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Ⅰ
19세기 중엽의 한국민족과 한국사회에는 서양열강의 도전으로 말미암아 조성된 민족적 위기와 전근대사회의 구조적 모순 및 가렴주구로 말미암아 조성된 체제적 위기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이를 적절하게 극복하여 민족과 나라의 자주독립과 발전방책을 추구한 선각적 지식인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은 조선과 중국의 이웃 관계를 이와 입술의 관계인 이른바 脣齒之間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脣亡齒寒이라는 표현과 같이 입술인 중국의 몰락은 이빨인 조선을 시리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으로부터 들려오는 소식은 날로 위기감을 가중시키는 것뿐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청국이 천진조약의 비준을 지연하자 1860년 영국과 프랑스의 동양함대가 연합하여 중국을 또 공격했는데, 1개월 만에 중국은 수도 북경을 점령당해 버리고 청국황제는 황망히 만리장성을 넘어 북으로 도망하여 熱河에 피난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동양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인 중국이 서양의 무력 앞에 힘없이 굴복하여 수도까지 점령당했다는 사실은 조만간 서양의 무력이 조선에도 닥쳐와 공격을 시작할 것임을 예고하는 것으로 선각적 조선 지식인들에게는 인식되었다. 그것은 만일 한국민족이 서양세력의 도전에 조선이 적절하게 응전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경우에는 열강의 강대한 침략의 힘에 의해서 나라가 식민지로 떨어지게 되는 ‘민족적 위기’로 조선 지식인들에게 인지된 것이었다.
19세기 중엽의 조선의 선각적 지식인들은 서양세력의 이 새로운 도전을 적절히 극복하고 민족적 위기를 타개하려면 종래와 같은 전근대적 응전의 방법으로는 불가능하고, 이번에는 새로운 응전의 방안을 고안해 내서 실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서양열강의 도전에 대한 응전의 사상으로 19세기 중엽에 조선민족의 지식인들이 만든 새로운 사상들을 크게 나누어 보면 開化思想·東學思想·衛正斥邪思想 등이었다.
Ⅱ
한국의 개화사상을 형성한 비조는 널리 알려진 대로 吳慶錫·劉鴻基·朴珪壽 등이었다. 이 중에서 가장 먼저 개화사상을 터득한 이는 오경석이었다. 오경석은 대대로 8대에 걸쳐 역관을 지낸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16세 때 譯科시험에 漢學(중국어)으로 합격하여 정식으로 중국어역관이 되었다.
오경석은 23세 때인 1853년(철종 4) 10월에 처음으로 조선왕조가 중국에 매년 파견하는 사행의 통역으로서 북경에 가게 되었다. 오경석은 이 때부터 이듬해까지 11개월간이나 북경에 체류하면서, 서양열강의 침투와 침략으로 말미암아 붕괴되어 가는 중국의 실상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중국이 당면하고 있는 위기가 곧 우리 나라에도 도래하여 민족적 위기를 조성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당시 중국에서는 서양열강의 침략과 그에 굴복한 청국조정에 반대가 일어났는데, 그 가운데 홍수전은 1850년 남방에서 무장봉기하여 1851년에 ‘태평천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청국조정은 이의 ‘진압’을 위해서 영국군을 차병하였고, 오경석이 북경에 간 1853년에는 남방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때였다.
이에 따라 중국의 선각적 인사들과 예민한 청년들 사이에서는 위기의식이 팽배하게 되고, 서양세력의 실상을 소개하면서 서양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중국을 구하기 위한 대책을 논의한 ‘新書’들이 간행되기 시작하였다. 오경석은 조선에도 닥쳐오는 ‘민족적 위기’를 예견하고 이에 대한 대책수립과 관련하여 제1차 북경여행 때부터 ‘신서’를 구입하여 북경의 객사에서도 읽고 귀국한 후에도 연구하여 개화사상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오경석은 1858년까지 네 차례나 북경을 다녀왔는데, 이 때마다 ‘신서’들을 구입하였다.≪海國圖志≫·≪瀛環志略≫·≪博物新編≫·≪월비기략≫·≪북요휘편≫등을 비롯한 다수의 신서들이 그것이었다. 오경석은 또한 북경에서 張之洞·吳大澂 등 자기 또래의 과거시험(진사시험) 보러 북경에 온 중국 동남지방 출신의 애국청년들과 널리 교제하여 자기의 견문을 넓히었다. 오경석은 안으로는 박제가 등의 실학을 계승하여 발전시키면서, 밖으로는 자신이 구입해 온 신서들을 연구하여 1853∼1859년의 기간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한국의 ‘개화사상’을 형성하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한국의 개화사상은 1853∼1859년에 오경석에 의하여 처음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오경석은 1860년 8월 영불동양함대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한 사건이 일어난 직후인 그 해 10월 정례적인 동지사의 역관으로 북경에 갔다가 이듬해 3월에 귀국하였다. 그러나 청국황제는 이미 열하에 피난중이었다. 중국은 1860년 10월에 굴욕적인 ‘북경조약’을 체결하여 겨우 영불연합군을 철수시켰지만 여전히 대혼란에 빠져 있었다. 오경석은 서양열강의 침략 앞에 무력하게 붕괴되어 가는 중국을 보고 거듭 큰 충격을 받았으며, 조선의 민족적 위기를 더욱 절감하게 되었다.
오경석은 귀국하자 그가 견문한 사실과 자기의 새로 형성한 개화사상을 친우인 유홍기에게 설명하면서 그가 그간 중국으로부터 구입해 온 ‘신서’들을 유홍기에게 빌려 주어 나라를 구할 방책을 연구하도록 요청하였다. 유홍기는 오경석의 견문한 것과 새 사상을 듣고 ‘신서’들을 연구한 결과 유홍기도 1861년경에 ‘개화사상’을 형성하여 갖게 되었다.
한편 박규수는 조선 후기 실학자 燕巖 朴趾源의 친손자로서 영불연합군의 북경점령사건에 대하여 조선조정이 1861년 1월 북경에 위문사절단을 파견할 때 부사로 임명되어 다녀오게 되었다. 박규수도 서양열강의 침략 아래 있는 북경에서 중국의 실상을 직접 관찰하고 큰 충격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그리하여 박규수도 귀국할 때는≪해국도지≫·≪영환지략≫등 신서들을 구입해 가지고 돌아왔다. 박규수도 이 신서들을 읽어 가며 1861년부터 스스로 ‘개화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세기 중엽인 1850∼1860년대 조선에서는 개화사상의 3비조인 오경석·유홍기·박규수 등에 의하여 마침내 개화사상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오경석과 유홍기는 1866년(고종 3) 제너럴 셔먼호사건과 ‘병인양요’에 큰 충격을 받아 조선의 민족적 위기가 더욱 급박하게 되었음을 판단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한 혁신정치의 주체세력을 형성하는 방안을 토론하였다. 오경석과 유홍기는 중인신분이었으므로, 당시의 양반신분제도 밑에서는 정치를 담당하거나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없는 신분이었다. 이에 오경석과 유홍기는 우선 정치담당 신분인 양반신분 중에서 서울 북촌(양반 거주지역)의 가장 영민한 양반자제들을 선발하여, 그들이 형성한 개화사상을 가르치고 발전시켜 정치세력으로서의 개화파를 형성하여 혁신의 기운을 일으키고, 그들로 하여금 혁신정치를 단행해서 나라를 구하게 하도록 합의하였다.그러나 오경석과 유홍기 등 중인신분으로서는 당시의 신분적 제약 때문에 양반출신 영민한 청년자제들을 선발하여 개화사상을 교육시킬 힘이 없었다. 이 방식에는 고위 양반출신의 개화사상 비조인 박규수의 힘과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박규수는 1866년 3월 평안도관찰사로 임명되어 평양에 부임해 있던 중에 그 해 8월 제너럴 셔먼호의 도발을 받고 이를 화공으로 격침시켰다. 박규수는 대동강에 가라앉은 제너럴 셔먼호의 엔진과 기선장치와 병기 등을 건져 올려 서울로 보내어 대원군으로 하여금 실험케 하였다. 박규수는 같은 해 9월 프랑스동양함대가 ‘병인양요’를 일으켜 강화도를 3개월간이나 점령하고 서울을 침공하려고 도전해 오자 민족적 위기를 더욱 급박하게 절감했지만 평안도 방어에만 전심전력했지 서울에서의 활동은 할 수 없었다.
박규수는 3년 후인 1869년 4월에 한성판윤으로 임명되어 평안도로부터 서울로 상경하였고, 6월에는 형조판서까지 겸직으로 임명되었다. 마침 오경석은 중국에 통역관으로 파견되었다가 1869년 12월 귀국하여, 유홍기와 같이 박규수를 방문해서 개화사상의 교육을 위한 방안을 제의하자, 박규수는 흔쾌히 받아들여 오경석·유홍기·박규수 등 개화사상의 비조 3인은 1869년 말에 완전히 동지로서 합류하게 되었고, 1870년 초부터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개화사상의 교육이 시작되었다.
박규수는 북촌의 양반자제들 중에서 영민하기로 평판이 있는 金玉均·朴泳敎·洪英植·兪吉濬·朴泳孝·徐光範 등을 일차로 발탁하여 개화사상을 교육시키게 되었다. 이웃에 거주했던 金弘集과 魚允中 등도 박규수의 사랑방을 출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규수의 개화사상의 교육은, ① 박규수·오경석·유홍기 등이 형성한 개화사상과 중국 등지에서의 견문, ②≪燕巖集≫을 비롯한 실학사상, ③ 오경석과 박규수 등이 중국에서 구입해 온 신서 등과, ④ 이에 비추어 본 국정논책 등이었다.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개화사상의 교육을 받은 김옥균 등 영민한 양반자제들은 그들도 한번 개화사상을 갖게 되자, 신분을 넘어서 유홍기·오경석의 직접적인 지도도 받고 그들이 가져온 신서들도 빌려 읽었다.
한국의 개화사상은 1853∼1860년대에 오경석·유홍기·박규수의 3비조에 의하여 형성되었고, 1870년 초부터 박규수·유홍기·오경석 등에 의하여 양반출신 영민한 자제들인 김옥균·박영교·김윤식·홍영식·유길준·박영효·서광범·김홍집·어윤중 등을 선발해서 박규수의 사랑방 등에서 개화사상을 교육함으로써 다음 세대에 확산되었다. 이어서 1874년부터 김옥균이 관계에 진출하게 되자 정치세력으로서의 초기 개화파를 형성하기 시작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Ⅲ
1876년 ‘조·일수호조규’에 의해 개항된 뒤 조선은 서양열강과의 통상교섭이 확대되고 열강의 도전이 증대되기 시작하자, 국내외 정세변화에 대처하여 본격적인 개화정책을 추진하려는 노력이 선각자들과 초기 개화파 관료들 사이에 나타났다. 그들은 서양열강의 도전에 대항하여 나라의 독립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하루속히 개화정책을 실시하여 자주부강한 조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또, 개항 이후의 정세변화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전통을 계승하면서 열강의 선진 과학기술을 배우고 제도개혁을 단행하여 부강한 근대국가 체제를 갖추는 것이 급선무임을 깨달았다.
초기 개화정책의 움직임은 1878년부터 현저히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열강의 약육강식의 정책 아래 늦게 출발한 개화정책은 수많은 시련에 부딪쳤지만, 우여곡절 속에서도 줄기차게 진전되어 많은 성과를 내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1880년 최초의 신식 정부기구로서 통리기무아문의 설치로부터 비롯하여, 1881년 신식 군대인 별기군의 창설 등으로 이어져 착착 단행되었다(본문 Ⅰ-1-3) 참조).
Ⅳ
국내 위정척사파로부터의 반발과 국외로부터의 열강의 압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880년대에 들어오면서 개화정책은 빠르게 진전되었다.
개화사상의 대두와 개화정책 시행에 강력히 반발한 것이 衛正斥邪사상과 운동이었다. 위정척사사상은 李恒老·奇正鎭·金平黙 등이 주도하여 이미 병인양요(1866) 시기에 정립되어 유생들 사이에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개항 후 김홍집이 1881년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올 때에 黃遵憲의≪朝鮮策略≫을 가져와서 이를 널리 배포하기 시작하자 유학자들이 선두에 서서 개화정책을 반대하고 성리학체제를 지키려는 위정척사운동을 맹렬히 전개하였다. 李晩孫을 선두로<영남만인소>가 정납되었으며, 전국 유림들이 개화정책을 비판하고 반대하였다.
1882년에는 구군대 급료지급의 부정으로 말미암아 일부 군인들이 ‘임오군란’을 일으켜 폭동군인들이 감옥에 있던 수백 명의 위정척사 유생들을 석방시킨 결과 대원군이 집권하여 반개화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임오군란이 일어나서 민비정권이 붕괴되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 민비 수구파는 청국에 구원을 요청하였으며, 청국은 이에 한림원학사 張佩綸의 ‘東征善後六策’이라는 건의안을 채택하여 이 기회에 군대를 파견해서 임오군란을 진압한 다음 조선을 실질적으로 ‘屬邦化’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청국은 3,000명의 군대를 조선에 파병하여 주둔시키고, 집권자이며 국왕의 아버지인 대원군을 청국 군함에 초청하여 놓고는 그대로 납치하여 청국에 실어다가 保定府에 유폐하여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청국은 대원군정권을 붕괴시킨 다음 민비정권을 세워 원상복구를 해 놓고서도 청군을 철수시키지 아니하고 장기 주둔시킨 채 이 무력을 배경으로 허구의 종주권을 주장하면서 조선 속방화를 위한 적극 간섭정책을 자행하고 조선의 자주독립권을 크게 침해하였다.
뿐만 아니라 청국과 청군은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의 개화정책과 개화운동이 궁극적으로 청국으로부터의 조선의 독립을 추구하는 것이라 보고 온갖 방법으로 개화당을 탄압하고 개화운동을 저지하였다. 청국은 조선내정에 깊숙이 간섭하면서 개화당을 정계에서 숙청하기 시작했으므로 김옥균 등 개화당의 정치적 지위는 매우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민비 수구파는 임오군란에 의하여 정권이 한번 붕괴되었다가 청국의 구원으로 재집권하게 되자, 청국의 조선 속방화정책에 순응하여, 나라의 독립이 크게 침해되고 자주근대화가 저지되는 것은 전혀 돌아보지 않고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하였다. 결국 갑신정변의 원인은 청국의 조선 자주독립의 침해와, 개화당의 자주근대화정책에 대한 청국 및 민비 수구파의 저지와 탄압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개화당은 청국의 조선 속방화정책과 개화정책 탄압에 대하여 단호하게 무장정변의 방법으로 대항해서 나라의 독립과 자주근대화를 달성하려 한 것이었다.
1882∼1884년 무렵의 조선의 사회정치세력은 대체로, ① 급진개화파(개화당), ② 온건개화파, ③ 민비수구파, ④ 대원군수구파, ⑤ 위정척사파 등 5대 세력으로 분화되어 있었다. 1884년의 갑신정변은 이 5대 사회정치세력 중에서 급진개화파와 친청사대적인 민비수구파 사이의 정치투쟁이었다.
Ⅴ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급진개화파)은 청군을 몰아내고 나라의 완전독립을 찾음과 동시에 먼저 정권을 장악하여 ‘위로부터의 대개혁’을 단행하기 위해서, 1883년 무장정변을 모색하며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1884년 봄부터 청국과 프랑스 사이에 안남문제를 둘러싸고 청불전쟁의 조짐이 짙어지자 청국은 1884년 4월 29일(양력 5월 23일)경 서울에 주둔시켰던 3,000명의 청군병력 중에서 1,500명을 안남전선으로 이동시킨 결과, 서울에는 1,500명만 남게 되었다. 뒤이어 1884년 8월에 청불전쟁이 발발하여 프랑스함대가 청군의 福建艦隊를 격파시켰고, 청군은 계속해서 패배하였다. 김옥균 등 개화당은 이 때가 정변을 일으킬 시기라고 판단하고, 1884년 음력 8월(양력 9월) 정변의 단행을 결정하였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는 청군이 안남전선에 묶여 조선에서 대규모 군사행동으로 전선 두 개를 동시에 만들 여력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김옥균 등 개화당의 정변 결정이 전적으로 개화당의 독자적 결정에 의하여 주체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개화당이 독자적으로 정변 단행의 결정을 내려 본격적 준비가 진행된 약 1개월여 후에 본국에 갔던 일본공사 다케조에(竹添進一郞)가 1884년 9월 12일(양력 10월 30일) 일본으로부터 서울로 귀임하여, 종전의 개화당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바꾸어 적극적 호의를 보이면서 접근해 왔다. 이에 김옥균 등 개화당은 부족한 무력을 보충하고 청군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측의 호응을 얻어 일본공사관 호위병인 일본군 150명을 정변에 끌어넣기로 하였다. 일본측은 그들의 공사관 병력 150명과 일화 300만 엔을 빌려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렇게 해서 일본군 150명이 정변의 무력준비에 추가되었다. 개화당은 일본군의 소임에 대해서 왕궁 호위와 청군에 대한 방비만을 분담하고, 국내 수구파 제거와 내정개혁에는 관여하지 않으며, 이것은 오직 개화당이 맡을 것을 요구하여 일본측의 동의를 얻었다.
개화당은 마침내 1884년 10월 17일 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던 우정국 낙성식의 축하연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켰다. 개화당은 우선 국왕과 왕비를 창덕궁으로부터 방어하기 좋은 景祐宮으로 옮기고 군사지휘권을 가진 수구파 거물 韓圭稷·尹泰駿·李祖淵 등을 국왕의 이름으로 불러들여 처단하였다. 개화당은 민비 수구파 거물인 閔台鎬·閔泳穆 등도 또한 국왕의 이름으로 불러들여 처단하고, 개화당의 배신자인 柳在賢도 처단하였다.
개화당은 뒤이어 곧바로 신정부수립에 착수하였다. 여러 단계의 인사발령이 있었으나, 최종적인 신정부의 각료는 영의정 李載元(국왕의 종형), 좌의정 홍영식, 전후영사 겸 좌포장 박영효, 좌우영사 겸 대리외무독판 및 우포장 서광범, 좌찬성 겸 우참찬 李載冕(대원군의 嗣子), 이조판서 겸 홍문관제학 申箕善, 예조판서 金允植, 병조판서 李載完(이재원의 아우), 형조판서 尹雄烈, 공조판서 洪淳馨(왕대비의 조카), 호조참판 김옥균, 병조참판 겸 정령관 서재필, 도승지 박영교 등이었다.
개화당의 소임 분담은 개화당 대표(좌의정)에 홍영식이 추대되고, 재정은 김옥균, 군사는 박영효와 서재필, 외교는 서광범, 국왕의 비서실장 책임은 박영교가 담당하도록 하였다. 물론 정변과 신정부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김옥균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결국 정변을 일으켜 신정부를 수립한 개화당은 그들의 새로운 개혁정치의 지침인 혁신정강을 제정·공포하였다. 혁신정강의 조항은 상당히 많아 일본인의 기록에는 80여 개 조항에 달했다고 하나, 현재 정확히 전해지고 있는 것은 14개 조항으로, 대원군을 가까운 시일내에 돌려보낼 것과 동시에 조공하는 허례를 폐지할 것 등이 김옥균의<갑신일록>에 수록되어 있다(본문 Ⅴ-3-4) 참조).
갑신정변의 혁신정강 14개조는 당시 개화당 신정부의 개혁정치의 의지와 기본내용을 집약적으로 보인 것이었다.
Ⅵ
국왕 고종이 혁신정강을 재결하고 대개혁정치 실시의 조서를 내린 10월 19일 오후 3시에 청군은 마침내 1,500명의 병력을 두 부대로 나누어 창덕궁의 돈화문과 선인문으로 각각 공격하여 들어왔다. 이에 대항하여 외위를 담당한 친군영 전후영의 조선군이 용감히 응전하였으나, 수십 명의 전사자를 내고 중과부적으로 패퇴하여 흩어져 버렸다. 다음은 중위를 담당한 일본군의 차례였으나, 그들은 제대로 전투도 하지 않고 철병하여 버렸다. 일본군은 그 이전부터 철병을 준비하고 있었다. 창덕궁의 넓은 지역에서 개화당의 50명 장사와 사관생도로 편성된 내위만으로는 정면에 부딪친 1,500명의 청군에 도저히 대항할 수 없어, 갑신정변은 청군의 무력공격에 패배함으로써 붕괴되고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으며, 개화당의 집권은 ‘3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이에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변수와 일부 사관생도 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하고, 홍영식·박영교와 사관생도 7명은 고종을 호위하여 청군에 넘겨준 후 피살되었다. 그 뒤 국내에 남은 개화당들은 민비 수구파에 의하여 철저히 색출되어 수십 명이 피살되고 개화당은 몰락하였다.
갑신정변의 실패 원인으로는, ① 청군의 불법적 범궐과 군사적 공격, ② 개화당의 일본군 借兵의 실책과 일본군의 배신적 철병, ③ 개화정책을 지지할 사회계층으로서의 시민층의 미성숙, ④ 민중의 지지 결여, ⑤ 개화당의 민비와 청군의 연락에 대한 감시 소홀과 정변수행 기술의 미숙 등을 들 수 있다. 갑신정변은 이처럼 실패한 운동임에도 불구하고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그 실패를 애석해 하는 이유가, 그것이 한국근대사에서 처음으로 자주부강한 근대국가를 건설하려는 과감한 운동이었으며, 갑신정변의 신정부가 최초의 근대적 정권이었고, 그들의 혁신정강의 개혁 구상과 정책이 열강의 침략 속에서 나라를 구할 수 있는 ‘大更張改革’ 구상과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갑신정변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회사적 의의는 큰 것이었다.
첫째, 갑신정변은 세계사적으로 한국민족이 개혁을 단행하기에는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적극적으로 중세국가체제를 청산하고 자주부강한 근대국가를 건설하려 한 첫 번째 큰 자주근대화운동이었다.
둘째, 갑신정변은 한국근대사에서 개화운동의 방향을 정립해 주었다. 갑신정변이 추구한 자주부강한 근대국가와 시민사회, 자본주의경제와 근대문화, 그리고 자주국방의 건설은 그 이후의 모든 개화운동이 계승하여 추구한 것이었다. 10년 후의 갑오개혁은 갑신정변의 개혁안을 다른 상황에서 실현한 것이었다. 이 점에서 갑신정변은 개화사상과 개화운동의 발전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셋째, 갑신정변은 한국의 반침략 독립운동에도 하나의 기원을 정립한 것이었다. 갑신정변의 독립운동은 당시 중국의 대조선 속방화정책에 대한 과감한 응전의 형태를 가진 것이었지만, 이 운동의 내부 성격은 모든 외세의 침략에 대한 저항과 독립의 추구가 본질을 이루고 있었다. 박은식이 그의 고전적 저서≪韓國獨立運動之血史≫의 제1장을 ‘갑신독립당의 혁명실패’로부터 시작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넷째, 갑신정변은 한국 근대민족주의의 형성과 발전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 운동이었다. 한국근대사에서 모든 민족주의운동은 갑신정변을 계승하여 그것을 반성하고 발전시키고 있다. 그 후의 독립협회·만민공동회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은 직접적으로 갑신정변을 성찰하면서 계승하고 발전시킨 운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갑신정변 실패의 영향으로 국내에서는 민비 수구파정권이 재수립되었으며 개화당은 몰락하여 가혹하게 숙청당하였다. 그 결과 1885년부터는 일시 개화정책이 부진하게 되었다. 또 그 뒷처리로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한성조약’, 청국과 일본사이에는 ‘천진조약’이 체결되었다.
<愼鏞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