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1. 개화사상의 형성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1. 19세기 중반기의 동아시아 정세
          • 1) 한·중·일의 정세
            • (1) 화이사상과 중국의 조공제도
            • (2) 조선왕조와 청조:청한 종속관계
            • (3) 조선왕조와 일본:‘교린’관계
            • (4) 화이질서하의 한국과 일본
          • 2) 서세 동점과 동아시아 제국
            • (1) 서방제국의 동방진출
            • (2)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동방진출
            • (3) 일항 무역:전통적 동서무역 제도
            • (4) 화란과 영국의 진출
            • (5) 중영 무역의 변천:차에서 아편으로
          • 3) 동서 신국제관계의 성립:불평등조약 체제
            • (1) 중영 아편무역 분쟁
            • (2) 중영 개전과 남경조약의 체결
            • (3) 애로우전쟁과 천진조약 및 북경협정
          • 4) 일본의 개항과 미국
        • 2. 구미 열강의 통상요구
          • 1) 러시아의 통상요구
          • 2) 프랑스의 통상요구
          • 3) 영국의 통상요구
          • 4) 미국의 통상요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1. 개화사상의 형성
          • 1) 개화사상의 형성과 배경
          • 2) 개화사상의 형성
          • 3) 1866년 개화사상 비조들의 활동
          • 4) 최초의 개화사상
        • 2. 동학의 창도와 동학사상
          • 1) 동학 창도의 배경
          • 2) 동학의 창도 과정
          • 3) 동학사상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1. 흥선대원군의 집권
        • 2. 대원군의 내정 개혁
          • 1) 대원군의 인재등용
          • 2) 서원 철폐와 경복궁 중건
          • 3) 재정, 군사제도의 개혁
          • 4) 민란 대책
        • 3. 대원군의 대외정책
          • 1) 러시아의 남하 방어책
          • 2) 천주교 탄압:병인사옥
          • 3) 병인양요와 대응책
          • 4) 신미양요와 대응책
          • 5) 대일 강경책
        • 4. 대원군 정치의 성격과 의의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1. 강화도조약과 개항
          • 1) 조약체결 전의 국내외정세
            • (1) 메이지유신과 일본의 조선정책
            • (2) 고종친정과 대외정책
          • 2) 강화도조약의 체결
            • (1) 운요호사건과 조선정부의 대응
            • (2) 조일수호조규의 내용과 성격
          • 3) 개항 이후 조선정부의 대내외정책
            • (1) 수신사파견과 개화정책의 모색
            • (2) 조일수호조규 부록 및 통상장정
        • 2. 개항 초기의 조청관계
          • 1) 청국 북양대신 이홍장의 서양 각국과의 수교권고
          • 2) 제2차 수신사의 파견과 주일청국사절의 연미론
        • 3. 조미조약의 체결
          • 1) 조·청·미 3국의 조미조약 체결 교섭과 속방조관
          • 2) 조미조약의 성립과 속방조회
        • 4. 유럽 각국과의 조약체결
          • 1) 한·영 수호통상조약의 체결
          • 2) 한·독 수호통상조약의 체결
          • 3) 한·러 수호통상조약의 체결
          • 4) 한·불 수호통상조약의 체결
          • 5) 기타 유럽국가들과의 조약체결
        • 5. 개항의 역사적 의의
          • 1) 강화도조약과 자본주의 세계체제
          • 2) 불평등조약체제의 수립과 그 영향
          • 3) 초기 개화정책의 추진배경과 그 성격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2) 개화사상의 형성

 한국의 개화사상은068) 조선왕조 후기의 實學사상을 계승하고 중국으로부터 구입해 온 新書 등을 도움으로 하여, 1853∼1860년대에 중인출신 선각적 지식인들과 양반출신 선각적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한국의 개화사상의 비조는 널리 아는 바와 같이 吳慶錫(1831∼1879)·劉鴻基(1831∼1884?)·朴珪壽(1807∼1876) 등이었다.069) 이 중에서 가장 먼저 개화사상을 형성한 선각자는 오경석이었다.

 亦梅 오경석은 8대를 역관을 지낸 중인 역관의 집안에서 1831년에 태어나, 16세 때인 헌종 12년(1846)에 譯科의 식년시에 漢學(중국어)으로 합격하였다. 그는 16세 때부터 중국어 통역관이 되어 司譯院에서 수습 통역관으로 사회활동을 시작하였다.070)

 오경석이 家塾에서 공부할 때 家學으로 학습한 것은 貞蕤 朴齊家(1750∼1805)의 실학이었다. 그는 박제가의 실학과 함께 그의 시문과 서화까지도 학습하였다. 현재 일부 남아 있는 오경석의 일부 장서에는 박제가의 문집인 ①≪貞蕤稿略≫(사본 1책), ②≪貞蕤稿略≫(淸版 1책), ③≪貞蕤詩抄≫(사본 1책), ④≪楚亭小稿≫(사본 1책)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 사본들은 오경석이 직접 자필로 정성스럽게 필사하면서 스스로 학습한 박제가의 저작들이었다. 특히 이 중에서≪정유고략≫은 청국에서 활자로 간행한 책을 다시 정성스럽게 친필로 필사한 것으로서, 그의 후손들이 증언하고 있는 바와 오경석의 가학은 박제가의 학문이었으며, 오경석이 박제가를 얼마나 열심히 사사했는가를 나타내 주고 있었다. 오경석이 남긴 장서 중에서 이처럼 정성들여 필사하고 있는 것은 정유 박제가와 藕船 李尙迪의 문집들 뿐이었다.

 오경석은 그의≪天竹齋箚錄≫에서 박제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朴楚亭 齊家는 일찍이 正祖에게 인정을 받아 別賚官이 되어 세 차례나 燕京에 가서 당시의 명사들과 교제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주고받은 시문들은 陳雲伯의≪畵林新詠≫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가 극단적이었다고 하는 것은 잘못 전해진 것이다. 楚亭은 일찍이 어떠한 사물에든지 點染되는 일이 없었다(吳慶錫,≪天竹齋箚錄≫;吳世昌,≪槿域書畵徵≫, 201쪽).

 박제가의 학문과 시문이 극단적이었다고 전하는 세평에 대하여, 오경석이 그것은 오해로 전해진 것이라고 자신있게 단정하고, 박제가는 어떠한 사물에든지 혹하여 물드는 일이 없었다고 자신있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그가 박제가의 학문을 깊이 연구했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이다.

 오경석이 또한 학습한 학문은 秋史 金正喜(1786∼1856)의 실사구시적 금석학이었다. 오경석은 김정희 금석학을 열심히 배우고 큰 영향을 받았다. 오경석의 저서인≪三韓金石錄≫의 맨 아래 수록되어 있는<高句麗故城刻子二種>중의 1종과<眞興王巡狩碑>는 바로 김정희가 발견한 것과 판독한 것을 오경석이 현지 답사하여 확인하고 수록한 것이었다. 오경석은 금석학과 실사구시의 방법론에서 김정희를 계승하고 있으며, 오경석의≪삼한금석록≫은 김정희의≪金石過眼錄≫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정희 서체와 서법에 대한 오경석의 상찬도 대단하여 그는 북경에서 중국의 금석학자들과 서화가들에게 김정희의 글씨폭을 빌려주고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071)

 또한 오경석이 직접 스승으로 모시고 학습한 것은 우선 이상적(1804∼1865)의 학문이었다. 이상적은 중인출신 역관으로서 오경석의 아버지의 친우였으며, 오경석을 직접 가르친 오경석의 스승이었다. 이상적은 역관의 서자로 태어나서 1825년 역과 식년시에 수석으로 합격한 수재였다.072) 그 후 이상적은 한역관으로서 12차례나 중국을 다녀왔으며, 국내에서는 추사 김정희에게 배우고 중국에서는 翁方綱·吳崇梁·劉喜海 등 금석학 및 서화의 대가들과 교유하면서 자기의 독자적 경지를 이룩한 대가였다. 그는 서필과 금석학에 일가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시문에도 매우 능하여 그의 시는 국왕 憲宗이 애송하였다. 이 때문에 이상적의 문집을 낼 때에 헌종이 그의 시를 애송했다고 해서≪思誦堂集≫이라고 이름하였다. 오경석은 이 문집을 중국에 가지고 갔으므로 그가 북경에서 교제한 친우들 사이에 널리 애독되었다.073) 이상적과 그의 스승 김정희와의 관계도 매우 두텁고 긴절한 것이어서, 예컨대 김정희의 유명한<歲寒圖>는 그가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을 때 이상적을 생각하며 그려보낸 것이었다.074)

 오경석은 이러한 이상적을 스승으로 하여 그로부터 중국어뿐만 아니라 금석학과 서화와 시문을 배웠다. 이에 오경석은 이상적의 지도로 어려서부터 금석과 서화에 일찍 개안하여 그의 학문을 형성, 발전시켰다. 그리고 오경석이 1853년 처음으로 북경에 갔을 때 처음부터 중국의 금석학과 서화의 대가들과 교유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스승 이상적의 소개와 닦아놓은 친교에 의거한 것이었다.

 여기서 오경석의 학문과 사상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국내의 두 개의 흐름이 뚜렷하게 부각됨을 볼 수 있다. 그 첫째는 北學派 實學者인 박제가의 학문의 영향이다. 둘째는 김정희→이상적의 實事求是的 金石學과 書畵學의 영향이다. 이 두 개의 흐름은 모두가 넓은 의미의 ‘實學’으로서, 오경석은 직접적으로 실학을 배우고 계승하여 그의 학문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오경석은 23세의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기인 1853년 4월에 중국어 통역관으로서 처음으로 중국의 수도 北京에 가서 이듬해 3월까지 거의 1년 가까이 체류하면서 중국이 위기에 처해 있음을 직접 관찰했고, 또 새로운 지식을 가진 중국의 동남지방 출신 청년선비들과 교유하여 견문이 더욱 넓어지고 사상에 큰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오경석은 다음과 같이 스스로 기록하였다.075)

癸丑年(1853)으로부터 甲寅年(1854)에 걸쳐서 비로소 燕京에 遠遊하게 되어 東南의 博雅之士들과 교제하고 見聞이 더욱 넓어졌다. 元·明 이래의 서화 百十品을 차츰 구득하게 되고 三代 秦·漢의 金石, 晋·唐의 碑版도 수백 종을 넘었다. … 내가 이들을 구득함이 모두 수십년의 오랜 시간이 걸렸고, 千萬里 밖의 것이라 心神을 大費하지 않고서는 가히 쉽게 얻을 수 없었다(≪天竹齋箚錄≫,≪槿域書畵徵≫, 251∼262쪽).

 오경석은 제1차로 북경에 간 1853년부터 금석과 서화를 구입하는 중에 중국 동남지방으로부터 과거를 보러 수도 북경에 올라와 체류하고 있는 다수의 청년 선비들을 사귀었다. 오경석은 그 후 1859년까지는 4차례 북경을 다녀왔고, 일생 동안에는 모두 13차례 북경에 다녀왔다. 초기에 오경석이 교제한 중국의 청년 선비들은 현재 그의 서한에 남아있고 인물만도 약 60여 명이 된다. 이 중에는 그후 오경석이 개화사상을 형성한 시기와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 洋務派 개혁론자가 된 程祖慶·阿秋濤·張之洞·潘曾綬·潘祖陰·吳鴻恩·孔憲彛·王軒·萬靑藜·顧肇熙·溫忠翰·周壽昌·謝維藩·王懿榮·吳大澂 등 다수의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회차 연도와 기간 正 使 副 使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853년 4월∼1854년 3월

1855년 10월∼1856년 3월

1856년 10월∼1857년 3월

1857년 10월∼1858년 3월

1860년 10월∼1861년 3월

1862년 10월∼1863년 4월

1863년 10월∼1864년 3월

1866년 5월∼1866년 10월

1868년윤4월∼1868년 8월

1869년 8월∼1869년 12월

1872년 7월∼1872년 12월

1873년 10월∼1873년 3월

1874년 10월∼1875년 3월
姜時永

趙得林

徐載淳

慶平君 李

申錫愚

李宜翼

趙然昌

柳厚祚

·

李承輔

朴珪壽

鄭健朝

李會正
李謙在

兪章瓊

任百經

任百經

徐衡淳

朴永輔

閔泳緯

徐堂輔

·


成彛鎬

洪遠植

沈履澤

<표 1>오경석의 북경행 일람표

 오경석은 이들과 토론하는 과정에서 중국이 당면한 위기의 심각성을 잘 이해하게 되었고, 이것이 곧 조선에도 닥쳐올 위기임을 명확히 인식하게 되었다. 이에 그는 중국의 동남방 출신 학자들이 서양 열강의 국정을 소개 해설하고 중국의 대응책을 논의한 새로 간행된 ‘新書’들을 북경에서 다수 구입하여 읽고 귀국할 때는 이를 국내로 반입하여 연구한 결과 1853∼1859년에 조선왕조 최초로 ‘開化思想’을 형성하게 되었다.

 오경석의 아들 오세창은 일찍이 다음과 같이 회고하여 기록하였다.

나의 아버지 吳慶錫은 한국의 譯官으로서 중국에 파견되는 동지사 및 기타의 使節의 통역으로서 자주 중국을 왕래하였다. 중국에 체제 중 世界各國의 角逐하는 상황을 見聞하고 크게 느낀 바 있었다. 뒤에 열국의 역사와 各國興亡史를 연구하여 自國政治의 부패와 세계의 대세에 失脚되고 있음을 깨닫고, 앞으로 언젠가는 비극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여 크게 개탄하는 바가 있었다. 이로써 중국에서 귀중할 때에 각종의 新書를 지참하였다. ….

아버지 吳慶錫이 중국으로부터 新思想을 품고 귀국하자, 평상시 가장 친교가 있는 우인 중에 大致 劉鴻基란 동지가 있었다. 그는 학식과 인격이 모두 고매 탁월하고 또한 교양이 심원한 인물이었다. 오경석은 중국에서 가져온 각종 신서를 동인에게 주어 연구를 권하였다. 그 뒤 두 사람은 사상적 同志로서 결합하여 서로 만나면 자국의 형세가 실로 風前의 燈火처럼 위태하다고 크게 탄식하고 언젠가는 一大革新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된다고 상의하였다.

어떤 날 劉大致가 오경석에게 우리 나라의 개혁은 어떻게 하면 성취할 수 있겠는가 하고 묻자, 吳는 먼저 동지를 北村(북촌이라고 하는 서울의 북부는 당시 상규계급의 거주구역임)의 양반자제 중에서 구하여 革新의 기운을 일으켜야 한다고 하였다(古筠紀念會,≪金玉均傳≫, 上卷, 東京, 1944, 48∼49쪽).

 여기서 문제를 분석적으로 명확히 하기 위하여 ① 오경석이 중국에 체재 중에 세계각국의 각축하는 상황을 견문하고 크게 느낀 바 있던 시기, ② 열국의 역사와 각국 흥망사를 연구하여 자기 나라 정치의 부패와 세계대세에 뒤떨어져 있음을 깨닫고 앞으로 언젠가 나라의 비극이 일어날 것이라고 개탄하여 오경석이 개화사상을 형성한 시기, ③ 중국에서 귀국할 때 각종의 新書를 구입하여 지참해 온 시기, ④ 오경석이 자기가 구입해 온 신서들을 가장 절친한 친우 유홍기에게 주어 연구를 권고한 시기, ⑤ 신서를 연구한 결과 유홍기도 개화사상을 형성한 시기, ⑥ 오경석과 유홍기가 개화사상의 동지로서 결합한 시기, ⑦ 우리 나라의 형세가 風前의 燈火와 같이 위태하게 되었다고 보고 일대혁신을 일으켜야 한다고 합의한 시기, ⑧ 우리 나라의 개혁을 성취하기 위해서 북촌의 양반자제 중에서 인재를 구하여 개화사상을 교육해서 혁신의 기운을 일으키기로 합의한 시기, ⑨ 그 결과 오경석과 유홍기가 북촌의 양반자제들인 김옥균·박영교 등과 접촉하게 된 시기 등을 나누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위의 기록 중에서 오경석의 개화사상의 형성 시기인 ①∼③은 1853∼1859년의 기간이었음이 명백하다. 오경석이 남긴 200여 통의 중국인과의 편지 속에는, 중국인 程祖慶이 오경석의 제1차 북경행 때(1853∼1854)에 오경석에게 보낸 편지가 1통 있는데, 이 편지에는 오경석이 書目을 만들어서 정조경으로부터≪潛硏堂全書≫등 다수의 책들과 금석문을 구입하고 있으며, 특히 地圖 2장을 모사하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다. 오경석은 1853년 제1차 북경행 때부터 책들을 구입하고 지도를 빌려 모사하는 등 신서 구입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오경석은 제1차 북경행 때인 1853년부터 구입한 신서를 북경의 숙소에서 읽으면서 그의 개화사상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오경석이 제1차로 북경에 가서 체류한 1853년의 중국의 형세는 위기로 충만되어 있었다. 이 때의 중국의 형편은 영국의 침략행위로 1840년 아편전쟁이 발발하여 청국은 2년간 분전했으나 패전하고 말아, 앞서 쓴 바와 같이 결국 1842년 8월 南京條約을 체결해서 막대한 배상금을 영국에 지급했을 뿐만 아니라, 홍콩(香港)을 영국에 할양해 주고 廣東·廈門·福州·寧波·上海의 5개 항구를 개항하여 영국의 자본주의 상품들을 물밀듯이 중국에 들여왔으며, 서양 열강들이 중국에서 각축하면서 본격적으로 침략을 감행한 때였다. 이에 대응하여 또한 1850년에는 洪秀全이 남방에서 무장 봉기하여 1851년에는 太平天國의 수립을 선포했으며, 청국 조정은 이의 ‘진압’을 위해서 영국군을 차병하여 불러 들여서, 오경석이 북경에 간 1853년에는 남방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때였다. 이에 중국의 선각적 인사들과 예민한 청년들 사이에는 위기의식이 팽배하게 되고, 서양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중국을 구하기 위하여 간행된 ‘신서’들이 읽혀지고 있던 시기였다.

 오경석은 1853년∼1858년 사이에 4차례나 북경을 다녀왔는데, 그 때마다 신서를 구입하여 추가하였다. 오경석이 1858년까지 구입한 신서로 현재 알려져 있거나 남아있는≪海國圖志≫는 서양열강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문제의식으로 영국을 비롯한 세계각국의 지리와 역사, 국방, 籌海, 병기와 전술을 설명한 책으로서, 영국을 중심으로 서양의 과학기술과 선거제도·정치제도 등도 소개한 책이었다.≪해국도지≫에는 50권으로 된 1844년판, 60권으로 된 1849년판, 100권으로 된 1852년판이 있었다.076)

 또한 姚滌山이 지은≪粵匪紀略≫은 1855년에 간행된 책으로서 1850년 홍수전이 무장봉기를 일으켜 태평천국을 선포했다가 ‘진압’될 때까지의 태평천국운동의 역사서이다. 현재에도 보관되어 있는 이 책을 오경석이 구입해 온 사실은 오경석이 당시의 중국이 처한 위기에 민감하게 큰 관심을 갖고 연구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서 명 저(편)자 간행연도 비 고·내 용
해국도지 魏源 1844 이 책의 刊本에는 세 가지가 있는바, 1844년판은 50권(古微堂活字印本), 1849년판은 60권(同重訂刊本), 1852년판은 100권으로서, 이 100卷本이 重刊定本이다. 그 내용은 洋夷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문제의식으로 세계각국의 地理와 歷史, 國防, 籌海, 兵器戰術을 설명한 것이며, 영국을 중심으로 서양의 과학기술과 선거제도 등도 소개되어 있다.
영환지략 徐繼畬 1850 10권으로 된 세계 각국의 지리서이다. 6대주별로 세계지리를 地圖로 설명하고, 서양 열강의 국가별 지도와 地志를 상세하게 해설하였다. 역시 洋吏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洋務 목적으로 편찬한 新書이다.
博物新編 (英)合信저

中國人譯
1855 上海의 海墨海書館에서 간행한 全3集의 서양 과학기술 해설서이다. 제1집에 ① 地氣論, ② 熱論(熱氣機關圖, 火輪船圖 등과 그 해설 포함), ③ 水質論, ④ 光論(현미경圖와 해설 포함), ⑤ 電氣論(각종 電氣機器圖와 그 해설 포함) 등을 비롯해서 제2집과 제3집에 서양자연과학의 부문별 해설이 수록되어 있다.
粤匪紀略 姚滌山 1855 1850년 廣西省 桂平縣 金田村에서 洪秀全이 중심이 되어 농민봉기를 일으켜서 太平天國을 선포했다가 ‘진압’될 때까지의 태평천국운동의 歷史書이다. 北京琉璃廠刊本이며, 현재도 葦倉文庫에 수장되어 있다.
北徼彙編 何秋濤 1858∼60 오경석의 친우 何秋濤가 1858년경에 저술한 中·露關係에 대한 地理와 歷史書로 처음에는 6권이었다. 오경석의 이 本의 일부를 밀사해 왔다. 何秋濤는 여기에 자료를 증보하여 80권으로 만들어 淸황제에게 보여서≪朔方備乘≫이라는 책명을 얻었다. 활자로 간행된 것은 그 아들의 요청에 의해 李鴻章의 지원으로 1881년에야 이루어졌다.
揚水機製造法 不明   풍력을 이용하여 강변에서 揚水하는 기계의 제조법을 圖解까지 넣으며 설명한 책이다. 오경석이 친필로 북경에서 필사해 온 책이다.
地理問答 서양인의

저서의 편역
1865 世界地理를 83회의 문답으로 해설한 책이다. ① 지구, ② 亞細亞各國志, ③ 中國各省圖說, ④ 歐羅巴各國志, ⑤ 亞非利加各國志, ⑥ 北亞美利駕各國志, ⑦ 北亞美利駕各國志, ⑧ 阿西亞尼西洲 群海島志 등으로 분류되어있다.
海國勝遊草 斌椿 1868 斌椿이 5개월간에 걸쳐 프랑스·영국 등 유럽 각국을 여행하면서 견문한 것을 기록한 見聞紀行書이다. 프랑스·영국·화란·스웨덴·덴마크·독일 등을 여행한 기록이다.
天外歸帆草 斌椿 1868 斌椿이 5개월간에 유럽여행을 마치고 3개월간에 걸쳐 귀국하면서 견문한 것을 詩와 紀行文으로 쓴 책이다.
中西見聞錄   1872∼74 北京의 京都施醫院에 고빙되어 있던 미국 宣敎醫師들이 서양의 자연과학, 기술, 역사, 정치, 경제, 문화 등을 중국인에게 소개하던 월간지이다. 영어명칭은 The Peking Magazine이다. 현재 1874년도분까지 葦倉文庫에 수장되어 있다.

<표 2>오경석이 중국에서 구입해 온 新書의 일부

 오경석은 박제가·김정희·이상적 등의 실학과 그가 중국 북경에서 체험한 견문과 위에서 든 新書들을 연구한 결과로 1853∼1859년의 시기에 한국 최초로 ‘개화사상’을 형성한 것이다.

 오경석이 그의 절친한 친우인 유홍기에게 신서들을 주어 연구를 권고한 결과 유흥기도 1860년∼1866년경에 개화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오경석은 1860년 10월 동지사 신석우 일행의 통역관으로서 제5차로 북경에 갔다가 이듬해 1861년 3월에 귀국하였다. 바로 중국에서는 그 직전인 이해 1860년 8월에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북경 점령사건’이 일어나고 청국 황제가 熱河로 피란한 형편이었으므로, 오경석은 영국·프랑스 연합군에 점령당한 직후의 북경의 참담한 실태에 대한 직접 관찰과 북경조약의 내용에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임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오경석은 이 때 북경을 향해 떠나기 직전이나 귀국 직후인 1860년∼1866년에 그동안 그가 중국으로부터 구입해온 신서들을 주면서 유홍기에게 나라를 구할 방책을 연구하라고 권고했을 것임을 추정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경석이 그의 개화사상을 피력하고 신서의 연구를 권고한 친구는 비단 유홍기만은 아니었다. 그의 친우들인 古籃 田琦, 大致 劉鴻基, 成安 金景遂, 小棠 金奭準, 夢人 丁學敎, 桐齋 安복, 吉雲 卞元圭, 菊人 李容肅, 南舟 高穎聞, 簫山 金景林 등은 모두 오경석의 심대한 영향을 받았다. 이들 중에는 후에 개화사상을 갖고 개화파가 된 인물들이 많았다.077) 그러나 그 중에서도 대치 유홍기가 가장 가까이서 개화사상의 동지가 되었다.

 대치 유홍기는 오경석과 동갑의 중인신분 출신이었다.078) 그의 집안은 원래 譯官 집안이었으나, 유홍기는 역관으로 나아가지 않고 의약을 업으로 하였다. 당시 한의약도 중인의 직종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大致선생은 원래 譯官의 집에 태어났으나, 醫를 業으로 하였고, 깊이 불교를 믿어 道는 높고 품성은 청백하였다. 학문으로서는 史學에 조예가 깊어 朝鮮古今의 역사에 통달하였다. 辯說은 유창하였고, 신체는 장대, 紅顔, 백발, 항상 생기에 넘쳐 있었다(≪金玉均傳≫상, 52쪽).

 유홍기는 오세창의 회고담에서도 “이 大致라는 사람은 학식과 인격이 모두 고매 탁월하였고 또한 교양이 심원한 인물이었다”079)고 말한 바와 같이 학식·품성·변설·신체 등 모든 면에서 탁월한 인물이었다. 유홍기는 오경석이 아들 오세창을 위해 가숙을 차렸을 때 오경석의 요청에 응하여 塾師가 되어 주었을 만큼 두 사람은 절친한 관계였다.080)

 이러한 유홍기가 오경석의 견문한 바와 그의 설명 및 그가 빌려준≪海國圖志≫와≪瀛環志略≫등을 비롯한 신서들을 읽고 개화사상을 갖게 되어 오경석과 사상적 동지로 결합하게 된 것이었다.

 瓛齋 朴珪壽는 조선후기 실학자 燕巖 朴趾源의 친손자로서 고위 양반신분 출신이었으나 그의 할아버지 박지원의 실학적 학통을 이어받아 일찍이 개화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다.081) 박규수가 개화사상을 형성하게 된 전기는 1860년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북경점령사건’에 큰 충격을 받은 조선 조정이 1861년 1월 위문사절단(慰問使)을 중국에 파견할 때에 副使로 임명되어 중국에 다녀오게 된 계기였다.

 박규수는 위문사절단의 부사로 갈 때 5가지 목적이 있었다고 그의 수제자 雲養 金允植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082)

① 조선과 청국의 오랜 우호관계에 비추어 청국이 衰할 때에도 환난을 함께 하는 위문의 뜻을 표시하기 위한 것. ② 조선과 중국은 이와 입술 관계의 나라이기 때문에 청국이 불행에 빠지는 것은 조선에도 幸이 아니므로 청국의 實情을 정확히 알아보기 위한 것. ③ 중국이 洋夷의 침략으로 이제 이미 패전한 이상 그 침략이 장차 조선에 미칠 것이므로 그에 대한 備禦之道를 수립하기 위하여 서양 열강의 힘의 虛實에 대한 偵探을 위한 것. ④ 청국이 곤란과 危亂을 만났을 때 조선이 信義를 지켜 厚義를 보임으로써 후일 청국이 회복했을 때 조선에 후의를 보내게 하기 위한 것. ⑤ 청국이 서양의 침략 앞에서 망해가는 것을 앞서 임의 경계해야 할 사례로 삼아 조선의 상하 모든 관료들이 서로 경계하게 하기 위한 것.

 또한 김윤식은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가 할아버지의 전통을 이어 받아 이 사명을 누구보다도 적절하게 잘 수행했다고 기록하였다.

 박규수가 개화사상을 형성한 것은 중국에 다녀오면서 직접 견문한 것과 중국에서 구입해온≪海國圖志≫·≪瀛環志略≫·≪中西見聞錄≫등을 비롯한 신서들을 읽고 난 직후라고 한다.

다만 후학 소생인 오인의 견해에 의하면 瓛齋가 근대 명재상이오 선각자임에 틀림없지마는, 그가 宇內大勢에 通曉하게 된 경로로 말하면 일찍이 그가 奉命使臣으로 燕京에 내왕하면서 얻은 見聞과 또는 거기서 사 가져온 泰西譯書에 의뢰한 바 크다 할 것이니 이것만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書籍으로부터 新知識을 얻게 된 것은 어느 때인지를 추찰할 길이 없으나 그가 몸소 燕京에 가서 見聞에 의하여 얻은 온 對外知識은 적이 짐작 못할 바 아니다(文一平,<瓛齋朴珪壽>,≪湖岩全集≫제3권, 1940, 82쪽).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박규수가 중국 북경에 다녀 온 것은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북경점령 사건’ 직후인 1861년과 ‘신미양요’ 직후인 1871년의 두 차례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박규수가 북경에서 몸소 견문하고 신서들을 구입해 와서 개화사상을 형성하게 된 계기가 1861년의 북경행 시기인가, 1871년의 북경행 시기인가의 두 견해가 나오게 되었다. 1871년의 북경행 시기로 보는 견해도 있기는 하다.083)

 그러나 1861년 박규수가 북경에 간 목적이 단순히 청국에 대한 위문에만 있지 않고 서양 열강의 침략 앞에 있는 청국의 실정을 ‘정탐’하고 ‘備禦之道’의 수립을 위한 자료의 수집에 더 큰 역점이 있었으므로, 이 때 신서들을 구입해 왔을 것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박규수의 개화사상의 형성 시기는 1861년 북경행 직후의 시기라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이를 증명해 주는 것은 다음에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그후 박규수가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한 직후 ‘제너널셔먼호사건’이 일어났을 때 박규수는 대동강에 가라앉은 제너럴 셔먼호 선체와 엔진을 끌어올려 서울로 보내서≪해국도지≫의 설명대로 증기선의 실험을 하도록 대원군에게 권고한 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1866년 이전에≪해국도지≫를 읽었던 것이다.

 또한 박규수는 오경석과도 1860년에 친교가 있었다. 박규수는 북경행(燕行)과 대대로 관련이 있는 北學派 실학자의 집안 출신이었으며, 오경석은 8대나 중국어 통역관을 지낸 중국통 역관 집안 출신이었다. 물론 나이 차이뿐만 아니라 당시의 양반신분제 사회에서 최고위 양반가문 출신 박규수와 중인 역관가문 출신의 오경석이 대등한 교제를 할 수도 없었겠지만, 당시 서울에서 몇 집안되지 않은 燕行通의 두 가문이 차별적 세교가 있었을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박규수 가문과 오경석 가문이 세교가 있었다는 후손의 증언뿐만 아니라, 이를 증명하는 박규수가 오경석에 보낸 편지가 1통 남아 있다.084) 이 편지에서 박규수는 편지를 보낸 일자를 ‘六日’이라고만 적고 있지만, 오경석을 正三品堂下官 이하의 인물에게 사용하는 ‘惠人’이란 예의상의 호칭을 쓰면서 매우 친밀한 안부와 중국인과의 관계에 대한 문의를 하고 있다. 그런데 오경석은 1869년 7월에 正三品堂上譯官이 되었으므로, 박규수가 오경석에게 보낸 이 편지는 1869년 7월 이전에 보내진 것이 분명하며, 1860년대에 박규수와 오경석이 친교가 있었음을 명백하게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오경석은 정례의 동지사의 역관으로 1860년 10월 서울을 출발하여 北京을 다녀 1861년 3월에 귀국하였고, 박규수는 그 보다 3개월 후인 1861년 1월 위문사의 부사로 서울을 출발하여 북경을 다녀 6월에 귀국했으므로, 두 개화사상의 비조가 동행하지는 못했지만 두 사람의 중국에서의 체류기간이 겹치는 3개월 동안에 북경에서 상봉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고 할 것이다.

 박규수가 일찍이 개화사상을 형성한 학문적 배경은 그의 조부인 연암 박지원의 실학에 있었다. 그 후의 자료이지만 신채호는 개화사상과 박지원의 실학사상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김옥균이 일찍이 우의정 朴珪壽를 방문한 즉, 박씨가 그 벽장 속에서 地球儀 1座를 내어 김씨에게 보이니, 該儀는 곧 朴씨의 조부 연암선생이 중국에 유람할 때에 사서 휴대하여 온 바더라(申采浩,<地動說의 效力>,≪改訂版丹齋申采浩全集≫下卷, 384쪽).

 초기개화파의 하나인 박영효는 그후 개화사상의 형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그 新思想은 내 일가 朴珪壽 집 사랑에서 나왔소. 김옥균·홍영식·서광범 그리고 내 백형(박영교)하고 재동 朴珪壽 집 사랑에 모였지요(李光洙,<朴泳孝氏를 만난 이야기>(≪東光≫2, 1931년 3월호).

‘燕巖集’의 귀족을 공격하는 글에서 평등사상을 얻었지요(李光洙,<朴泳孝氏를 만난 이야기>,≪東光≫2, 1931년 3월호).

 여기서 명백한 것은 한국의 개화사상은 1853∼59년에 오경석에 의하여 최초로 형성되었고, 뒤이어 유홍기와 박규수에 의하여 1860∼1866년에 형성되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한국의 개화사상은 1853∼1860년대에 오경석·유홍기·박규수 세 사람의 비조에 의하여 새로운 구국의 사상으로 형성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068)≪皇城新聞≫, 1898년 9월 23일자<論說>은 ‘開化’의 용어가 ‘開物成務 化民成俗’에서 취하여 조립한 용어이며, ‘사물의 이치를 지극히 연구하고 지극히 편리하게 하여 그 나라의 일을 時勢에 합당하도록 극진한데 나아가는 것’이라는 요지의 설명을 하였다. 여기서 역사적 개념으로서의 開化사상은 조선왕조 말기인 1853∼1860년대부터 형성되어 발전한 자주근대화·변혁·진보의 사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069)李光麟,<開化思想硏究>(≪韓國開化史硏究≫, 一潮閣, 1969), 19∼45쪽.

―――,<開化思想의 形成과 發展>(≪韓國史市民講座≫4, 1989) 참조.

姜在彦,≪朝鮮の開化思想≫(일본 岩波書店, 1980) 참조.
070)愼鏞廈,<吳慶錫의 開化思想과 開化活動>(≪歷史學報≫107, 1985;≪韓國近代社會思想史硏究≫, 一志社, 1987) 참조.
071)≪燕京書簡帖≫,<周棠의 亦梅 吳慶錫에게의 五月十七日字 書簡> 참조.
072)≪譯科榜目≫, 제2책, 道光乙酉式年條, 26쪽 참조.
073)≪燕京書簡帖≫,<吳鴻恩의 亦梅에게의 初六日字 書簡>·<李士棻의 亦梅에게의 二月三日字 書簡>참조.
074)吳慶錫의 아들 吳世昌은<歲寒圖>가 발견되자, 그 題跋文을 써서 이 그림에 첨부하고, 이 그림은 金正喜가 李尙迪에게 보낸 것임을 밝히면서, 두 사람의 두터운 情誼를 설명하였다.
075)여기서는 書畵 중심으로 설명되고 있으나, 그 밖에도 時務에 見聞이 더욱 넓어진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076)李光麟,<‘海國圖志’의 韓國傳來와 그 影響>(앞의 책), 2∼18쪽 참조.
077)愼鏞廈,<吳慶錫의 開化思想과 開化活動>참조.
078)李光麟,<숨은 開化思想家 劉大致>(≪開化黨硏究≫, 一潮閣, 1973), 67∼92쪽.
079)≪金玉均傳≫상, 49쪽.
080)<吳一龍씨와 吳一六씨의 증언>(1985년 4월 2일 및 4월 13일 녹취) 참조.
081)金泳鎬,<實學과 開化思想의 關係問題>(≪韓國史硏究≫8, 1972).

李完宰,<朴珪壽의 生涯와 思想>(≪史學論志≫3, 1975).

原田環,<朴珪壽の政治思想>(≪朝鮮學報≫86, 1978).

―――,<朴珪壽의 對日開國論>(≪人文學報≫46, 1979).
082)金允植,<奉送瓛齋朴先生珪壽赴熟河書>(≪雲養續集≫권 2), 3∼12쪽을 요약한 것임.
083)文一平,<瓛齋朴珪壽>(≪湖岩全集≫제3권, 1940), 82쪽.
084)<朴珪壽의 吳慶錫에게의 惠人 書簡>(≪吳一六씨 소장≫) 참조.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