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향촌사회의 변동
1. 친족과 촌락구조의 변화
1) 친족·문중조직의 변화
조선 후기의 향촌사회구조는 여러 측면에서 변화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중에서 여기에 다루게 될 촌락과 친족조직은 향촌사회의 가장 기초단위이자 말단구조였고, 이들 역시 이 시기에 괄목할 만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일제시대의 식민사학자들은 조선시대의 가족제도나 상속제도가 대체로 부계친족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의 종법제도와 같은 형태로서 그것이 조선시대 온기간 동안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파악하였다.465) 그러나 17세기 중엽 이후부터는 본질적으로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었음이 1970년대 이후 이루어진 일련의 사회사연구에 의해 밝혀졌다.466) 대체로 조선 후기 친족체계 변화의 주된 골격은 내외친이 망라되는 양계친족에서 嫡長子 중심의 부계친족으로 특징지워지며, 이는 제사상속 및 분재상에서 장자우대의 경향, 족보에서 친족의 수록범위 축소, 입양제도의 변화, 그리고 동족마을의 형성 등으로 예증되었다. 부연하면 지금은 대체로 17세기 중엽을 분기점으로 하여 부계친족 중심의 문중결속력이 강화되고 이를 통해 새로운 가족 및 친족과 결합된 모습이 정착되어간 것으로 보는 쪽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왜 일어났으며 변화의 요인이 무엇이었는지, 또 조선 후기의 향촌사회구조 변화와 친족의식 변화가 어떻게 선후로 연결되는지에 관한 因果의 해명은 아직 불분명한 상태이다.467)
한편 이와 같이 17세기 중엽 이후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 친족체계의 변화가 보다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은 18세기 이후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문중활동이라는 새로운 사회현상을 통하여 확인할 수가 있다. 「門中」은 친족 사이의 결속범위나 친소관계를 결정하는 용어로, 실제 조선 후기의 향촌사회구조 속에서 이같은 문중적인 조직의 모습은 매우 다양한 형태로 구체화되었다. 더욱이 이들이 단순한 친족 내적인 결속만으로 그치지 않고, 그 결집된 힘을 사회구조 속에 강하게 투영시키려 하였다. 족적인 결합의 범위와 친소관계를 새로운 종법질서로 재편하려던 움직임을 17세기 중엽 이후에서 볼 수 있었다면, 18세기 이후의 친족결속력과 친족조직(문중조직)은 일종의 단위 사회세력으로 존재(기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결국 여러 형태의 사회사적 및 경제적인 현상들과도 밀접히 연결되고, 이에 따라 문중활동의 제양상도 이 시기 향촌사회구조 변동에 직접·간접으로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465) | 善生永助,≪朝鮮の聚落≫(朝鮮總督府中樞院, 1933)과≪李朝の財産相續法≫(朝鮮總督府 中樞院, 1936) 등이 대표적인 연구이다. 이들 연구에서는 男女差別·同姓不婚·異姓不養·長子奉祀·大家族制 등이 조선시대에 같은 모습으로 지켜졌다고 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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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6) | 崔在錫,<朝鮮時代 相續制에 관한 硏究>(≪歷史學報≫53·54, 1972). ―――,<朝鮮時代의 族譜와 同族組織>(≪歷史學報≫81, 1979). ―――,<朝鮮時代 門中의 形成>(≪韓國學報≫32, 1983). ―――,<17세기 親族構造이 變化>(≪정신문화연구≫24, 1985). 李光奎,<李朝時代의 財産相續>(≪韓國學報≫3, 1976). 金容晩,<朝鮮時代 均分相續制에 관한 一硏究>(≪大丘史學≫23, 1983). |
467) | 이와 관련하여 李樹健은 주자학(가례)의 보급과 진전 속도의 차이가 친족체계의 변화에 크게 작용하였음을 지적하고, 金容晩도 이를 적극 수용하였다(李樹健,<朝鮮前期의 社會變動과 相續制度>,≪歷史學報≫129, 1991). 한편 鄭勝謨는 이와 다른 시각에서 이같은 문중의식의 변화가 가문의 수적 팽창과 불균등 발전(분화)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족적 결합이 이루어지기 위하여는 여러 대에 걸친 재생산과정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임란 이후에 族結合이 갑자기 이루어진다고 보는 견해는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조선 후기 주요 성씨들의 유대가 그 이전의 개인적·가문적 차원의 횡적 유대에서 성씨 또는 종족 중심의 종적 유대로 바뀜과 동시에 친족의 유대도 집단을 앞세운 종적인 관계의 강조로 처가·외가를 통한 개인적인 횡적 유대가 제약받게 된 것으로 이해한다(鄭勝謨,<鄕村社會 支配勢力의 形成과 組織化 過程>, 東洋學學術會議발표요지, 1989). 또 崔在錫은 ‘이것은 다른 사회적·정치적 문제와 관련되며, 특히 조선 중기 이후 서인의 발달이나 정치집단(당파)간의 갈등 격차와 밀접한 관계, 한편으로는 임란 이후의 사회적 궁핍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의 집단화 현상의 결과라고 간주’할 수도 있음을 지적하였다(崔在錫, 위의 글, 1979, 79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