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조선 시대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1. 사림의 득세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1. 사림의 득세
          • 1) 명종대의 정세
          • 2) 척신세력의 약화
          • 3) 사림의 득세
        • 2. 붕당의 출현
          • 1) 선조초의 정계구성과 구체제의 청산
          • 2) 사림의 분열과 붕당의 출현
        • 3. 붕당의 성격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1. 붕당정치의 성립
          • 1) 대북정권의 몰락
          • 2) 인조반정 이후의 공존체제
          • 3) 공신계와 비공신계의 갈등
          • 4) 붕당정치의 의의
        • 2. 붕당정치의 전개
          • 1) 효종∼현종대의 정치상황
          • 2) 제1차 예송
            • (1) 제1차 예송의 배경
            • (2) 예송의 발단
            • (3) 예송의 전개
            • (4) 예론의 정치분쟁화
          • 3) 제2차 예송과 남인정권의 등장
            • (1) 제2차 예송의 배경
            • (2) 제2차 예송의 발단과 전개
            • (3) 제2차 예송 후의 정국 변동
            • (4) 제2차 예송의 성격
        • 3. 붕당정치의 운영형태
          • 1) 붕당정치의 전개와 붕당론
            • (1) 붕당 성립기의 붕당론
            • (2) 붕당정치의 전개와 붕당론
          • 2) 비변사 중심의 공존체제
          • 3) 삼사 언론의 활성화
          • 4) 서원의 정치적 기능
        • 4. 붕당정치의 동요와 환국의 빈발
          • 1) 환국의 개념과 범주 및 연구 시각
            • (1) 환국의 개념
            • (2) 환국의 범주
            • (3) 환국을 보는 기본 시각
          • 2) 환국의 실상
            • (1) 갑인환국
            • (2) 경신환국
            • (3) 기사환국
            • (4) 갑술환국
            • (5) 경인환국
            • (6) 병신환국
            • (7) 신임환국
            • (8) 을사환국
            • (9) 정미환국
          • 3) 환국의 정치사적 의의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1. 비변사의 강화
          • 1) 설립 배경과 혁파 과정
          • 2) 조직 정비와 직무 확대
          • 3) 시기별 성격과 기능강화
          • 4) 정치적 기능과 위상
        • 2. 언관권·낭관권의 형성과 권력구조의 변화
          • 1) 언관권·낭관권의 형성
            • (1) 언관권의 형성
            • (2) 낭관권의 형성
          • 2) 권력구조의 변화와 사화 및 붕당
            • (1) 사화의 발생
            • (2) 붕당의 형성
          • 3) 붕당정치하의 언론권과 낭관권
        • 3. 천거제의 시행과 관료 충원방식의 변화
          • 1) 천거제의 실시와 사림세력의 확대
          • 2) 붕당정치기의 천거제와 산림
        • 4. 공론정치의 형성과 정치 참여층의 확대
          • 1) 공론 수용기구의 정비
          • 2) 공론 형성층의 확대
          • 3) 공론정치의 활성화
        • 5. 중앙 군영제도의 발달
          • 1) 수도 방위 군영
            • (1) 훈련도감
            • (2) 어영청
            • (3) 금위영
            • (4) 3군문의 왕권 수호와 수도 방위
          • 2) 수도 외곽 방어 군영
            • (1) 총융청
            • (2) 수어청
          • 3) 왕권 수호의 금위군영
            • (1) 호위청
            • (2) 용호영
          • 4) 붕당정치와 군권
            • (1) 붕당정치 과도기와 군권
            • (2) 붕당정치 발전기의 군권
            • (3) 탕평론과 군권
        • 6. 지방 군제의 개편
          • 1) 속오군의 편성
          • 2) 영장제의 실시
          • 3) 관방의 강화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1. 장기적인 자연재해와 전란의 피해
          • 1) 소빙기(약 1500∼1750년) 자연재해 연구 현황
          • 2) 16∼18세기초 장기적인 자연재해의 실상
          • 3) 자연재해와 전란의 피해
            • (1) 자연재해의 피해
            • (2) 전란의 피해
        • 2. 상평창·진휼청의 설치 운영과 구휼문제
          • 1) 임진왜란 이전의 상평창제 시행과 진휼청 운영
          • 2) 임진왜란 이전의 구황정의 실태
          • 3) 임진왜란 이후 진휼청 제도의 변천
        • 3. 인구의 감소
          • 1) 조선시대 인구 추정
            • (1) 호구 총수의 조사 결과를 존중한 추정
            • (2) 인구학적 연구방법에 의한 연구결과
            • (3) 역사인구학적 연구방법에 의한 연구결과
            • (4) 농업경제사적 연구의 결과
          • 2) 소빙기 자연재해와 인구 동향
        • 4. 요역제의 붕괴와 모립제의 대두
          • 1) 요역제 변동의 추이와 대동법의 성립
          • 2) 대동법 이후의 요역제 운영
          • 3) 잡역세의 수취
          • 4) 모립제의 성립
        • 5. 진전의 개간과 양전사업
          • 1) 개간사업
            • (1) 정부의 개간정책
            • (2) 개간의 주체
            • (3) 개간과 절수·입안제도
            • (4) 개간지의 소유 문제
          • 2) 양전사업
            • (1) 양전의 목적과 시행과정
            • (2) 양전사업의 성과와 문제점
        • 6. 영농기술의 발달과 농촌경제의 변화
          • 1) 영농기술의 발달
          • 2) 농촌경제의 변화
        • 7. 지주제의 발달과 궁방전·둔전의 확대
          • 1) 지주제의 새로운 전개
          • 2) 내수사전과 궁방전의 확대
            • (1) 형성과정
            • (2) 궁방전의 실태
            • (3) 궁방전의 소유구조와 경영형태
          • 3) 둔전의 확대
            • (1) 둔전의 형성과정
            • (2) 둔전의 실태
            • (3) 둔전의 경영형태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1. 대동법의 시행
          • 1) 공납제의 변통과 대동법의 실시
            • (1) 사대동의 발생
            • (2) 대공수미법의 시행
            • (3) 대동법의 제정·시행
            • (4) 상정법의 병행
          • 2) 대동법의 내용
            • (1) 대동세의 부과·징수
            • (2) 대동세의 지용
            • (3) 선혜청의 조직과 구성
          • 3) 대동법의 실시 결과와 의의
        • 2. 상업·수공업·광업의 변모
          • 1) 상공업 발달의 사회경제적 배경
          • 2) 시전의 변화
            • (1) 시전의 분화와 분쟁
            • (2) 난전의 대두와 금난전권의 성립
            • (3) 금난전권의 강화와 상권경쟁
          • 3) 공인과 공계
            • (1) 공납제의 개혁과 공인의 등장
            • (2) 공계의 구성과 조직
            • (3) 공인의 공물상납
          • 4) 장시의 발달
            • (1) 장시의 형성과 확산
            • (2) 장시에서의 상품유통의 확대
            • (3) 장시의 시장권 형성과 상설시장화
        • 3. 군수공업의 성장과 군수광업의 발전
          • 1) 군문·영문에 의한 군수공업의 성장
            • (1) 임란 중 도감제와 도회제하의 군수광공업 실태
            • (2) 각읍월과총약환법의 제정
            • (3) 군문·영문의 무기제조와 월과총약환의 방납
          • 2) 군수광업의 발전과 광산의 경영형태
            • (1) 군수광산의 개발
            • (2) 점소의 운영재원
            • (3) 감관·공장·모군의 성격
            • (4) 점소의 작업실태
        • 4. 금속화폐제도의 시행
          • 1) 금속화폐 시행론
          • 2) 금속화폐의 논의와 주조
            • (1) 인조대의 주전론과 동전 주조
            • (2) 효종대의 화폐 논의와 동전 주조
          • 3) 화폐정책의 난맥과 폐단
            • (1) 숙종대의 동전 유통과 폐단
            • (2) 주전 원료의 부족과 사주전
        • 5. 중개무역의 성행
          • 1) 임진왜란의 발발과 조명무역
            • (1) 중강개시를 통한 조명무역
            • (2) 임진왜란 시기 중국 상인들의 조선 진출
          • 2) 임진왜란의 종식과 중개무역의 재개
            • (1) 기유약조의 체결과 조일교역의 재개
            • (2) 기유약조에 따른 조일무역의 내용
          • 3) 17세기 중·후반 중개무역의 성행과 그 영향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1. 사림의 득세

1) 명종대의 정세

 明宗代의 정국은 이른바 士禍期에서 붕당정치기로 넘어가는 과도기로, 초기의 乙巳士禍를 계기로 확립되는 戚臣 지배체제를 시작으로 해서, 말기에는 향촌에서 착실하게 재지적 기반을 다져온 사림세력이 점차 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해 가는 시기였다.

 己卯士禍 후 중앙 정계에서 크게 실세한 사림파는 중종말 金安老의 실각 후 그 일부가 재등용되기 시작하였으며 인종 즉위 후에는 좀더 나은 정치적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중앙 정부의 구성에 있어 사림파의 비중이 좀더 커진 것이 그러한 변화 중의 하나였다. 이 시기에 오면 의정부·육조에 李彦迪·權橃을 비롯해서 申光漢·柳仁淑·尹漑 등이 진출해 있었고, 대간에서도 閔齊仁·李瀣·宋麟壽·具壽聃 등이 대사헌·대사간으로 재직하였고, 신진세력인 郭珣·朴光佑 등이 그 밑을 받치면서 공론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림계 인물의 진출에는 己卯人 일부도 포함되어 재등용 되고 있었는데, 이는 이후 趙光祖를 비롯한 사림파의 복권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게 만든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호전된 분위기 속에서 사림계의 대간 박광우·곽순 등에 의한 조광조의 복직 상소가 있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인종이 “가볍게 의논할 수 없는 重難한 것”이라 하여 단안을 내리지 못하다가 죽음이 임박한 시기에 大赦 과정에서 급변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 조광조 등 기묘인의 복직과 현량과의 복과 및 급제자의 등용이 성취되었다. 이는 이 시기 사림파의 성장과 무관하지 않다.0001)

 그러나 명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상황은 급변하여 외척의 영향력이 크게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대표적인 외척은 章敬王后 소생의 인종을 지지했던 尹任을 중심한 大尹과 文定王后 소생의 慶原大君을 지지하는 尹元老·尹元衡 형제를 중심한 小尹이었다. 이 양자간의 갈등은 金安老 집권기부터 있어 왔으며 중종 말기에는 經筵석상에서 논의될 정도로 표면화되었다. 이에 중종은 대윤에 비중을 두면서 양 세력을 조정하려 하였지만 성과를 보기도 전에 사망하였고 이후 이러한 대립은 인종의 즉위로 대윤이 정치적 우세를 견지하였다. 그러나 문정왕후의 지원을 받은 소윤세력 또한 만만치 않아 대윤·소윤의 정치적 대립은 계속되었다. 이 대립은 인종이 일찍 병사하고 12세의 어린 명종이 즉위하면서 격화되었다.

 명종 즉위초는 인종대와 마찬가지로 대윤이 약간의 정치적 우세를 지니면서 소윤을 견제했던 시기였다. 또한 기묘사화 이후 침체에서 벗어나 중종 말기부터 정계에 재등장하여 명종초에는 상당한 기반을 확보하고 있었던 士林派도 명분과 정통을 강조하면서 심정적으로 대윤을 지지하며 소윤의 활동을 견제하려 하였다. 이는 즉위 직후의 院相에 대윤계 및 사림계 인물이 임명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으며, 또한 윤원로 탄핵에서도 그러한 분위기가 잘 나타난다.0002)

 여기에 대해 소윤은 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훈구대신과 결탁하여 반격을 개시하는데 처음에는 양사를 통해 이들을 탄핵하는 합법적인 방법으로 시도되었다. 그러나 양사에 포진해 있던 執義 宋希奎, 司諫 朴光佑 등을 비롯한 사림파 계열의 완강한 반대로 여의치 못하자 문정왕후의 밀지를 통한 비정상적인 방법이 동원되었다. 이에 다음날 兵判 李芑, 知中樞府事 鄭順朋, 工判 許磁, 戶判 林百齡 등이 직접 윤임·유관·유인숙 등 3인의 처벌을 주청하고, 중신들이 忠順堂에 모여 그들의 치죄를 논의하였다.0003) 그에 따른 논의 결과 윤임은 遠方竄逐, 유관은 파직, 유인숙은 遞差되는 것으로 각각 형량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죄목의 모호함과 內旨를 승정원에 보내지 않은 절차상의 하자로 사림들의 강력한 반대를 야기시켰다. 양사에서도 집의 송희규, 사간 박광우 등이 중심이 되어 이 점을 논박하였다. 특히 헌납 白仁傑은 강경한 언론을 구사하며 그 부당성을 통박하였다. 이는 척신세력을 자극하여 명종 즉위년(1545) 8월 28일 정순붕이 “宗社를 傾覆하려 했다”는 구체적인 죄명을 언급한 상소를 올림으로써 이들에 대한 처벌이 가중되었다.0004) 이 여파는 이들과 관련된 사림파 인사로까지 확산되었다.0005)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權橃은 유관·유인숙의 억울함을 극력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고, 정순붕은 이에 맞서 권벌을 護逆으로 몰면서 더 엄한 처벌을 요구하였다. 이에 중신들이 다시 의논하게 되고 그 결과 결국 윤임 등 3인은 강경론자들의 주장에 따라 賜死로 결정되었다.

 을사사화로 피화된 사림파계열의 인물을 일별하면 다음과 같다.

賜死:柳灌(斬), 柳仁淑(斬), 羅湜, 李震

杖死:李煇(斬), 郭珣, 成遇, 朴光佑, 鄭希登

流配:羅叔, 鄭源, 李若海, 沈苓, 鄭惟沈, 鄭滋, 成子澤, 金石諸, 李首慶, 成世昌, 韓淑, 韓樹, 金振宗, 李文楗

削奪官爵:權橃, 林亨秀, 盧守愼, 丁熿, 李天啓, 權勿, 李湛, 愼居寬

罷職:柳希春, 宋希奎, 白仁傑, 閔起文, 宋麟壽, 李震, 柳貞, 李爓, 安香念, 柳貞

 사화 주동세력인 소윤세력과 훈구 대신은 자기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공신 책봉에 나섰다. 이에 이기·윤원형 등은 성종대 佐理功臣의 예에 따라 공신책록을 서둘러 이기·정순붕 등 처음 윤임 등의 일을 직접적으로 제기한 자들을 衛社功臣 1등에, 그리고 충순당에 참여한 중신들은 거의 모두 2·3등 공신에 책록하였다. 이러한 공신책록은 얼마간의 개편을 거쳐 9월 15일 총 28명으로 확정되었다. 이렇게 확정된 공신들에게는 토지·노비 등이 차등있게 지급되었고 또한 加資되는 혜택도 주어졌다. 이러한 공신책록이 진행되는 것과 병행하여 사화의 피해자는 늘어났다. 더구나 9월 1일 경기감사 金明胤이 桂林君 瑠·鳳城君 岏을 역모로 고변한 사건에0006) 사림파가 관련됨으로써 피해의 범위는 더욱 확대되었다.

 그러나 위사공신은 책록 초기부터 그 구성의 다양성으로 공고성이 약하였고 또한 1등인 임백령·정순붕 등 주도 공신의 일부가 초기에 사망하면서 강력한 세력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閔齊仁·李彦迪·申光漢·宋麒壽 등 사림계 인사가 단순히 충순당의 의논에 참여하였다는 것으로 공신에 임명됨으로써 공신 주도의 정국운영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을사사화 그 자체가 정통성이 결여된 명분이 없는 사건이어서 공신의 비정당성이 지적되고, 또한 原從功臣 책록에는 양사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치는 등 비판적 여론도 비등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공신세력들은 정국을 계속 주도하기 위해 다양한 움직임을 보이는데, 먼저≪武定寶鑑≫을 편찬하여 을사사화와 공신책록의 정당성을 재천명하기도 하고 몇몇 공신을 추록하여 보강하기도 하였지만 기본적으로는 반대세력을 철저하게 탄압하는 강경책으로 나아갔다. 이에 따라 사림파의 피해는 점차 확대되어 갔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일어난 것이 良才驛壁書事件(丁未士禍)이다. 이 사건은 명종 2년(1554) 9월 부제학 鄭彦慤이 양재역의 벽에 쓰여 있던 “女主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라는 구절이 있다고 조정에 알리자 공신들이 이를 구실로 을사사화때 잔존한 사림에게 가죄한 사건이었다.0007) 이때 송인수·이언적·유희춘·노수신 등이 피화되었다.

 이후에도 명종 3년 2월에는 을사사화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하여≪續武定寶鑑≫편찬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당시 史官 安名世 등이 이기 등의 죄악상을 사실 그대로 기록해 놓은 것이 발견되자 안명세·趙璞·孫弘積 등 사림파에게 위해를 가하였다.0008) 명종 4년 4월에는 李若氷의 아들 洪南이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寧越에 귀양가 있던 중, 윤임의 사위인 아우 洪胤이 주상을 연산군에 비유하여 비방하고 충주 거주인을 규합하여 역모를 꾀했다고 고변함으로써 옥사가 이루어져 충주 일대가 텅 비었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많은 피해가 있었다.0009) 이처럼 집권세력은 정국운영에 반대하는 세력을 철저하게 제거하면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명종 초기의 정치세력은 문정왕후를 정점으로 小尹 戚臣系·훈구계·사림계 등 매우 다양하였지만, 사림계쪽은 사화가 연쇄적으로 확대되어 가는 가운데 그 중심 세력뿐만 아니라 주변에까지 화가 파급되는 타격을 입게 되어 정국운영의 핵심에서 제외되고 있었다. 다만 소윤 척신계와 훈구계가 주도한 초기 정국에서 일부의 온건한 사림계 인물들이 소극적으로 참여하면서 그 과정에서 사건의 공명정대한 처리, 피화인의 축소 등을 주장하면서 公論을 부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집권세력의 이러한 온건한 사림계 인물에 대한 포섭은 정국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훈척세력이 자기들 중심의 정국운영에 있어서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집권의 명분을 보완하기 위한 정치적 고려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본적인 현실인식 태도가 훈척세력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었던 사림계는 비록 사화 초기에 그 일부가 소극적으로 構禍에 참여하고 그 결과 어쩔 수 없이 공신에 녹훈되기도 하였지만, 이후의 정국운영에서는 그들과 거리를 두면서 나름대로 공론을 부지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훈척세력은 자기들의 정국운영과 관련하여 사림계가 제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오히려 異說을 제기하는 등 방해가 되자, 그들을 공격하여 定配 또는 賜死시키고 削勳하였던 것이다. 허자·민제인·이언적 등은 공신책록 후 곧바로 여러 사건에 연루되어 삭훈되었던 것이다.

 소윤 척신계는 대부분 왕실 및 문정왕후와 혈연관계에 있거나 그들의 정치적 입장에 동조하는 인물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훈구계와 결탁하여 사화를 주도하면서 정국을 장악하고 있었다. 윤원형·원로형제, 尹仁鏡·尹漑·韓景祿·尹敦仁 등이 중심인물이다. 이기·임백령으로 대표되는 훈구계는 중종말부터 나타난 사림파의 성장에서 오는 실세를 대·소윤의 대립을 이용하여 사화를 실질적으로 주도하면서 만회하려 하였다.0010) 특히 이기는 당시의 공론이 자신에게 불리한 것을 알고 사림계 인물의 제거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훈척계 공신세력은 몇 차례에 걸쳐 공신을 추록하는 등 자파세력의 안정화를 꾀하였으나, 한편으로는 훈척세력 중에서도 자기 도태가 이루어졌다. 먼저 명종 원년(1546)에 병조좌랑 尹春年의 탄핵으로 윤원로가 자원부처의 형식으로 안치되었다.0011) 윤원로가 소윤계의 핵심이자 문정왕후·윤원형의 동기이고 탄핵을 제의한 윤춘년이 再從弟임을 고려한다면 이는 소윤 척신계 내부의 갈등의 표출이었다. 윤원로 이외에도 陳復昌·李無彊·韓智源 등에 대한 탄핵도 계속되었다. 특히 이들 자파세력을 도태시킬 때 사림파의 공론을 고려하고 있었는데 이는 이 시기 훈척세력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사림파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 잔존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 시기 정치적 대세에 영향을 줄 정도의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이후의 사림파의 재성장에 중요한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자기 분열과 자기 도태의 과정을 거치면서 집권세력은 윤원형을 중심한 소윤 척신계와 이기로 대표되는 훈구계열의 두 세력을 중심으로 개편되었으며, 이들 두 세력은 상보적인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훈척세력이 어느 정도 주도권을 확보하면서부터 두 세력은 분열상을 보였다. 그 분열은 정국의 주도권 장악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정국은 이기와 윤원형이 함께 주도하고 있었지만 윤원형이 상대적으로 젊은 40대의 나이이고 또 외척이라는 어려움이 있었던 것에 반해, 당시 훈구계는 일찍부터 정계에 등장하여 축적된 경험이 있었고 또한 사화를 실질적으로 주도하였다는 것이 현실적인 힘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특히 이기는 위사1등공신에 책봉됨을 계기로 좌의정에 봉림되면서 실질적으로 의정부를 주도하였다. 그는 淸原尉 韓景祿을 통하여 궁중과 일정한 연결을 가지면서 “조정의 관작은 대개 그의 門에서 多出하였다”라고 할 정도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0012)

 그러나 이러한 이기의 권한 강화는 기본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즉 사화시 이기의 고변은 문정왕후의 밀지를 받고 따른 것이었기 때문에 명종 초기 정국의 주도권은 위사공신 집단보다는 문정왕후와 동모제인 윤원형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윤원형을 중심한 소윤 척신계는 이러한 이기의 권한 강화에 불만을 가지면서 그의 견제에 나섰다. 당시 소윤 척신계는 이기의 권한 강화를 견제하기 위해 그가 “功을 믿고 驕恣하며 탐독을 행하고 또한 권력을 專擅한다”는 이유를 들어 탄핵하고 좌의정에서 체직시켰다.0013) 그러나 당시는 척신계가 완전히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하고 단지 타격을 주는 정도로만 그쳤다. 이후 소윤 척신계는 서서히 훈구세력을 약화시키면서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기는 체직 후에도 소윤 척신의 필요성에 의하여 豊城府院君으로 政事에 계속 참여하였으며 이듬해 이홍윤의 옥사사건을 계기로 영의정에 복직되었다. 그러나 복직된 지 얼마 후에 중풍으로 쓰러져 명종 7년 4월에 병으로 사망하게 되자 위사공신집단은 결정적으로 쇠퇴하게 되었고, 이후 홍언필·임백령·정순붕 등 훈구대신들의 잇단 병사로 훈구세력은 구심점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후의 정국은 윤원형을 중심한 소윤 척신계 지배체제로 넘어가게 되었다. 윤원형은 銓曹인 이조·병조의 판서, 의정부와 중추부의 직임을 주로 역임하면서 당시 정국에서 중요 사안 결정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특히 이들 세력의 적극적인 후원자요 배후자인 문정왕후는 명종 20년 사망하기까지 절대적인 위치에 있으면서 이 시기 정치에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한편 이러한 척신 지배체제는 沈連源·沈通源 등 또 다른 외척세력이 가세함으로써 그 체제는 더욱 굳어졌으며 장기화의 틀을 마련하였다. 명종비의 조부인 심연원은 명종 3년부터 13년 병사할 때까지 3정승을 두루 역임하면서 윤원형의 정국운영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 시기 윤원형을 중심한 소윤세력은 혈연관계의 인물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윤원형이 정국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입장을 같이 하면서 자발적으로 접근하였던 자들이었다. 특히 윤원형에 있어서 궁중에서의 후원자가 문정왕후라고 하면, 그의 장기간에 걸친 권력 행사에 관료로서 가장 큰 밑받침이 된 것은 尹春年이었다. 그는 윤원형과 재종 사이로 명종초에 윤원로를 탄핵하면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이후 윤원형 독주 체제 구축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한편 당시 윤원형은 자파세력의 저변 확대 및 지지기반 강화를 위해 신진세력도 포섭하려고 하고 있었다. 이들 신진세력 중에는 金弘度·金虯 등과 같은 사림파적 성향을 지니고 있는 인물도 일부 포함되고 있었다. 이는 선조대 동서분당을 야기한 金孝元이 젊었을 적에 윤원형의 집에 출입했다는 사실에서도 나타난다.0014) 이것은 이들이 척신지배하에서 공론을 부식하기 위한 활동을 할 수는 없었다 하더라도 이후의 사림파 진출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척신계의 입장에서도 시대적 대세였던 사림파의 성장이라는 측면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부나마 포섭하여 정국의 주도권을 유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소윤세력은 언관을 이용하여 반대세력을 제거함과 동시에 의정부와 육조를 바탕으로 정국을 계속 주도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크게 정치적으로 쟁점이 되는 문제는 없었다. 다만 문정왕후가 정권이 어느 정도 안정 상태에 이르렀다는 판단아래 명종 5년(1550) 禪敎兩宗과 禪科를 복설한 것, 內需司 내시에게 堂上印을 만들어 준 것이 문제가 될 뿐이었다. 이 두 문제는 명종대를 통틀어 가장 집요한 공격의 대상이 되었으나 결국 문정왕후가 죽은 후에야 혁파 내지 폐지되었다.

 이와 같이 윤원형을 중심으로 하는 소윤 척신 지배체제가 어느 정도 확립되어 가는 명종 8년 7월에 명종의 나이가 20세가 됨에 따라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명종의 親政이 시작되었다.0015) 이 조치는 기본적으로 왕이 이미 20세의 성인이 되어 수렴청정의 명분이 없어졌다는 이유 때문이었지만 한편으로는 8년간의 수렴청정을 통해 반대세력을 어느 정도 제거하여 지배체제가 안정되었고, 또한 국왕도 자기의 영향력하에 둘 수 있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후의 정국도 왕이 직접 정치에 임했지만 실제로는 문정왕후-윤원형 체제가 계속되었다.0016)

 한편 모후의 聽政에서 벗어나 친정에 나선 명종은 차츰 독자적인 정국 운영을 모색하였다. 따라서 명종의 입장에서는 왕권을 능가할 정도의 권력을 가진 척신의 존재가 부담스러웠고 이에 나름대로의 대응책을 강구해야 했다. 그것은 왕권 강화를 위한 노력과 간접적인 방법이긴 하나 대응세력으로서의 자파세력 양성이라는 두 가지 측면으로 나타났다.0017)

 명종 10년을 전후한 시기에 오면 명종의 독자적인 권한 행사의 의도와 맞물려 윤원형의 위치에도 약간의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명종 10년 사헌부에서 윤원형과 가까운 인물인 韓智源을 탄핵한 것이나, 12년에 신진사류 김규·김홍도·金繼輝 등이 윤원형이 천권하여 일으킨 폐단을 논핵하려다 중지한 일은 그 한 예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이들이 윤원형의 사주에 의한 金汝孚·李銘 등의 논핵을 받고 定配됨으로써 일단락 되었다.

 한편 이와 함께 명종은 윤원형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독자적 세력을 확보함으로써 이를 통해 정치세력간의 균형을 꾀하고 그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그 결과 중전의 외숙인 李樑이 적임자로 주목되었다. 당시 이량이 윤원형의 대응세력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명종비인 仁順王后의 친정인 沈氏 집안의 도움이 컸다. 심씨 집안은 중종 37년(1542)에 沈鋼의 딸을 경원대군에게 출가시킴으로써 왕실과 연결되었으며 이후 인순왕후의 조부인 沈連源이 衛社功臣 3등에 추록되는 등 크게 번성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윤원형으로부터 견제를 받고 있었다. 이러한 형편의 심씨 집안이, 명종이 소윤세력에 대응할 세력을 찾고 있을 때 자기들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인물로 그들의 인척이 되는 이량을 추천하였다. 중전의 친족 가운데는 심연원 외에도 沈逢源·沈通源 등이 있었으나 공론을 인정받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명종은 아직 현달하지 않았고 또한 독자적인 세력이 없는 이량을 택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이량은 沈家 세력과 국왕의 비호를 받으면서 급성장하여 입사한지 몇 년만에 政卿의 지위에 오를 정도로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여 갔으며, 이를 바탕으로 지지세력을 규합해 나갔다. 명종의 이량 발탁은 처음에는 각관의 선임자들의 반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이후에도 명종은 그의 진출에 특별한 배려를 하였다. 한편으로 명종은 이량과 연결될 수 있는 세력의 진출에도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러한 명종의 뜻을 헤아려 이량세력의 급성장에 도움을 준 인물은 심통원이었다. 그는 이조판서가 된 후 이량계 인물을 대량 三司에 포진시켜 세력 확장을 도왔다.

 이량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세력은 혈연적 요소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는 이 세력의 단결을 강화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한편으로 이 세력 중에는 소윤세력 중 이탈한 인물이 보이는 등 각자의 현실 대응의식에 따라 형성된 점도 없지 않았다.

 이렇게 구성된 이량세력은 자파의 세력 확대를 위해 먼저 인사권의 장악에 나섰다. 이량의 정치적 성장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명종 14년(1559)부터 몰락한 명종 18년까지 人事 銓衡의 책임을 맡고 있는 吏·兵曹 판서직에 있었던 인물을 보면 이량세력으로 분류될 수 있는 인물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량 자신도 명종 18년 이조판서에 취임하여 銓注權을 행사하였다. 한편 이량세력은 인사 행정의 실무자인 銓郞職에도 자파세력을 진출시켜 보다 완전한 인사권의 장악을 시도하였다. 이는 이량 자신이 전랑이 되려고 한 것,0018) 자기 아들인 李廷賓을 전랑으로 임명하려 한 것, 아들의 체직시 아들 친구인 柳永吉 등을 후임으로 하려고 한 것0019)에서도 확인된다. 이량세력의 이러한 노력은 공론을 내세우는 朴素立·尹斗壽 등 사림계 전랑의 반대로0020)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지만 그들의 인사권 장악을 위한 노력의 일단은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인사권의 장악을 토대로 이량세력은 자파세력을 言官職에 진출시켰다. “이 때 이량의 권세가 날로 치성하여 侍從·臺諫이 모두 그의 문하에서 나왔다”0021)라는 표현은 그런 현상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이 시기 대표적인 이량세력은 심통원을 비롯하여 金明胤·鄭士龍·元繼儉 및 언관으로 李彦忠·李重慶·尹百源·高孟英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이 이량세력은 전랑과 언관 체제의 확보를 통한 정국 운영을 구사하였다. 이는 소윤세력이 政曹 중심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려 한 것과는 상반되며, 오히려 전랑과 언관을 이용하여 재상권을 견제하면서 권력 구조의 균형을 꾀하려한 사림파의 정국운영 방식과 유사하다.0022)

 그러나 이러한 이량세력이 추진한 정국운영 방식은 반대세력인 소윤세력이 정조를 장악하고 있고 또한 사림계의 반대로 전랑직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불안전한 형태로 유지될 수밖에 없었다.

 어떻든 이러한 정국운영 방식이 이 시기에 나타난 것은 전 시기보다는 한 단계 진전된 정치운영으로서 의미를 지닌다고 보여지며 또한 여기에는 이 시기 사림파의 성장이라는 역사적 추세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량세력의 급속한 세력 강화에 대해 윤원형측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이량세력의 성장으로 상대적으로 힘이 약화된 소윤세력은 세력 만회를 위한 노력으로 왕실과 혼인을 시도하였다. 윤원형과 인척관계에 있는 黃大任의 딸을 병이 있는 것을 숨기면서까지 세자빈으로 삼아 후일을 기약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문정왕후의 절대적 영향력하에 유지되었던 소윤세력의 권력기반의 취약성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과 아울러 소윤세력은 이량세력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윤원형과 이량, 양세력간의 갈등은 명종 16년에 집중적으로 표출되었다. 특히 이 문제는 소윤세력과 이해관계가 걸린 문정왕후가 개입함으로써 명종도 일시적으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명종은 어쩔 수 없이 이량을 평안도 관찰사로 出外시켜 그 세력을 보존하도록 하였다. 윤원형은 이 때를 반격의 기회로 삼아 이량세력을 공격하였으나 이량은 곧 바로 京職에 복직하는 등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여기에는 이량세력을 통해 소윤세력을 견제케 함으로써 정치세력간의 균형을 통한 왕권의 강화와 안정을 꾀하려는 명종의 의도가 크게 작용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윤원형일파에 대한 대응세력으로서의 위치를 넘어선 이량의 세력 강화는, 양자의 균형에서 왕권 강화를 노리던 명종의 입장에서는 큰 부담이 되었다. 그리하여 명종은 정국의 균형적인 안정을 위해 이량을 제거할 계획을 갖고 있던 중, 이량이 그들의 정국운영에 걸림돌이었던 신진사류의 영수인 朴素立·尹斗壽 등을 제거하고 사림의 중진인 姜士尙·朴應南 등을 지방으로 좌천시켜 확고한 위치를 잡으려는 계획을 갖자 이를 구실로 沈義謙의 협조로 홍문관을 이용하여 이량을 탄핵 실각시켰다.

0001)중종 후반기의 정국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이 있다.

金宇基,<朝鮮 中宗後半期의 戚臣과 政局動向>(≪大丘史學≫ 40, 1990).

李秉烋,<中宗·明宗代 權臣·戚臣政治의 推移와 晦齋의 對應>(≪대동문화연구총서≫ 11, 성균관대 출판부, 1992).
0002)명종 연간의 정국동향에 관한 구체적인 검토로는 다음의 글들이 있다.

金宇基,<朝鮮 明宗代의 政治勢力과 政局動向>(≪朝鮮史硏究≫ 2, 1993).

李宰熙,<朝鮮 明宗代 ‘戚臣政治’의 전개와 그 성격>(≪韓國史論≫ 29, 서울大, 1993).
0003)≪明宗實錄≫ 권 1, 명종 즉위년 8월 임자.
0004)≪明宗實錄≫ 권 1, 명종 즉위년 8월 무오.
0005)을사사화의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이 참고된다.

禹仁秀,<朝鮮 明宗朝 衛社功臣의 性分과 動向>(≪大丘史學≫ 33, 1987).

申解淳,<官僚間의 對立>(≪한국사≫ 12, 국사편찬위워회, 1977).
0006)≪明宗實錄≫ 권 2, 명종 즉위년 9월 신유.
0007)≪明宗實錄≫ 권 6, 명종 2년 9월 병인·정묘·기사.
0008)≪明宗實錄≫ 권 7, 명종 3년 2월 기미·경신·신유·을축.
0009)≪明宗實錄≫ 권 9, 명종 4년 4월 정사 및 5월 경인.
0010)이하 서술은 金宇基, 앞의 글(1993) 참조.
0011)≪明宗實錄≫ 권 3, 명종 원년 3월 계유.
0012)≪明宗實錄≫ 권 10, 명종 5년 7월 병오.
0013)≪明宗實錄≫ 권 7, 명종 3년 4월 갑자·정묘.
0014)≪黨議通略≫ 宣祖.
0015)≪明宗實錄≫ 권 15, 명종 8년 7월 병진.
0016)金宇基, 앞의 글(1993), 19∼22쪽 참조.
0017)金宇基, 위의 글(1993), 25∼35쪽 및 李宰熙, 앞의 글, 74∼92쪽 참조.
0018)≪明宗實錄≫ 권 29, 명종 18년 7월 무자.
0019)≪明宗實錄≫ 권 29, 명종 18년 8월 을축.
0020)≪明宗實錄≫ 권 29, 명종 18년 7월 무자.
0021)≪明宗實錄≫ 권 27, 명종 16년 윤5월 정유.
0022)金宇基, 앞의 글(1993).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