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조선 시대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Ⅲ. 19세기의 민중운동1. 서북지방의 민중항쟁3) 항쟁의 결과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1. 신분제의 이완과 민중사회의 성장
          • 1) 사족지배구조의 정착과 신분구조의 변화
          • 2) 17세기 위기 이후 대민 지배정책의 전환
            • (1) 국가의 대민 지배방식의 전환과 ‘여민휴식’정책의 철회
            • (2) 공동납체제로의 전환과 18∼19세기 호적 운영의 변화
          • 3) 사족지배질서의 동요와 민중의 성장
        • 2. 민중의 사회적 결속
          • 1) 공동체 질서와 민중
          • 2) 18세기 향촌공동체의 변화와 민중조직의 활성화
            • (1) 면리제의 강화와 민
            • (2) 동계의 변화와 분동
            • (3) 민중조직의 활성화
          • 3) 19세기 민중의 사회적 결속
            • (1) 향회의 활용
            • (2) 민중조직과 농민항쟁
        • 3. 민중운동의 사상적 기반
          • 1) 성리학에 대한 사상적 도전
            • (1) 성리학의 교조화
            • (2) 민중사상의 확산
          • 2) 민중운동의 사상적 특성
            • (1) 민중운동 속의 사상경향
            • (2) 민중사상 전파의 주체
            • (3) 정부의 대응책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1. 사회경제적 배경과 정치적 과제
          • 1) 민중세계의 각성
          • 2) 유대관계의 강화
          • 3) 향권의 추이
          • 4) 사회세력의 동향
        • 2. 유민과 명화적
          • 1) 유민
            • (1) 유민발생의 배경
            • (2) 유민의 실태와 유입처
            • (3) 정부의 유민대책
          • 2) 명화적
            • (1) 명화적 발생의 배경과 조직체계
            • (2) 활동양상과 그 성격
            • (3) 정부의 대책
        • 3. 여러 지역의 항쟁과 ‘무신란’
          • 1) 18세기 초 민중의 동향과 변산군도
          • 2) 무신란의 발단과 전개
            • (1) 18세기 초 정치정세와 ‘무신당’의 결성
            • (2) 무신당의 반정계획과 지방토호·녹림당의 가세
            • (3) 무신란의 전개와 향촌사회의 동향
            • (4) 무신란의 참가계층과 그 성격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1. 서북지방의 민중항쟁
          • 1) 사회경제적 특성과 항쟁의 배경
            • (1) 서북지방의 사회·경제적 특성
            • (2) 매향과 향권의 동향
            • (3) 중앙권력의 구조적 수탈
          • 2) 항쟁의 과정
            • (1) 서북민의 저항과 홍경래 난의 발발
            • (2) 홍경래 난의 전개과정
          • 3) 항쟁의 결과
            • (1) 홍경래 난 전후 향촌지배세력의 변동
            • (2) 반봉기군 ‘의병’의 향권 장악
            • (3) 서북민항쟁의 역사적 의의
        • 2. 삼남지방의 민중항쟁
          • 1) 사회경제적 배경과 정치적 여건
            • (1) 사회경제적 배경
            • (2) 정치적 여건과 지방사회의 운영
          • 2) 항쟁의 과정과 양상
            • (1) 항쟁의 발생 지역
            • (2) 항쟁의 직접적 계기
            • (3) 항쟁의 전개과정
            • (4) 항쟁의 참가층과 주도층
            • (5) 항쟁조직
            • (6) 요구조건
            • (7) 공격대상
          • 3) 정부의 대책과 항쟁의 의미
            • (1) 농민항쟁에 대한 정부의 대응
            • (2) 삼정에 대한 대책
            • (3) 이정책에 대한 반대 논의와 저항
            • (4) 농민항쟁의 평가
        • 3. 변란의 추이와 성격
          • 1) 변란과 민란
          • 2) 변란발생의 배경
            • (1) 사회적 모순의 심화와 ‘저항적 지식인’의 활동
            • (2) ‘양이’의 침공과 ‘이단사상’의 만연
          • 3) 변란의 추이
            • (1) 19세기 전반의 변란
            • (2) 해서, 영남세력의 변란
            • (3) 광양란
            • (4) 이필제란
            • (5) 기타
          • 4) 변란의 성격
            • (1) 변란의 조직과 운동구조
            • (2) 변란의 이념
            • (3) 변란과 19세기 후반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3) 서북민항쟁의 역사적 의의

 이상에서 홍경래 난을 전후한 서북지방, 그 중에서도 특히 평안도를 중심으로 한 사회사정을 검토하면서 서북지방 민중항쟁의 추이에 대하여 살펴 보았다.

 여기서는 서북민항쟁이 지니는 역사적 의의를 살필 차례이다. 이를 위해 먼저 항쟁의 배경, 특성을 알아보고 거기서 나타나는 한계와 동시에 의의를 찾아보고자 한다.

 18세기는 농업 생산력 증대,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신분제 동요 등의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라 중세사회가 해체되는 여러 모습들이 드러나고 동시에 자본주의적 관계가 발생하던 시기였다.

 일반적으로 상품화폐경제가 전체 사회로 확산되면 공동체적 기반이 흔들리게 되어 농민층 분해의 계기가 마련된다. 이러한 향촌사회의 분화과정 속에서 봉건모순은 심화되었다. 토지소유가 집중되면서 지주제는 강화되기도 하였다. 사족지배체제 아래에서는 지주-전호 간의 계급대립이 신분제를 매개로 하여 兩班士族 대 鄕村民 간의 대립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신분제가 동요하고 아울러 양반사족에 대한 官權의 우위가 점차 확고해져감에 따라 부세제도 운영을 둘러싸고 수령과 이서·향임층으로 이어지는 수탈층 대 농민을 주축으로 하는 피수탈층 간의 대립관계가 봉건모순을 총체적으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18세기 이래 관이 주도하여 향촌지배권을 장악하려는 일련의 시도는 19세기 세도정권 아래에서는 수령권을 매개로 한 부세수탈의 강화라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이 때 정립된 수령과 이서·향임층 중심의 향촌지배체제는 세도정권의 지원 아래 중층적 수탈체계를 이룸으로써 사회모순을 심화시켜 나갔다. 더욱이 발달된 화폐경제가 수탈의 수단으로 이용됨에 따라 수탈의 강도는 이전 시기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이것이 19세기 농민들의 항쟁을 유발시키는 근원이었다.

 이처럼 19세기는 사회모순이 깊어지면서 사회적 갈등도 심해져 갔다. 그러므로 사회를 구성하는 각 계급·계층들은 각자의 위치에 서서 사회모순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농민들은 다양한 저항을 통하여 스스로 각성하면서 봉건사회를 해체시켜 나갔다. 19세기 농민항쟁은 바로 이러한 조건 아래서 봉건적 사회관계를 변혁하려는 하층농민들의 반봉건항쟁으로 전개된 것이었다. 아울러 봉건사회모순의 담지자인 농민층이 그 모순을 해결하면서 스스로를 변혁주체세력으로 확립해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18세기에는 이러한 대립관계에서 비롯되는 갈등이 가시적인 행동으로 표출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먼저 농민층은 분해하고 있었지만 아직 재편방향이 뚜렷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대립하는 세력의 양편이 확연히 구분되지 않았고 개별적인 지위상승의 가능성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공동목표를 가지고 공동투쟁에 나설 수 있는 저항세력의 결집이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또 영·정조대 왕권강화에 기반한 개량화정책이 비교적 효율적으로 사회통합을 유지해낼 수 있었기 때문에 사회모순의 심화를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었다.

 따라서 아직까지는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저항에 그쳐, 유리·도망하거나 도적집단이 발생하는 등의 사회문제를 야기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오면 이전과는 달리 농민들의 직접적이고도 집단적인 봉기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세기의 농민봉기는 18세기 농민저항이 토대가 되어 일어날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저항이라는 공동경험의 결과, 농민들의 의식은 점차 성장해 갔다. 그리하여 농민들의 계급의식은 구체적인 저항을 거치면서 그들의 적이 누구인가를 규정함으로써 증오의 단계에 머무는 소극적 수준으로부터 자기들 스스로를 계급으로 결집하여 행동의 단계로 나아가는 적극적 수준으로 발전한다. 또한 농민들의 저항은 개인적·합법적 투쟁에서 점차 집단적·폭력적 투쟁으로 발전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이전의 운동에 비하면 많은 촌락을 포함하는 하나의 군현 전체가 연루되었고, 홍경래 난의 경우는 수개의 도가 연계되어 일어났다. 이처럼 홍경래 난은 단순한 계급적 저항으로부터 계급의식에 기초한 집단봉기로의 전환을 예고하는 의미있는 사건이었다.

 이 시기를 특징짓는 저항은 국가-농민의 대립을 주요모순으로 하여 일어난 항쟁들이었다. 이는 다시 ‘變亂’과 ‘民亂’의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581) 변란은 혁명가적 성격을 갖는 자들에 의해 주도되며, 혈연이나 친분 등과 같은 개별적 이해기반에 기초하여 조직되었다. 鄭鑑錄 등과 같은 이상주의적 혁명이념에 의해 지도되며 중앙권력의 쟁취를 목표로 내걸었다. 홍경래 난은 변란의 선구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전반기 作變들은 이를 모형으로 삼고 있었으며 그런 점에서 서북지방 출신들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홍경래 난은 농민저항의 성장 위에서 서북지방의 지역적 특성이 결합되어 일어났다. 홍경래를 비롯한 ‘저항 지식인’들과 壯士층이 봉기를 조직하고 이끌었다. 이들의 사회경제적 처지는 농민과 다를 바가 없었고 의식과 행동면에서 농민들과 강한 친화력을 가졌다. 또한 飢氓이라 불리던 빈민층의 자발적 참여는 이후 전개될 민란 단계에서 농민층의 적극적 참여를 예고하는 현상이었다. 장기간에 걸쳐 정주성에서 벌인 농민들의 치열한 투쟁은 농민들의 항쟁에 많은 기억을 남긴 소중한 경험이었다. 다만 농민 일반의 주체적 참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농민층 분해의 결과 대규모로 양산되고 있었던 빈농하층민들은 아직까지 독자적으로 반봉건항쟁을 일으킬 정도로 성장하지는 못하였다.

 홍경래 난은 봉건사회 내에서 새롭게 성장한 신흥 상공업세력과 기존 정치권력에서 배제된 몰락양반의 연합에 의해 추진된 반봉건투쟁이었다. 홍경래 난의 지도부는 자신들의 재력을 가지고 농민출신의 광산노동자를 끌어들이고 훈련시켜 독자적인 군대를 조직하여 ‘이씨왕조’를 타도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들 지도부는 아직까지 상당 부분 봉건적 색채를 띨 수밖에 없었다. 홍경래 난을 정치·군사적으로 조직하고 지도한 명실공히 최고지도자였던 홍경래는 가난한 농민의 처지에 있었으나, 그의 신분계급적 처지로 보아 정치적 이념에서는 평안도의 신흥지주나 상인들의 입장에 있었다. 우군칙과 김창시는 평안도의 지주 입장에 있었으며, 이희저는 부상대고로서 향임층이었다. 또 내응세력이나 유진장의 성격을 통해서 볼 때, 봉기군의 상층부는 鄕武 중에서 富戶層 즉 新鄕層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신흥 상공인세력과 함께 향촌사회 내의 재지중간층으로서 부농적 입장을 대변하였다.

 상품화폐경제의 농촌침투는 소수의 농민을 부농으로 성장시킨 반면, 대다수의 농민을 빈농으로 몰락시켰다. 봉건적 생산관계는 부르주아적 성장을 지향하는 부농층에게는 타도하지 않으면 안되는 질곡이었으며, 빈농에게도 최소한의 재생산기반을 확보하기 위해서 이 관계는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전반기 조선사회에서 부농층은 봉건권력의 강고한 탄압 속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는 계층이었다. 그들이 부를 축적하는 기반은 자본주의적 상품경제에 뿌리를 대고 있기는 하였지만, 봉건적 수탈관계에 편승한 부의 축적도 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반봉건투쟁은 봉건적 사회체제 전반에 대한 것이 아니라 부농에게 향해진 일부의 봉건적 수탈체제에 국한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주도한 홍경래 난에서는 봉건적 사회모순을 극복하려는 진보적 사회이념을 제시하지 못한 채, 봉건권력의 교체에 항쟁의 우선 목표를 두었다. 다시 말하면 홍경래 난의 지향점은 반봉건성이라는 계급대립의 측면보다는 지방행정권, 나아가 세도정권에 대한 저항이라는 반정부적 차원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반봉건항쟁으로서의 의미는 제한된 측면에서만 나타났다. 그래서 난의 와중에서 토지개혁, 신분제 폐지, 삼정개혁 등 빈농하층민을 위한 아무런 개혁조치도 취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난을 패배로 이끈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 한편 봉건사회모순을 서북민에 대한 정치적 차별로 왜소화시킴으로써 당시 봉건적 수탈에 허덕이고 있었던 삼남지역 농민들의 반봉건항쟁과 연대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봉쇄했다는 점도 난이 가진 한계라 할 수 있다. 다만 홍경래 난에는 신흥 상공업계층의 참여라는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생기적 현상도 내포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그 독특한 지위를 가지고 있음은 물론이다.

 홍경래 난은 이와 같은 한계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것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봉건제의 위기가 점차 심화되는 가운데서 봉건정부타도의 기치를 내걸고 4개월 동안 항쟁을 지속함으로써 봉건권력의 도덕성을 근저에서부터 부정하였다. 이는 그 후 반봉건항쟁의 도화선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또 핵심 주체세력의 역량이 당시 지배체제의 외부에서 자라나고 있었다는 점도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이 점은 사회변화의 보편적 양상이 항쟁의 구도에도 반영되고 있는 증거로 홍경래 난은 체제 내부의 갈등이 아니라 체제 변혁의 시발점이란 역사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582)

 홍경래 난이 지닌 보다 중요한 의의는 피지배층으로서 통치의 대상으로만 존재하였던 하층농민들이 봉건왕권과 지배체제를 부정할 수 있는 정치적 각성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농민들은 홍경래가 죽은 뒤에도 “정주성에서 죽은 홍경래는 가짜 홍경래이다. 진짜 홍경래는 살아있다”는 소문을 퍼뜨리면서, 언젠가 올 봉건정부타도와 사회변혁의 기회를 준비하였던 것이다.

 대중의 정치적 각성이야말로 농민항쟁의 수준을 결정적으로 높여 혁명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었다. 정치적 각성이란 계급의식의 성장을 뜻한다. 계급의식은 현실의 지배질서 자체에 대한 회의나 비판 또는 부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계급적 저항행위의 정당성, 나아가 승리에의 확신은 계급의식을 확산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었다.

 저항행위의 정당성, 승리에의 확신을 심어주는 역할은 鄭鑑錄이나 海島眞人說, 彌勒信仰 등이 맡았는데, 홍경래 난 이후에는 洪景來不死說이 강력한 대안으로 유행하였다. 홍경래불사설은 억압당하는 농민사회에서 스스로를 탈출시키기 위한 자기구제의 한 형태로 농민들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었다. 홍경래가 죽지 않았다는 믿음은, 정의는 가능하며 가난한 인간도 무기력하게 순종할 필요가 없다는 의식의 존재를 받쳐주었다. 특히 정감록을 이용하여 농민대중을 반봉건항쟁에 끌어들이려는 수법은 그 후 봉건정부를 타도하려는 각종 정치적 변란, 괘서, 흉서사건에 이용되었다.

 다만 이와 같은 것들은 농민들을 뭉치게 할 뿐이지 농민들을 조직화하는 것은 아니었다. 권력이전과 조직체계에 관한 이론까지를 제시해 주는 근대적 의미의 세속화된 혁명주의는 아니었기 때문에 이에 기초한 운동은 혁명단계로까지 직접 내달을 수는 없었다.583)

 홍경래 난에서 농민들은 아직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스스로의 힘만으로 강력하게 실현시킬 능력이 없었다. 홍경래 난 때의 수동적 농민들은 정주성 내에 고립되어 항전하는 가운데 오히려 계급적 경험을 공유하면서 능동성의 단초를 보였다. 즉 민중이 형성되어가는 초보적인 단계를 경험하였던 것이다.

 홍경래 난은 평안도 지방의 지역적 특성에 대한 고려가 없이는 올바른 이해가 어렵다. 평안도에는 일찍이 중앙정부의 차별로 인하여 사대부 즉 사족층의 형성이 어려웠다. 따라서 사족보다는 향인층이 향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중엽을 지나면 중국과의 무역이나 수공업, 광산경영 등을 통해 부를 축적한 세력들이 나타나 신향층을 이루면서 이들 신향층에 의한 향촌질서의 재편은 되돌릴 수 없는 추세가 되었다. 그러나 신향층의 경제적 상승을 전제로 한 신분상승 욕구는 수령의 부민에 대한 수탈행위로 왜곡되면서 수령권 대 부민층의 대립이라는 갈등구조를 낳았다. 이런 구도 속에서 부민층을 중심으로 한 서북민의 저항은 필연적이었다.

 1808년 함경도 단청과 북청의 작변, 1811년 황해도 곡산에서의 봉기에 이어서 그 해 12월 홍경래 난에서 수령권은 서북민 일반에 의한 거센 항쟁에 직면하였던 것이다. 순조 14년(1814)에 평안감사 정만석이 홍경래 난의 원인으로 부세문제 일반을 거론하면서 특히 軍政·田役·庫債 등을 시급한 것으로 들었다.584) 이는 홍경래 난의 원인이 수령권에 의한 부세수탈에 있었음을 지적한 것이었다.

 한편 홍경래 난은 동시에 수령권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던 중앙권력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였다. 홍경래 난에서 봉기군이 타도대상으로 당시 세도가였던 金祖淳과 朴宗慶을 지적하고 있었음은 그 점을 명백히 하여준다.585) 따라서 홍경래 난은 다분히 정변적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난이 실패로 끝남에 따라 이후 평안도 지역의 향촌사회 지배구조는 ‘의병’출신에 의하여 장악되었다. ‘의병’세력이 봉기군과 구별되는 점은 관권과의 결탁여부라고 할 때 이렇게 정립된 지배구조는 수령권과 유착관계를 이루었을 것이며 나아가 중앙권력으로부터 비호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정에서 ‘의병’세력이란 테두리 내에서 향권이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상업도 관권과의 결탁을 전제로 한 특권적 독점을 지향하는 상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수령권과의 결탁이란 측면은 순조 12년(1812) 이후 평안도지역에 자리잡은 ‘의병’세력 중심의 지배질서가 그보다 먼저 삼남 일대에 자리잡은 수령과 이·향 중심의 지배구조와 근본적으로 동일한 정치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양자 모두 국가-농민간의 모순을 부세수탈을 통해 심화시켜 나가고 있었다. 그에 따라 반봉건항쟁은 전국적으로 19세기 내내 끊임없이 발생하게 되었다.

<高錫珪>

581)‘변란’과 ‘민란’의 구분에 대하여는 고석규,<19세기 농민항쟁의 전개와 변혁주체의 성장>(≪1894년 농민전쟁연구 1≫, 1991), 332∼335쪽 참조.
582)吳洙彰,<洪景來亂 봉기군의 최고지휘부>(≪國史館論叢≫46, 1993), 260쪽.
583)고석규,<18·19세기 농민항쟁의 추이>(≪1894년 농민전쟁연구 2≫, 역사비평사, 1992), 24∼25쪽.
584)≪純祖實錄≫권 17, 순조 14년 2월 무오.
585)≪洪氏日記≫(≪韓國民衆運動史資料大系≫,<1811∼1812年의 農民戰爭篇 5>, 驪江出版社) 12월 30일 西賊檄文, 18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