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장치기
장치기는 여러 사람이 편을 갈라 각기 1.5∼2m 정도의 장대를 가지고 공을 쳐서 적진에 들여보내는 놀이로서 지금의 필드하키와 방불한 것이다.857) 이 경기는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일본 등지에서도 실시되었고 옛 문헌에도 打毬·擊毬·抛棒·杖毬·棒戱 등으로 기록되었는데 조선시대에는 주로 타구·격구로 불려 왔다.858)
고려시대의 격구가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경기임은 이미 밝혀진 바 있는데, 그 폐해 때문에 조선에 와서는 고려와 같이 화려하게 시행되지는 않았지만 무과시험의 한 종목이 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 귀족사회의 고급놀이였던 격구는 새로운 왕조 초기에 점차 변형되어 민중과 가까워지면서 장치기·얼레공치기 등 민중의 낱말로 불리면서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조선왕조의 문치주의는 격구를 점차 쇠퇴시켜 정조시대에≪武藝圖譜通志≫를 증보할 때 격구법을 아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상류층의 격구는 소멸되었어도 민중놀이로 토착화된 장치기는 맥을 이어 놀이의 방식도 사치에서 소박으로 잡다에서 단순한 것으로 변화되어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하여 일제통치 아래서도 민중의 겨룸놀이로 이어져 왔는데 수원청소년동맹 楊甘지부 주최의「전조선얼레공대회」는 민중놀이로 장치기가 끈질기게 이어져 왔음을 증명하는 것이다.859)
이 장치기에는 공과 채가 있다. 공의 크기는 야구공만한 정도로 나무를 둥글게 깎아 다듬어서 만들어 쓰고 간혹 그 위에 가죽을 꿰매 입히도록 한다. 채는 뽕나무 또는 기타의 나무로 만들었는데 길이는 5척쯤 되고, 모양은 끝이 구부러졌다. 인원은 원래 제한이 없었으나 대개 6∼10여 명 정도로 하고 1명은 수문장을 하고 나머지 전원은 공격과 수비를 하였다. 양편이 서로 작정하여 5점 나기, 10점 나기를 정하고 점수를 먼저 낸 편이 이긴다. 경기는 구멍공(원의 중심에 파놓은 구멍에 넣고 치는 공)을 쳐서 시작하고, 다음 공은 진 편이 첫 공을 친다. 이 놀이에는 반칙과 벌칙이 있는데 ① 공이 몸의 일부에 닿는 것, ② 상대의 채를 몸으로 막는 것, ③ 상대를 채로 치거나 치려는 것, ④ 상대의 활동을 몸으로 막는 것(상대에게 물레공을 치게 함) ⑤ 공을 구장의 종선 밖으로 쳐내는 것(상대에게 굴러공을 치게 함), ⑥ 공을 횡선 밖으로 쳐내는 것(상대에게 구멍공을 치게 함) 등이 있다. 선수를 구별하기 위하여 청홍의 띠를 두르게 하고 심판은 딱딱이를 쳐서 경기를 진행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