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설치 연혁
국초 이래의 유교이념이 지배체제의 현실적 정치이념으로 정착되어 제도화된 것은 성종 때였다. 李齊賢이 성종의 치세를 평한 내용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성종은 宗廟를 세우고 社稷을 정하였으며 學資를 넉넉히 하여 선비를 기르고 覆試로써 어진이를 구하였으며 수령을 독려하여 백성을 구휼하고 효도와 절의를 권장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하였다…(≪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16년 10월 무오).
성종은 즉위 초부터 교육에 크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즉 박사 任老成이 宋으로부터 와서 大廟堂圖·社稷堂圖와 더불어 文宣王廟圖와 祭器圖 및<七十二賢贊記>를 바친 것이라든지012) 향호의 자제에게 서울에 와서 배움을 익히게 한 것이라든지 전국 12목에 교관을 파견한 것 등은 이를 말해주고 있다. 특히 괄목할 만한 것은 성종 11년의 국자감 관계기사이다.
有司는 勝地를 가려서 널리 書齋와 學舍를 세우고 田庄을 주어 學糧에 충당할 것이며, 또 국자감을 창건하라(≪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성종 11년 12월).
위의 기사는 국자감 창건에 관계되는 최초의 자료라는 점에서 일찍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1980년대 이전에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이 기록을 국자감 설립에 대한 자료로 파악하여 이 때부터 국자감이 설립된 것으로 보아왔다. 그러나 1980년 이래 이에 대한 비판이 나타나고, 그 결과로서 국자감 설립년대를 소급하여 생각하려는 견해가 지금은 거의 통설화되고 있다.013) 위의 기사는 성종 11년에 발표한 교서의 일부분인데, 이 때 발표된 교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王者가 천하를 교화함에는 학교를 세우는 것이 급선무이니, 堯舜의 風敎를 계승하고 周孔의 도를 닦으며 國家憲章의 제도를 마련하고 君臣 상하의 의례를 가려야 하는데 이를 어진 선비에게 맡기지 않고서야 어찌 軌範을 이룰 수 있겠는가…寡人이 미약한 몸으로서 부질없이 왕위에 처하게 됨에 9流의 설을 널리 밝히고 4術街의 문을 널리 열고자 하노라. ①童蒙을 일깨워 학교에 들어가게 하니, 黌中과 稷下에 경서를 가지고 오는 선비가 무리를 이루고, 夏序와 虞庠에 鼓篋의 무리가 저자를 이루었다. ②綸闈를 열어 기예를 겨루고, 會府를 열어 인재를 가리되 省試에 나아가는 사람은 오히려 많아도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은 아직 적다. 이것은 배우고자 하여도 塾堂이 없고 재주가 아직 자세히 다듬어지지 못한 때문이다. ③有司로 하여금 좋은 터를 가려서 널리 學舍를 세우고 田庄을 헤아려 주어 ④이들로 하여금 금을 단련하여 순금이 되게 하고 옥을 갈고 닦아 그릇을 이루도록 하라. 무릇 선비들은 나의 뜻을 잘 알라(≪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11년 12월 병인).
≪고려사≫선거지의 기사는 위에서 살펴본 세가의 교서 중에서 ① ② ④항을 거두절미하고, ③항만을 수록하면서 다만 “또한 국자감을 창설하다”란 기사만을 보충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또한 국자감을 창설하다”라는 기사는 “좋은 터를 가려 널리 학사를 세우라”는 학교 시설의 공간적 확충을 위한 성종의 諭旨에 포괄된 것으로 보아야 하며, 이 때부터 국자감 교육이 시행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이 기록은 撰者가 지방 학교와 중앙의 학교를 분류하는 가운데 최고 학부인 국자감의 비중을 강조하려고 편술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성종 11년(992) 이전에 이미 국자감이 설립되어 있었음은 성종 8년 4월의 다음 기록에서도 명백하다.
大學助敎 宋承演과 南海道 羅州牧의 全輔仁이 사람을 가르침에 게을리하지 아니하므로 마땅히 獎勸하여 뽑아 씀이 옳을 것이니 承演은 가히 9등을 뛰어 國子博士를 제수하고 아울러 緋公服 한 벌을 내려주라(≪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위에서 당시 대학조교 송승연을 大學博士로 승진시키면서 포상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로 볼 때 성종 8년에는 국자감이 운영되고 있었으며, 대학박사·대학조교의 직제도 제도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국자감의 설치 연혁을 어느 때로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관심을 끄는 것은 柳邦憲의 행장에 나타나는 교관직 경력이다.
公은 鄕貢進士로서 乾德 10년(광종 23, 972) 임신 9월 5일에 科首로 합격하여 攻文博士를 제수받았다. 이로부터 光文校書郎을 거쳐 光文郎을 역임하고 國子主簿와 四門博士를 더하였다. 雍熙 4년(성종 6, 987) 정해에 성종이 즉위한 후 처음 儒臣對策을 명하였는데 이 때에 공은 科首로 합격했다. 왕은 이를 보상하여 御事右司員外郎을 제수하였다(<柳邦憲墓誌>,≪朝鮮金石總覽≫上, 265쪽).
그는 성종 6년에 성종의 儒臣對策에 으뜸으로 합격하고 있는데, 이 때에 그의 관직은 四門博士였다. 이로 볼 때 유방헌이 사문박사로서 유신대책에 응시한 성종 6년에는 국자감이 현실적 교육기관으로 운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성종 5년 7월의 교서를 살펴보자.
①朕이 평소에 덕이 부족함을 부끄러워 하나 일찍이 유학을 숭상함이 간절하여 周孔의 풍을 일으키고 唐虞의 다스림을 바라, 庠序에서 이를 기르고 과목으로 이를 취하고자 하였다. ②이제 諸州에서 올려 보낸 學士 중 고향을 그리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되니 모두 편리한 대로 가고 머물게 하라. ③그 歸省을 원하는 학생 207인에게는 배 1,400필을 내려줄 것이요, 머물기를 원하는 자 53인에게는 또한 幞頭 106매와 쌀 265섬을 내려주라. 곧 通事舍人 高榮嵒을 시켜 客省에 나아가 宣諭하고 술과 다과를 베풀어주도록 하였다(≪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성종 5년 7월).
위의 ①에서 이 교서 발표 이전에 학교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②에서는 그 대상이 주로 여러 고을에서 薦貢한 학사였으며, ③에서는 그 수가 고향에 돌아갈 사람 207인과 더 머무르기를 원하는 사람 53인을 합해 260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고려사≫선거지에 의하면 성종이 이 교서를 발표하기 몇 년전부터 모든 주현으로 하여금 자제를 선발하여 서울에 나아가 학업을 익히도록 하였다고 한다.014) 이 연대는 분명하지 않지만, 여러 각도에서 파악할 수 있다. 성종 5년의 교서 중 ①항에서 “…일찍이 …학교에서 이를 기르고…” 한 것으로 보아 그 전 해는 아닐 것이다.
요즈음 여러 州郡縣의 자제를 모집하여 서울에 와서 학업을 익히게 하였더니, 과연 바람을 타고 이르며 詔書에 따라 와 학교 안에는 학도가 자못 많았다. 그런데 집을 떠난 지 오래되어 정이 향수에 깊어졌다(≪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6년 8월).
위의 성종 6년 8월의 교서를 볼 때 성종 초기로 추측이 가능할 것 같다. 그러나 성종 원년(982)은 외관을 파견하기 이전으로 통치체제가 전국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260명의 학생을 서울에 올라오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성종 2년의 외관 파견과 향직 개정 등 집권화정책이 진행되는 시기와 그 연대를 같이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주목되는 것은 성종 5년의 기사에서 귀향을 원하는 사람 207인을 고향으로 돌려 보내면서 동시에 남아 있기를 원하는 53인은 계속 교육을 허락하고 있는 점이다. 특히 이들에게 준 幞頭 106매는 당시 남아 있기를 원한 학생 53인에게 각각 2매씩 해당하는 것이다. 복두란 과거합격자가 紅牌를 받을 때 쓰는 영예의 冠으로, 일찍이 주나라에서는 公卿大夫의 자제인 國子들에게 착용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로 볼 때 당시 개경에 남아있던 53인에게 복두를 하사하여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이들을 국자로 예우하여 교육을 시켰다고 볼 수 있겠다. 이 항목 앞부분에서 이미 지적했던 유방헌의 교관 역임이 성종 5년을 전후한 시기와 연결되는 것도 이러한 배경 아래서 생각할 때 많은 시사를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