란군이 다시 통주를 공격해 왔으며, 또 3월에는 龍州를 침범하였으나 별 이득을 얻지 못하고 철군하고 말았다. 이 소적렬의 침입을 제3차 거란침입의 제1회전이라 볼 수 있다.

 같은 해 4월에 거란에서 耶律行平이 또 다시 고려로 들어와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자 고려조정은 결국 그를 붙들어 두고 보내지 않았다. 거란 사신의 억류조처는 고려의 대요강경책과 강력한 투쟁의 의지를 살필 수 있는 사건으로 이후 麗·遼 양국은 전투를 재개하며 서로 상대국 사신을 억류하는 사태로 돌입하였다.638) 그러므로 요가 강동 6주의 필요성을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이것을 쉽게 고려에 양여한 것은 크나큰 실수였다고 하겠다.639)

 요의 성종은 소적렬군이 소득없이 돌아오자 耶律世良·蕭屈烈 등에게 고려침공을 명하였다. 그리하여 현종 6년 9월에 거란은 먼저 이송무를 보내어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는 한편 통주를 공격해 왔다. 고려에서는 흥화진의 대장군 정신용과 별장 주연 등이 군사를 이끌고 거란군의 배후로 나아가 적군을 크게 깨뜨리고 700여 명을 죽였으나 정신용 등 고려장군 6명도 전사하였다.

 거란군이 다시 동으로 향하여 寧州(安州)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가자 대장군 고적여, 장군 蘇忠玄·高延迪 등이 거란군을 추적하여 통주 부근에서 적을 크게 무찔렀으나 이 때 고적여 등 고려의 장수들도 함께 전사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정월의 곽주전투에서는 고려군이 크게 패해 수많은 사상자를 내기도 했으나 결국에는 별 소득없이 거란군은 철병하고 말았다. 이 침입은 제3차 거란 침구의 제2회전에 해당한다 하겠다.

 거란 성종은 철병을 한 뒤에도 계속하여 고려를 침략하는 병력을 동원하는데 광분하였다.≪遼史≫本紀에 의하면 거란 성종은 開泰 4년(1015) 11월에上京(臨潢府)과 中京(大定府) 및 여러 궁위에 명하여 정병 5만 5천 명을 뽑아 고려 정벌에 대비하게 하고, 2년 후 다시 國舅帳詳穩 蕭隗洼에게 명하여 그의 부병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하도록 지시하기도 하였으나640)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그러다가 현종 8년(1017) 5월에 거란 성종은 蕭合卓을 都統으로 임명하여 고려를 침공하게 하였다. 마침내 8월에 소합탁의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너 다시 흥화진을 포위하고 9일간이나 공격을 가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고 도리어 성을 지키던 고려의 장군 堅一·洪光·高義의 공격을 받아 격파되었다. 이렇듯 소합탁군의 침입 역시 참패만 당하고 쫓겨갔는데, 이것이 제3차 거란침구의 제3회전이다.

 해를 거듭하여 고려에 침입하였으나 번번이 소득없이 철병해야 했던 거란성종은 소합탁군대가 물러난 지 1년을 넘긴 현종 9년 10월에 또 다시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여 고려침략을 단행하였다. 당시 거란군의 조직은 東平郡王 蕭排押을 도통으로, 殿前都點檢 蕭屈烈을 副統으로, 東京留守 耶律八哥를都監으로 한 10만의 군대였다.

 고려 역시 거란군의 대병력이 침입해 올 것에 대비하여 현종 9년 초부터 국방에 만전을 기하였다. 먼저 정월에는 흥화진이 여러 차례 거란의 침입을 당하고도 성의 백성들이 일치 단결하여 번번이 적을 물리친 공로에 보답하고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채 면포와 소금과 장을 백성들에게 지급하였다.641)

 고려조정은 거란의 제2차 침구를 교훈삼아 여진족에 대한 적극적인 회유책을 실시하였던 바, 현종 8년 8월에는 동여진의 盖多弗 등이 고려에 내투하여 변경에서 공을 세울 것을 자원하였고, 서여진의 揩信이 거란 동경의 승려道尊을 사로잡아 바치기까지 하였다.642)

 그런데 고려와 거란 사이에서 미묘한 입장에 있었던 여진족은 거란의 제2차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당할 정도로 참패당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거란의 비위를 거슬리면서까지 고려에 대해 화호를 뜻하는 來貢을 시도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현종 5년 이후 7년까지 고려가 번번이 거란군을 격퇴시키자 여진족들은 고려의 국력에 대한 신뢰를 갖게 되었고, 또 수차의 내공을 통해 큰 실리를 얻게 되자 현종 8년 이후부터는 자주 왕래하기 시작하였다.

 여진인의 내공뿐만 아니라 來投者도 속출하였다. 현종 9년 4월에 서여진족의 木史·木開 등의 일족 200여 호가 집단으로 내투하였는데, 이들은 뒷날 귀주싸움에서 고려를 도와 거란군을 격파하였으므로 그 공로로 비단 500여 필을 상으로 받기까지 하였다.643)

 특히 현종 9년은 고려의 대요 강경책으로 조만간 거란의 대대적인 내침이 예견되어 전쟁준비로 긴장감이 고조되었던 해였다. 현종 자신부터도 근신하며 국사에 전념했으며, 5월에는 을묘년(현종 6년;1015) 거란전역 때의 모든 전공자를 진급시키고 전몰자 가족에게는 賻儀를 후하게 내리는 등으로 장병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이어서 9월에는 사형에 처할 죄인이라도 멀리 유배하는 것으로 그치게 하고 그 이하의 죄는 모두 용서하는 대사면을 단행하여 온 국민의 화합을 꾀하는 등의 사기진작의 시책들을 베풀었다.644)

 이러한 상황에서 동서의 여진족들은 다투어 고려에 내공하여 고려가 필요로 하는 마필과 군수물자를 공급하고, 대신에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물자나 고려의 관작을 얻어 갔다. 현종 재위 22년 동안 52회의 여진인 내공사례를 포함하여 총 82건의 내왕사례가 보이는데, 현종 9년 한 해 동안 20여 회의 여진인 내왕이 있는 것을 보면 고려가 얼마나 여진의 내공을 필요로 하였고 또 여진인의 내왕이 전쟁대비에 도움을 주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현종 9년의 내공사례 가운데 進獻 내용이 알려진 것이 東女眞 총 9회, 西女眞 총 8회로 비슷한 횟수인데, 이 때 여진의 특산물을 바친 2회를 제외한15회 모두가 군수품과 관련있는 갑옷·병기·기치·말 등의 품목이었다. 이에 대해 고려측에서는 衣帶·貨物·匹物 등 여진인들이 원하는 물품 이외에 賜爵과 贈職이 행하여졌다. 그런데 이 해에 고려가 행한 사작과 증직은 모두 4회에 불과하고, 그 때에도 하사품이 항상 병행되었던 것을 보면 당시 여진족들은 관작의 명예나 권위보다는 현물을 원하는 경제적 욕구가 지배적이었던 듯하다.

 한편 고려에서는 소배압의 거란군 침입에 대비해 평장사 강감찬을 상원수로, 대장군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군사 20만 8천 명을 동원하여 寧州(安州)에 나가 방어하게 하였다. 강감찬 등은 흥화진으로 나가 精騎 1만 2천을 뽑아 산곡 사이에 매복시키고 큰 줄로써 소가죽을 꿰어 흥화진 동쪽의 큰 내를 막은 후 거란군이 마음 놓고 건너가기를 기다렸다가 물을 터뜨리며 복병을 내어 앞뒤로 공격하여 거란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소배압은 이 전투에서 패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고서도 개경을 공격하러 곧장 동쪽으로 진격해 나오다가 부원수 강민첨의 추격을 받아 慈州(慈山)의 來口山에서 또 한 차례 참패를 당하였다. 이어서 시랑 趙元이 이끄는 고려군은 남하해 온 거란군을 또 다시 馬灘(오늘날 대동강의 美林津)에서 크게 격파하여 1만여 명을 죽였다.645)

 계속되는 참패에도 불구하고 거란병이 줄곧 개경으로 진격해오자 태조의 梓宮(관)을 負兒山의 香林寺로 옮기고 개경을 계엄하였다.646) 현종 10년 정월에 강감찬은 거란의 군사가 개경에 가까이 이르자 병마판관 金宗鉉을 보내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개경으로 들어가 방위토록 하였다. 또 동북면병마사도 군사 3천여 명을 이끌고 개경으로 들어와 방어를 도왔다.

 마침내 정월 3일에 소배압이 거느린 거란군이 개경에서 100여 리 떨어진新恩縣(황해도 新溪)에 이르자, 현종은 淸野戰術을 써서 성밖의 민호를 전부 성안으로 들어오도록 하고 들판의 작물과 가옥을 전부 철거토록 한 후 도성의 방비를 엄히하였다.

 이렇듯 수도 일원의 경비가 굳건한 데다가 거듭되는 패전으로 군사들의 사기마저 떨어지니, 소배압은 더 이상 개경을 공격할 자신이 없어 개경 진격을 단념하고 철군할 계책을 세워야 했다. 소배압의 거란군이 회군하여 連州(价川)와 渭州(寧邊)에 이르자 강감찬은 이를 습격하여 500여 명을 죽였다. 2월 초하루에도 강감찬은 황급히 회군하던 거란군을 귀주의 동쪽 들에서 요격하였다.

 양편의 군사가 서로 버티어 승패가 결정되지 않았을 때에 김종현이 군사를 이끌고 고려군에 가세하고, 또 때마침 비바람이 갑자기 남으로부터 휘몰아와서 깃발이 모두 북쪽으로 향하자 고려군사들이 이러한 형세에 용기백배하여 분발하여 치니 거란군사는 크게 패하여 북으로 달아나기에 바빴다. 고려군사가 퇴주하는 적을 뒤쫓아 쳐서 石川을 건너 盤嶺에 이르니, 엎어져 죽은 시체가 들판을 덮고 사로잡은 군사와 말·낙타·갑옷·투구·병기는 이루다 헤아릴 수도 없었으며 살아서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뿐이었다.

 요의 성종은 이러한 참패의 보고를 듣고는 크게 노하여 사자를 소배압에게 보내어 꾸짖기를, “네가 적을 가벼이 여기고 깊이 들어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면목으로 나를 대하려 하느냐. 나는 너의 낯가죽을 벗긴 다음에 죽일 것이다”라고 하며 크게 분노했다.647)

 이 소배압의 침입은 제3차 거란 침구의 제4회전이라 하겠는데, 고려군의 귀주에서의 대승은 고려인들에게 환희와 감격을 안겨 주었을 뿐만 아니라 향후 여·요관계에 있어 평화 정착의 실마리를 제공해 준 결과가 되었다.

634)≪高麗史≫권 4, 世家 4, 현종 2년 10월 을축·11월 임오.
635)≪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諸司都監各色 光軍司.
636)이 다리는 지금의 중국 九連城으로부터 黔同島를 거쳐 義州에 걸쳤던 것으로 보인다(김상기, 앞의 글, 15쪽 참조).
637)≪遼史≫권 38, 志 8, 地理志 2, 東京道.
638)당시 거란에 억류된 고려사신으로는 陳頔·李禮均·王同■·尹餘·王佐暹 등이 있다(≪高麗史≫권 4, 世家 4, 현종 5년 6월).
639)李丙燾,≪韓國史≫中世篇(震檀學會, 1961), 190∼191쪽.
640)≪遼史≫권 15, 本紀 15, 聖宗 開泰 4년 11월 경신·6년 2월 정축.
641)≪高麗史節要≫권 3, 현종 9년 정월.
642)≪高麗史≫권 4, 世家 4, 현종 8년 8월 을유·임진.
643)≪高麗史≫권 4, 世家 4, 현종 9년 10월 정미.
644)≪高麗史≫권 4, 世家 4, 현종 9년 5월·9월.
645)≪高麗史節要≫권 3, 현종 9년 12월 무술.
646)위와 같음.
647)≪高麗史節要≫권 3, 현종 10년 3월.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