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조선 시대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Ⅰ. 학문의 발전1. 성리학의 보급1) 성리학의 역할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1. 성리학의 보급
          • 1) 성리학의 역할
            • (1) 사회개혁 사상
            • (2) 왕권과 양반사대부와의 균형
          • 2) 5례·4례의 정비
            • (1) 5례의 정비
            • (2) 4례의 장려
          • 3) 문묘제도의 정비
            • (1) 학교와 존현의 중시
            • (2) 4배향제의 확립
            • (3) 권근 문묘종사 논의
            • (4) 도학적 문묘의례의 확대
          • 4) 대표적인 성리학자들
            • (1) 정도전(1337∼1398)
            • (2) 권근(1352∼1409)
            • (3) 김시습(1435∼1493)
            • (4) 남효온(1453∼1492)
            • (5) 김굉필(1454∼1504)
            • (6) 정여창(1450∼1504)
        • 2. 훈민정음의 창제
          • 1)≪훈민정음≫(해례본)
          • 2) 훈민정음의 창제
            • (1) 창제의 시기
            • (2) 창제자
            • (3) 창제의 동기
            • (4) 제자의 원리
            • (5) 제자의 이론적 기초
            • (6) 합자법과 용자법
          • 3) 훈민정음의 반포
          • 4) 기원설들의 검토
          • 5) 훈민정음 창제의 의의
            • (1) 민족문화의 창조
            • (2) 훈민정음과 우리 민족의 문자생활
            • (3) 세계 문자사에서 본 훈민정음
          • 6) 훈민정음과 관련된 사업들
            • (1) 언문청과 정음청
            • (2) 서적의 간행
            • (3) 간경도감의 불경언해
        • 3. 역사학
          • 1) 민족사의 체계화와 전대사의 정리
            • (1) 전대사의 체계화
            • (2) 고려시대사의 정리
            • (3) 전대사의 체계적 정리
          • 2) 춘추관과 당대사의 편찬
            • (1)≪용비어천가≫와 조선건국사 정리
            • (2) 춘추관과 사관
            • (3) 실록의 편찬과 보관
          • 3) 역사학과 역사사상의 성격
        • 4. 지리지의 편찬과 지도의 제작
          • 1) 지리지의 편찬
            • (1)≪경상도지리지≫의 편찬
            • (2)≪세종실록지리지≫의 편찬
            • (3)≪경상도속찬지리지≫이 편찬
            • (4)≪동국여지승람≫의 편찬
          • 2) 국내지도의 제작
            • (1) 조선 초기에 제작된 지도
            • (2) 동람도의 제작
            • (3) 조선방역도
          • 3) 세계지도의 제작
            • (1) 조선 전기의 세계지도
            • (2)≪해동제국기≫의 일본 및 유구국지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1. 국가제사
          • 1) 종묘와 사직
          • 2) 자연신
            • (1) 원구제
            • (2) 자연신
          • 3) 문묘
          • 4) 역대시조
        • 2. 불교
          • 1) 억불정책과 교단의 존폐
            • (1) 억불정책의 전개
            • (2) 양종과 승과의 폐지
          • 2) 도첩제와 부역승
            • (1) 도첩제의 강화와 폐지
            • (2) 승려의 부역과 그 신분 하락
          • 3) 왕실의 불교숭신과 불교행사
            • (1) 숭불의 왕과 그 불사
            • (2) 척불정책 하에서의 왕실불사
          • 4) 민간의 불교신앙
            • (1) 관음신앙
            • (2) 미타신앙
            • (3) 불탄일 연등과 수륙재
          • 5) 사찰재산과 승려의 경제활동
            • (1) 사찰재산
            • (2) 승려들의 경제활동
          • 6) 당시의 고승들
            • (1) 자초와 기화
            • (2) 세종대의 명승들
            • (3) 세조대의 고승들
        • 3. 도교
          • 1) 소격서 중심의 과의적 도교
          • 2) 수련적 도교의 발전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Ⅰ. 학문의 발전

1. 성리학의 보급

1) 성리학의 역할

(1) 사회개혁 사상

 고려말의 시대적 모순의 격화를 극복해야 하는 과정에서 국제사회와 국내적 여건에 기초하여 성장해온 신세력은 宋·元代에 사회개혁 사상으로 일정한 역할을 하여온 性理學을 접하였으며, 이것을 우리 역사에서 적절한 신개혁의 지표로 선정할 만한 이념으로 생각하였다. 이것은 사상적으로 우리에게 접목될 수 있는 단계였다는 점과 사회적으로 자생한 소위 學人層(中小地主)이라는 새로운 사회세력의 성장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삼국시대 이래 우리 나라에서는 漢·唐儒學이 소개되어 지식인들은 유교경전을 읽고 연구하면서 우리의 역사와 중국의 역사를 유교이념에 따라 정리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물론 정서적인 면에서 자신의 감정을 읊조리기도 하면서 유교문화적 특성을 지닌 우리 자신의 문학을 갖기도 하였다. 그것은 삼국시대부터 가져온 우리의 유학으로, 전부 한·당 수준의 經學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철학의 기초가 한·당류의 경학에 기초하였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고려사회에서도 꾸준하게 유학을 연구하고 이것을 정치에 연결시키면서 자신들의 역사 창조에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왕실중심의 문화이며 정치이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고려사회의 말기적 현상이 심화되었을 때 왕실중심의 유학이념은 비판받아야 했다. 그러한 비판의 구조와 합리적 내용을 갖춘 것으로 송·원대에 이룩한 유학이 성리학이었다. 따라서 성리학은 고려사회를 비판적으로 보려는 일련의 지식인들에게 폭발적인 관심과 수요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서 성리학의 내적 논리와 내용을 잠시 검토하면서 고려 말기 지성들에게 그렇게 수용될 수밖에 없었던 요소가 무엇인지, 그리고 고려사회의 모순을 어느 정도 해결할 여지가 그 자체 속에 있었는지를 검토하겠다.

 성리학은 한·당대의 경학에서 충분히 연구된 유교경전을 토대로 하여 자연관·우주관·세계관을 새롭게 형성하였다. 그것은 新人生觀·新政治秩序의 논리를 창출한 것으로 새로운 학인층을 토대로 하여 사회로부터 요구되는 정치론이며, 윤리이자 도덕률의 체계였다. 성리학은 고전적인 孔孟의 王道論에 의한 유교정치가 아니라 국가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에게 명분을 주는 보편적 사고력의 신질서를 구체화한 것으로, 신질서 이론을 정립하기 위하여 보다 보편적인 세계관·국가관·인생관을 수립하려고 궁구하였다.

 성리학은 程朱學이라고 불리었던 것처럼 程子 이래 朱子에 와서 그 학문적 체계가 완성되었다. 우주만물은 모두 理와 氣의 결합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성리학의 우주론은 자연에서부터 인간에 이르는, 즉 物性에서 人性의 범주까지 적용되는 보편적 논리로서의 이와 기는 각기 소이와 차별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도덕성과 규범성으로 설명되는 부분이 있으며, 특히 인간사회 내에서 차별성과 규범성을 갖도록 한 논리를 세우고 있다. 즉 聖·愚·賢·不肖, 지배와 피지배 등의 사회적 차별성을 보편적 논리로 설명하면서 그것은 누구에게나 다 적용되어 수용되어야 하는 학적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엄청난 자연의 힘에는 물론이고 최고의 지배자인 왕에게도 적용되는 규범인 것이다.

 왕은 물론 사대부·평민 모두가 지켜야 할 규범으로 세워지는 성리철학 안에서의 규범적 내용은 얼핏 피지배층에게만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내용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중간지배층인 지식인들이 자신의 사회적·정치적 지위를 확보하려는, 즉 왕권에 제약을 가하기 위한 매우 신중한 학적 체계에서 나온 고도화된 논리라고 하겠다.

 주자는 명분론으로 쉽게 이어지는 君臣·父子·夫婦·主奴·君子와 小人·華夷 등의 상하관계와 수평적 질서론을 전개하면서, 이보다 앞서 君君·臣臣 등 자신의 역할과 도덕적 책임론을 강조·주장하였다. 그것은 지식인이자 중소지주층의 대변자라 할 사대부들이 지금까지 절대 왕권에 대해 학문적 체계를 이용해 정치적으로 견제한 것이었으므로, 知的으로 역사의 발전적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王道論에 입각한 왕권의 권위에 대항하였을 뿐 아니라 소위 학적 道統論에 의한 지식인 중심의 治道論으로 정치적 정통론에 대응하였다고 하겠다.

 학문적으로 주자학의 기본적인 성격의 전환은 5經 중심의 유학에서 4書 중심의 유학으로 변화하였고, 孔子·孟子의 義理論을 기초로 하여 합리적인 정치학 논리를 구성하였으며, 나아가서 사대부들이 스스로 추구할 학문의 대상과 방법론의 체계를 세웠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성리학이 갖는 정치와 역사 속에서의 기능을 제외하고도 학문자체의 추구와 자기 생산의 과정을 소위「格物致知」라는 논리를 세워가면서 학인들이 스스로 자기 중심의 학문 논리를 세웠고, 사회·정치적으로 왕으로부터 독립하는 틀을 세웠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성리학의 정치론은 왕, 즉 황제만이 아니라 사대부나 서민도 참여하는 범사회적 질서론 속에서 ‘爲王制的’ 요소와 사대부와 서민의 존재를 강조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체계의 치도론의 세계였다. 그것은 공간적으로 중국의 천하에서 보다 확대된 세계적 공간을 요구하였으며, 이에 따라 조선사회와 연계될 수 있는 범사회적 天下觀이 성립되고 있었다.

 새로운 국제관행을 수립할 수밖에 없는 천하질서 속에서 사대부 관료들은 나름대로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나아가서 중국의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적 질서론 속에서 자신들의 문화적 위상과 정치적 위상을 설정할 수 있는 논리로 성리학을 주목하게 되었다. 확대된 세계관과 왕실을 정점으로 하는 수직적 사회관 위에서 성립된 사대부 관료들의 정치적 구상은 그들의 중추적 역할을 극대화하는 정치제도와 운영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성리학이 갖는 정치적 논리였다.

 성리학에서 확대된 세계관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취하는 것으로, 그 세계관은 사대부 학인들에게 學的 연구의 대상이 되는 것이었다. 즉 자연과 인간의 현상은 보편적 논리로 구명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그것은 理·氣로서 설명되고, 보편과 특수, 일반과 개별, 관념(정신)과 물질, 관념과 현상이라는 이원적 논리를 가지고 설명되었다. 물론 그것은 대상으로서의 차이성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理」로써 강조되고 지켜져야 할 도리의 내용도 있었다. 그것이 갖는 궁극적 내용은 자연과 인간세계에서의 질서와 조화를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항상 이러한 점을 확인시켜주는 학인으로서의 성실한 노력과 임무를 통하여 사대부의 역할을 강조한 점은 매우 유의해야 할 대목인 것이다. 관념적 지적과 발견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실천의 대목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의무로 구체화하였다. 사회적 실천의 몫을 그들 자신도 사대부의 역할로 자임하였다. 여기에서 성리학이 갖는 사회개혁사상의 적극적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왕도론 중심의 정치적 개혁과 혁명론이 아니라, 기층사회를 운영·감독하고 서민과 함께 생활하는 사대부들의 생활 속에서 사회개혁과 도덕적 기준을 찾았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것은 소위 지주제 경영으로 구성된 宋代의 사회경제적 여건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性理大全≫의 치도론에서 宗法의 의미를 강조한 내용을 보면 家廟制를 중심으로 하는 가족관리와 협동생활에서의 질서와 안정을 강조하고 있다.≪朱子家禮≫의 勵行을 기본으로 하여 종법에서의 宗子에 대한 권위를 세우고 조상숭배와 가족간의 친목과 협력을 통하여 사회기층의 안정을 유도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황실이나 귀족·제후 계층의 정치적 위상을 지키려는 정치적 이론인 종법을, 성리학의 단계에서는 가례를 통하여 사대부 학인층까지 그 적용대상을 확대하면서 그들의 사회적 위상정립에 새로운 명분논리로 수용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종법의 논리와 孝의 일반 논리를 조화시키면서 가묘제를 통하여 종법을 발현하게 된 것이다.

 가묘를 갖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재정적 기초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가묘운영과 함께 가족의 생활 운영에서 최소한의 경제력이 필수적이었는데, 가묘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의례를 운영하는 데 이에 상응하는 경제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가족 구성원들의 모임에는 의식에 필요한 경비와 음식 마련에 드는 최소한의 경제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가묘제에서 연상되는 소극적 개념에서 성리학이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장한 것은 확대된 社倉制에 의한 민생론이었다.001)

 사창은 鄕約과 더불어 주자 향촌정책의 2대 기틀이었다. 사창은 주자가≪周官≫의 旅師遺人의 제도에서 시사를 받아 고안·시험한 바 있는 일종의 자치적 향촌 賑貸制로서, 국가(또는 개인)로부터 元本을 빌어서 一石마다 三釐의 이식을 붙여 향촌 빈민에게 대여하며, 息穀의 액수가 원본의 10배에 달했을 때 국가의 원본을 상환하고, 그 다음부터는 耗米로서 1石당 3升의 낮은 이자로 대여하는 제도이다. 사창은 중국 주자학의 논리 안에서 전개되었으며, 주자학의 수용 단계에서 조선의 주자학자들은 이에 관심을 가졌다.

 사창은 국가중심의 常平·義倉과는 달리 지방자치의 성격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집권적 정치성향과 지방분권적 자치를 지향하는 소위 사대부들의 사회개혁 이념과 그 실천성은 조선 초기에 많은 갈등을 제기하고 있었다. 조선 초기에 사창제가 성공했는지 여부를 떠나서 성리학자들이 이를 염두에 두어 논의하고 정치적 갈등을 겪었다는 사실은 성리학의 사회안정을 위한 모델을 이의없이 거론하고 있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사창제 운영은 지주제 운영을 전제로 하고 있다. 주자는 지주제 운영을 주장했는데, 그의 경제사상은 고전적 井田制에서 출발한 均田制를 바탕으로 公田制에 기초하여 국가와 자작농을 중심으로 국부를 달성하려는 경제사상(鄭道傳類)과는 상충되는 것이었다.

 여기에 왕실 중심의 국가체제를 유지하고 학인 사대부층의 정치참여와 사회질서 유지를 통해 자신들의 위상을 확립하려고 한 여말선초의 유자·관료들의 성리학 논리의 수용을 고려 말기 사회상을 토대로 하여 검토할 필요가 있다.

 잘 알다시피 고려말의 전제는 개혁과 개정이 요구되었다. 국가재정 부문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농민층의 생활고 심화로 인한 기층사회의 불안은 이 시기 국가 재정을 비롯한 경제문제의 해결은 물론 농민층의 안정과 연결되는 매우 민감한 정치문제였다. 이에 고려왕실을 보강하면서 기층민의 안정을 구상하자는 정치세력과, 고려왕실과 연계된 구세력층의 존재가 모든 경제문제의 원인이라고 파악하고 이를 혁파하여 보다 혁신적인 개혁방법으로 이를 교정하려는 정치세력과의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후자의 개혁론이 우세하여 고려왕실은 무너지고, 고려의 전제에 대해 전면적인 개혁조치가 단행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 이래 구세력이 근거하고 있던 전제와 토지운영 방식을 대신하여 신세력을 대표하는 신흥사대부의 구상에 맞는 전제와 토지 운영방식을 바로 시행할 수는 없었다. 즉 지주제 형식과 그들의 축이 되는 사회운영의 경제원칙이 신정부에 의해 채택되기에는 시기상으로 아직 일렀다. 구세력, 즉 고려 왕실과 연계가 있는 권세가들의 이익이 보장되는 경제구조에는 경제이론면과 정치이론면에서 성리학의 논리보다는 漢·唐 洙泗學類의 정치론·경제론의 원칙이 적용되고 있었다. 즉 공전-균전론에 의한 자작농 육성이 국가재정과 기층농민을 보호한다는 정도전 등의 경제론이 그것이다.002)

 이와 같은 사회경제적 주장은 禮論에서도 소위 五禮的 논리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질서론을 구성하였다. 여말선초에 가묘제에 대한 논의가 자주 있었으나 그 논리가 실행되기에는 아직 여건이 미숙한 단계였다. 唐代에 완성된 고전적 유학의 정치질서론이 아직은 여말선초의 유학에서 유지된 학문적 성향이었다. 그것은 왕실을 구심점으로 하는 국가질서론이고 왕실을 돕는 귀족세가적 성격의 훈구적 관료로 표현되는 것이었다.

 고려말 전제개혁을 주장한 趙浚·李行·黃順常·趙仁沃·許應 등은 전국 각지에서 성장하던 학인층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들 사대부층의 성장이 점차 성리학의 학문적 연구와 성리학이 토대로 하는 경제적 구조의 변화를 수용하는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주목하고자 한다. 그와 같은 현상은 고려말 사대부층이 소위 중소지주층으로 사회기층을 통활하고, 농업경영에서「並作半收」의 관행이 등장한 것 등으로도 반증되는 것이다.

 그러나 고려사회가 안고 있었던「병작반수」의 관행은 결국 수조권을 기저로 하는 科田法을 점차적으로 소멸시키면서 지주전호제를 일반화시키는 현상을 초래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성리학의 수용을 촉진시키는 경제원칙이 되기도 하였다. 이에 지방의 중소지주들도 학문적으로 성리학을 선호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말선초에 유학자들이 주장한 사회개혁 방안은 집권적 왕실의 정치구성과 경제구성으로 그 외피가 표출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내면에서 진행된 경제현실과 사회지도층이라 할 지주 사대부층의 학문적 활동과 정치적 지향은 성리학이 갖는 관념적 이상론의 질서를 내용으로 하는 논리로써, 사회경제적으로는 지주제와 사대부의 위상을 높이려는 논리였다. 이같은 학문적 성향은 점차 사회·경제적 토대와 정치력을 확대하였으며, 그것은 한국 유학의 내적 변화와 궤를 같이하였다.

 사회·경제적 여건의 성숙과 함께 중국으로부터 수용된 신유학의 내용은 사회·경제적 상황을 더욱 상승작용케 하는 촉매였다. 이것은 三綱五倫,≪小學≫을 공부하고 이를 실천하려는 사회적 관행으로 강화되고 있었다는 사실로도 입증된다. 소위 주자의≪소학≫은 주자학의 입문서, 또는 기본서로서 유학교육의 필수과정이었고, 조선사회의 교화서로서 가장 널리 보급되면서 주자학의 역사와 그 운명을 같이하였다. 그것은 도덕적으로 군자가 갖추어야 할 교양내용으로 지주와 사대부의 위상을 복합적으로 무장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003)

 주자≪소학≫의 사회교화면을 살펴보면,≪소학≫의 敎人 내용은 일상생활의 규범이다.≪소학≫은 수신의 대법이 갖추어져 있어서, 지배·피지배층을 막론하고≪大學≫을 배우기 전에 반드시≪소학≫을 배워야 했다. 그것은 善俗의 사회가 되기 위한 인륜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에서≪소학≫은 고려말에 소개되기 시작했지만, 서울과 지방의 학교에서 필수과목이 된 것은 權近의≪勸學事目≫에서이다. 주자가 주석한 4서가 성리학의 주경전이라면,≪소학≫은 그보다 먼저 배워야 할 과정인 셈이다. 따라서≪소학≫은 지배자에서 서민의 자제까지 모두가 배워야 함은 물론이고, 成均館 입학시험인 生員進士科에서는 필수과목으로, 武科에서는 선택과목으로 법제화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소학≫이 보다 실천적인 교과서가 된 것은 조선왕조의 성리학 수용이 심화되면서부터였다.≪소학≫에 대한 이해의 심도가 커진 것도 바로 성리학이 지향하는 사회질서로의 변화를 입증하는 것이다. 물론≪소학≫이 조선 후기에도 정부가 기대하는 만큼 그 효과가 사회·정치적으로 있었는가는 매우 의심스럽다. 하지만 성리학이 성숙되는 16세기 경에는 이른바≪소학≫의 대가이며 道學者라 할 수 있는 金宏弼 등 山林學者들이 대두되었고,≪소학≫의 문제가 趙光祖와 같은 도학정치가들의 사회개혁·정치개혁 등의 매우 실천적인 요소와 연계되면서 조선사회에서 사회규범과 질서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의 구체적인 사회규범 내용은 소위 3강5륜으로, 인륜의 실천덕목을 구체적으로 표시하였다.

 인륜의 교화를 통해서 현실의 문제에 접근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것이 성리학의 역사적 성격이었다. 여기서 그 실천의 주역은 역시 학인층이자 관료신분층이 될 수 있는 사대부층임을 주목해야 한다. 즉 학인사대부는 조선사회 내에서 양반사대부층이기 때문이다. 양반사대부들은 경제적으로는 지주층으로, 정치적으로는 관료지배신분을 장악하면서 도덕적으로도 자신들의 입지를 정립하고 있었다.

 양반사대부들은 3강5륜의 내용을 통하여 자신들의 역사적 여건을 강화하였다. 3강은 父子·君臣·夫婦 관계를, 5륜은 부자·군신·부부·長幼·朋友의 관계를 규제하는 신분윤리로, 상하·존비·귀천의 차별과 명분의 신분계층제도를 유도하였다. 그것은 혈연의식과 가족의식으로 사회신분계층의 기틀이 되었다. 즉 가족으로 출발해서 사회와 국가로 연장되는 전체 사회질서론의 논리구조에서 상대적으로 나타나는 인간관계를 설정한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도덕의 실천성 때문에 조선왕조의 성리학자들에게는 많은 논란과 비판이 있었음도 유의할 사항이다. 그것은 전통적 생활 습속과의 차이와 거리감에서 오는 괴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사대부 학인들의 연구과제였고, 또 역사적 모순에 대하여 성리학의 도덕적 사회규범에서 해답을 추구하여 얻으려는 노력이 이들의 학문적 과제였다고 하겠다. 예컨대 주자학의 사회논리는 부계중심의 가부장적 논리이나, 고려 이래 우리 전통사회의 논리는 오히려 부·모·자·녀 관계에서 모계·처계의 비중이 컸다. 이에 이러한 문제 등이 대응하고, 이를 조절하려는 사대부 학인들의 학문적 노력이 요구되었다.

001)≪性理大全≫권 66, 治道 賑恤.
002) 韓永愚,≪鄭道傳思想硏究≫(서울大 出版部, 1973).
003) 金駿錫,<朝鮮前期의 社會思想-小學의 社會的 機能分析을 中心으로->(≪東方學志≫29, 1981).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