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조선 시대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Ⅲ. 19세기의 민중운동1. 서북지방의 민중항쟁3) 항쟁의 결과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1. 신분제의 이완과 민중사회의 성장
          • 1) 사족지배구조의 정착과 신분구조의 변화
          • 2) 17세기 위기 이후 대민 지배정책의 전환
            • (1) 국가의 대민 지배방식의 전환과 ‘여민휴식’정책의 철회
            • (2) 공동납체제로의 전환과 18∼19세기 호적 운영의 변화
          • 3) 사족지배질서의 동요와 민중의 성장
        • 2. 민중의 사회적 결속
          • 1) 공동체 질서와 민중
          • 2) 18세기 향촌공동체의 변화와 민중조직의 활성화
            • (1) 면리제의 강화와 민
            • (2) 동계의 변화와 분동
            • (3) 민중조직의 활성화
          • 3) 19세기 민중의 사회적 결속
            • (1) 향회의 활용
            • (2) 민중조직과 농민항쟁
        • 3. 민중운동의 사상적 기반
          • 1) 성리학에 대한 사상적 도전
            • (1) 성리학의 교조화
            • (2) 민중사상의 확산
          • 2) 민중운동의 사상적 특성
            • (1) 민중운동 속의 사상경향
            • (2) 민중사상 전파의 주체
            • (3) 정부의 대응책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1. 사회경제적 배경과 정치적 과제
          • 1) 민중세계의 각성
          • 2) 유대관계의 강화
          • 3) 향권의 추이
          • 4) 사회세력의 동향
        • 2. 유민과 명화적
          • 1) 유민
            • (1) 유민발생의 배경
            • (2) 유민의 실태와 유입처
            • (3) 정부의 유민대책
          • 2) 명화적
            • (1) 명화적 발생의 배경과 조직체계
            • (2) 활동양상과 그 성격
            • (3) 정부의 대책
        • 3. 여러 지역의 항쟁과 ‘무신란’
          • 1) 18세기 초 민중의 동향과 변산군도
          • 2) 무신란의 발단과 전개
            • (1) 18세기 초 정치정세와 ‘무신당’의 결성
            • (2) 무신당의 반정계획과 지방토호·녹림당의 가세
            • (3) 무신란의 전개와 향촌사회의 동향
            • (4) 무신란의 참가계층과 그 성격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1. 서북지방의 민중항쟁
          • 1) 사회경제적 특성과 항쟁의 배경
            • (1) 서북지방의 사회·경제적 특성
            • (2) 매향과 향권의 동향
            • (3) 중앙권력의 구조적 수탈
          • 2) 항쟁의 과정
            • (1) 서북민의 저항과 홍경래 난의 발발
            • (2) 홍경래 난의 전개과정
          • 3) 항쟁의 결과
            • (1) 홍경래 난 전후 향촌지배세력의 변동
            • (2) 반봉기군 ‘의병’의 향권 장악
            • (3) 서북민항쟁의 역사적 의의
        • 2. 삼남지방의 민중항쟁
          • 1) 사회경제적 배경과 정치적 여건
            • (1) 사회경제적 배경
            • (2) 정치적 여건과 지방사회의 운영
          • 2) 항쟁의 과정과 양상
            • (1) 항쟁의 발생 지역
            • (2) 항쟁의 직접적 계기
            • (3) 항쟁의 전개과정
            • (4) 항쟁의 참가층과 주도층
            • (5) 항쟁조직
            • (6) 요구조건
            • (7) 공격대상
          • 3) 정부의 대책과 항쟁의 의미
            • (1) 농민항쟁에 대한 정부의 대응
            • (2) 삼정에 대한 대책
            • (3) 이정책에 대한 반대 논의와 저항
            • (4) 농민항쟁의 평가
        • 3. 변란의 추이와 성격
          • 1) 변란과 민란
          • 2) 변란발생의 배경
            • (1) 사회적 모순의 심화와 ‘저항적 지식인’의 활동
            • (2) ‘양이’의 침공과 ‘이단사상’의 만연
          • 3) 변란의 추이
            • (1) 19세기 전반의 변란
            • (2) 해서, 영남세력의 변란
            • (3) 광양란
            • (4) 이필제란
            • (5) 기타
          • 4) 변란의 성격
            • (1) 변란의 조직과 운동구조
            • (2) 변란의 이념
            • (3) 변란과 19세기 후반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3) 항쟁의 결과

(1) 홍경래 난 전후 향촌지배세력의 변동

 세도정권과 그 대행자인 수령권에 대한 정치투쟁이 집적되어 일어난 홍경래 난에서 비록 일시적이었지만 봉기군에 의한 향권 장악이 있었고, 다시 ‘의병’세력의 대두에 의해 극적인 반전이 이루어졌다. 여기서는 먼저 봉기군의 구성 및 성격, 그리고 홍경래 난의 경과 속에서 봉기군이 어떻게 향권을 행사하고 있었는가를 살펴보고, 이어서 ‘의병’의 성격 및 동향, 그리고 봉기가 패배로 끝난 후 향촌사회질서는 어떻게 재편되어 가는가를 추적하여 보고자 한다.

 봉기군의 주도층 및 참여세력에 대하여≪陣中日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洪景來는 괴수요, 禹君則은 참모였으며, 李禧著는 와주요, 金昌始는 선봉이었다. 그리고 金士用과 洪總角은 손발의 역할을 하였다. 그 졸개로는 의주로부터 개성에 이르는 지역의 거의 대부분의 富戶·大商들이 이에 망라되어 있었고, 황해·평안 양도의 破落·難當이 모두 부하가 되어 돌아다니고 流民·飢氓이 또한 많이 투속하였다(≪陣中日記≫권 1, 신미 12월 8일, 133쪽).

 즉 봉기군의 지도층으로는 홍경래, 우군칙, 이희저, 김창시 등을 주목하고 있으며541) 참여세력으로는 ① 의주에서 개성까지의 부호·대상 ② 황해·평안도의 파락·난당 ③ 유민·기맹이라는 세 가지 부류로 분류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지도층 및 참여세력의 사회경제적 성격을 파악하여 보기로 하자.

 홍경래는 신분이 명확하지는 않으나 평민 출신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전답이나 노비를 가지지 못한 빈농의 처지에 있었다. 그는 豪民的 성격의 인물로 地師를 칭하고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사회사정을 엿보면서 봉기 참여자들을 규합하였다. 봉기 직후에는 平西大元帥가 되어 난의 최고 지도자로서 중심적인 활동을 하였다. 그는 전형적인 저항 지식인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는 상당한 군사지식과 지도력을 가지고 항쟁을 이끌어갔다. 그러나 그는 난에서의 구체적 활동보다는 鄭眞人說을 자기 행동의 이념적 기반으로 삼고 있었듯이 그 상징성이 지니는 의미가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우군칙은 봉기군 지도부 가운데 실질적으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그도 風水師로 자처하였고, 卜術人이라 지칭되기도 하였다. 그는 列邑의 軍校·鄕任들과 체결하는 일을 전담하였다.542) 그는 龜城의 賤孼로서543) 홍삼 밀무역에 종사하다가 그 사실이 적발되어 서울 포도청에서 체포령이 내려 수색 중에 있던 인물이었다. 또 우군칙은 홍경래와 더불어 밀무역과 사상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하기도 하였다.544)

 이희저는 본래 驛奴인데 家財가 부유하여 무과로 출신하였던 인물로서 청북의 부상대고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545) 그는 그 후 재력으로 향안에 들어갔다가 가산군수 鄭蓍에 의하여 삭제되기도 하였다.546) 경제적 부를 바탕으로 신분상승 및 향권에 도전하는 이른바 신향세력에 속하는 자였다.547) 그의 주변 친인척들이 모두 열읍의 ‘奸校’·‘猾吏’·富民·大賈였다.548)

 김창시는 곽산의 유력한 토호로서 儒業에 종사하였으며 순조 10년(1810) 10월에는 小科 式年試를 통과하여 進士가 되기도 하였다. 그는 내응자를 모집하고 격문을 작성하는 등 봉기의 명분을 선전하는데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그는 또한 의주 및 곽산의 상인들과 연계를 가지고 상업에도 종사하였다.549)

 4월 28일 내린 ‘平賊陳賀’의 敎書에 따르면, 이희저·김창시·우군칙·이제초·김사용 등은 토호로서 비교적 부유한 경제기반을 확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550) 그리고 앞에서 보았듯이 그 부는 상업적 수단을 통해서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지도층은 토호 지주적 측면과 상인적 요소들이 얽혀 있었다.

 한편 참여세력의 구체적 동향은 봉기 직후인 12월 19일부터 22일까지의 상황을 보고한 다음과 같은 평안병사의 첩보에서 엿볼 수 있다.

대개 이 흉적이 갑자기 일어나서 가는 곳을 막을 수 없고 한 곳에 모이는 자들을 보면 혹 백여 명을 넘거나 혹 수백 명에 이르러 明火의 강도와 같습니다. 도당들은 이처럼 번성하고 향응하는 자는 매우 많습니다. 곳곳에서 번갈아 일어나는데 그 모습이 대체로 비슷합니다. 청북의 4∼5주군이 수일 만에 함락된 까닭은 모두 邑屬과 官隷들이 내응한 때문이며 그 무리들이 처음에는 많지 않다가 관부에 들어와서는 창고를 열어 기민을 구제하고 돈을 풀어 모병을 하니 무뢰유걸의 무리들이 다투어 따르게 되어 날로 치성하여 요원의 세와 같습니다. 이른바 내응이 없는 읍이 없는데 부호는 돈이나 곡식을 가지고 응하며 邑隷는 북을 울리며 맞아들이니 長吏가 관을 버리고 도망하는 것은 당연한 형세였습니다(≪陣中日記≫권 1, 신미 12월 28일, 186∼187쪽).

 여기서 우리는 읍속 및 관예들의 내응과 기민에 대한 구제가 봉기 직후 봉기군이 청북지역을 쉽게 장악할 수 있었던 주요한 동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내응세력이 직임으로는 향임·군교 등이었고 경제적 형편으로는 부상·요호였다고 할 수 있다.551) 이 내응세력으로서의 관예와 읍속들이 앞의≪陣中日記≫에서 참여세력으로 분류된 파락·난당층들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무뢰유걸의 무리들이란 유민·기맹에 해당하는 부류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부호·대상이란 지도층의 사정과도 통하며 상업적 기반을 갖는 토호지주층과 대상인층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내응세력으로서의 관예와 읍속의 동향은 향권의 향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내응세력의 몇몇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정복일은 다년간 철산의 首校로서 가산·정주·선천·곽산 등 읍의 향임이나 장교들과 체결하여 내응케 하였고,552) 선천에서는 좌수부터 향소, 책객들이 수령에게 항복을 권유하였다.553) 특히 구성군에서는 풍헌 許瑀 등 10여 명이 내응하여 허우는 자신이 직접 軍馬喂養穀草都次知가 되어 民丁을 調發하여 柴穀草 등의 물자를 輸運하였고, 富民 張柱國을 軍糧監官으로, 曺今龍을 鎬饋監官으로, 李龍泰를 食物次知로 삼았다.554) 태천에서도 좌수, 수교, 수리 등이 내응하였다.555) 뿐만 아니라 병영에서도 수교 이하 6∼7인이 봉기군에 가담하였다.556) 이처럼 내응세력은 그 지역 향권에 밀접히 관계하던 세력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주성에 머물면서 성내의 군졸을 모을 때의 사정을 보고한 정부측 문서에서 그 상황을 “읍민들은 예전처럼 살고, 관속들은 평상시처럼 일을 거행한다”고 하였고, 州校 崔爾崙은 主管將이 되어 邑務를 거행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었다.557) 수령권만이 배제되었을 뿐, 향권이 봉기군의 수중에 온전히 장악되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봉기군은 처음 가산을 점령하고 이어 10여 일 만에 곽산·정주·박천·태천·선천·구성·철산·용천 등을 쉽게 점령하였다. 그리고 이들 점령 지역의 지배와 봉기군 충원을 위해 각각 留陣將(留鎭將·主管將·假倅)을 두었다. 이 유진장의 역할은 곧 봉기군의 향권 장악의 실태와 그 행사방향을 엿보게 한다.

 주요 지역 유진장은 다음 표와 같다.

지 역 성 명 직 임 비 고
가 산 尹 元 燮 미 상  
곽 산 朴 星 信 前 僉 使 토호
박 천 韓 日 恒 執 事 토호
정 주 崔 爾 崙

金 履 大
州 校

座 首
12월 27일에 교체됨
선 천 劉文濟·崔奉觀 將 校 左右翼將이 되어 邑務主管
철 산 鄭 復 一

張 漢 羽
將 校

鄕 任
체포된 후 장한우로 교체됨

 
용 천 鄭 聖 翰 營 將 名祖의 孫
태 천 邊 大 益 倉 監  

<표>봉기군 주요 점령지역의 유진장

≪陣中日記≫≪關西平亂錄≫등을 참고로 작성

 이<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유진장은 토호적 기반을 갖는 향임·군교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그 지역사회에 미치는 정치사회적 영향력이 우세한 인물들이었다. 예를들면 정주의 김이대는 좌수로서 향권을 담당하고 있으면서 매항을 주도하기까지 하였다. 김이대는 賑資穀을 보충한다고 칭하여 1천 냥을 받고서 정주 부호 朴厚文을 향안에 넣어주는 등, 부자라고 이름이 있는 자 28인을 신향으로 올리며 돈을 받았다. 그런데 이들 신향 중에는 땅을 팔아 향전을 바치는 자가 있을 정도로 강제성을 띤 매향이었다. 한편 부호로서의 신향들은 봉기군에 의하여 군량이 배당되는 등 자의건 타의건 봉기군에 가담하고 있었다.558)

 내응세력이나 유진장의 사회적 성격을 통해서 살폈듯이 봉기군의 상층부는 鄕武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는 곧 성장하고 있는 신향층이 봉기군의 주도층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559)

 토착적 기반을 갖는 향인층이 유진장으로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었는가를 곽산의 경우에서 잘 살필 수 있다. 3월 5일자 선천현감의 秘報에는 곽산 善騎隊에 소속되었던 봉기군들의 供辭가 실려 있다. 그 가운데 金中太와 金化準의 공사에 의하면, 봉기군에 뽑힐까 두려워 외촌에 숨어 있었는데도 박성신이 男丁案, 즉 軍案에 따라 가려뽑았기 때문에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560)고 하였듯이 군안에 근거하여 군대를 징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金京祚의 공사에 의하면 군대를 뽑을 때 자신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는데 이미 자신은 도피했기 때문에 그의 아우 金應祚가 대행하게 되었다고 함에서 이른바 족징의 수단까지 이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박성신이 이미 군정의 수행에 익숙한 자였고 그 점이 유진장이 될 수 있었던 장점이기도 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일읍의 남정은 대부분이 봉기군으로 뽑히게 되었던 것이다.561)

 반면에 상인층은 봉기에서 행한 역할에 비하면 향권에서는 상대적으로 배제되고 있었다.562) 홍경래 난이 군현 단위의 국지성을 뛰어넘어 조직될 수 있었던 데에는 활동범위가 그에 상응하는 상인층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상업세력이 향권을 주도하는 것은 그 일의 성격상 어려웠다. 따라서 그 지역 사정을 잘아는 농업세력 즉 토호지주층이 향권을 장악, 주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기왕의 지방행정조직은 인적 교대없이 그대로 봉기군의 행정조직으로 이용되면서 향권을 장악해 나갔다. 수령권이 배제된 이외에 향촌사회의 지배질서 자체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 점은 홍경래 난이 반봉건성이란 계급대립의 측면보다는 지방행정권에 대한 대립이란 반정부적 차원에 머무르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빈농층의 계급적 요구는 적극적으로 표방되지 못하였던 것 같다. 이들 주도층은 어디까지나 향권 장악을 통하여 수령권을 배제함으로써 부민수탈의 원인적 요소를 제거하려는 데에 우선적인 목적을 두었을 뿐, 빈민층의 이익까지도 포괄하는 반봉건을 직접적 내용으로 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광범한 농민대중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지 못하였다. 이 점은 주도층의 계급적 속성이며 거기서 비롯되는 난의 한계였다.

 농민층의 참여는 기민구제, 관군의 초토전술과 향임층에 의한 강제동원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렇다 하더라도 물론 관에 대한 보편적 저항의식이 내재되어 있었던 점은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541)주도층의 개별적인 인물 분석은 吳洙彰, 앞의 글(1993), 239∼252쪽 참조.
542)≪巡撫營謄錄≫권 4, 임신 정월 9일.

≪陣中日記≫권 1, 임신 정월 9일, 260쪽.
543)≪陣中日記≫권 1, 신미 12월 18일, 132쪽.
544)≪陣中日記≫권 2, 임신 5월 18일, 728쪽.
545)≪陣中日記≫권 1, 신미 12월 18·19일, 131·143쪽.
546)鶴園裕, 앞의 글(≪傳統時代의 民衆運動≫, 257쪽) 참조.
547)≪巡撫營謄錄≫권 5, 임신 정월 21일.
548)≪陣中日記≫권 1, 신미 12월 18일, 132쪽.
549)홍희유, 앞의 글, 73쪽.
550)≪陣中日記≫권 2, 임신 4월 28일, 683쪽.
551)≪關西平亂錄≫1, 임신 3월 4일 金再堯供招·康守徵等供招 및 定州朴厚文供招.

≪關西辛未錄≫(≪韓國民衆運動史資料大系≫,<1811∼1812年의 農民戰爭篇 3>, 驪江出版社) 권 2, 安北縣 金銘意問目, 113쪽.
552)≪陣中日記≫권 1, 임신 정월 18일, 335쪽.
553)≪陣中日記≫권 2, 임신 3월 5일, 478쪽.
554)≪關西辛未錄≫권 2, 李夢石招辭, 99∼100쪽.

≪陣中日記≫권 1, 임신 정월 5일, 232쪽.
555)≪陣中日記≫권 1, 신미 12월 25∼26일, 172∼173쪽.
556)≪日省錄≫순조 11년 12월 22일.
557)≪日省錄≫순조 11년 12월 28일.
558)≪關西平亂錄≫1, 임신 3월 10일 定州朴厚文供招, 442∼444쪽.
559)鄭奭鍾, 앞의 글(≪傳統時代의 民衆運動≫), 312쪽.
560)≪陣中日記≫권 2, 임신 3월 5일, 490·494쪽.
561)≪陣中日記≫권 2, 임신 3월 5일 金京祚·金初益供辭, 498쪽.
562)홍희유, 앞의 글, 83∼97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