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1. 개화파의 형성과 활동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1. 개화파의 형성과 활동
          • 1) 개화파의 형성
          • 2) 개화파의 분화
          • 3) 개화파의 활동
            • (1) 통리기무아문의 설치(1880)
            • (2) 일본국정시찰단(신사유람단)의 파견(1881)
            • (3) 영선사(병기학습 유학생사절단)파견(1881)
            • (4) 신식 육군(별기군)의 창설(1881)
            • (5) 기무처의 설치(1882)
            • (6) 감생청의 설치(1882)
            • (7) 대외적 균세정책의 실시(1882)
            • (8) 해관의 설치(1882∼1883)
            • (9) 근대학교의 설립(1883)
            • (10) 근대신문의 발간(1883)
            • (11) 근대적 산업시설의 대두와 고취
        • 2. 개화사상의 발전
          • 1) 동도서기론의 대두
          • 2) 온건개화파의 개화사상
          • 3) 급진개화파의 개화사상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1. 개화정책의 추진세력
          • 1) 고종의 개화의지
          • 2) 개화파의 형성과 활동
          • 3) 개화추진세력의 분화
        • 2. 신문명의 도입
          • 1) 일본시찰단의 파견
            • (1) 파견계획의 수립
            • (2) 고종의 밀명
            • (3) 어떤 인물들인가
            • (4) 일본시찰 활동
            • (5) 일본견문 보고서
            • (6) 일본을 보는 두 개의 눈-엇갈리는 진단과 평가
          • 2) 청국유학생(영선사)의 파견
            • (1) 사행의 교섭
            • (2) 사행준비와 출발
            • (3) 학습상황
            • (4) 유학생의 철수
          • 3) 미국시찰단의 파견
            • (1) 조미조약의 체결
            • (2) 조선보빙사의 미국파견 및 일정
            • (3) 조선보빙사 파견의 성과
        • 3. 제도의 개혁
          • 1) 정치·군사부문
            • (1) 정부기구의 개편
            • (2) 군사제도의 개혁
          • 2) 경제부문
            • (1) 농업기술의 도입과 상업적 농업의 진흥
            • (2) 상업의 보호와 수세정책
            • (3) 전환국의 설립과 신식 화폐주조
          • 3) 문화·교육·사회부문
            • (1) 박문국의 설치와≪한성순보≫·≪한성주보≫의 간행
            • (2) 서구식 근대교육의 수용
            • (3) 근대적 우정·전신·전기시설
            • (4) 근대 의료시설
      • Ⅲ. 위정척사운동
        • 1. 위정척사사상의 대두
          • 1) 위정척사사상의 대두
          • 2) 위정척사사상의 보급
            • (1) 위정척사사상의 정립
            • (2) 위정척사사상의 심화와 확산
        • 2. 위정척사운동의 전개
          • 1) 병자년의 위정척사운동
          • 2) 신사년의 위정척사운동과 척사·개화논쟁
        • 3. 위정척사운동의 영향과 의의
          • 1) 위정척사운동의 영향
          • 2) 위정척사운동의 의미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1. 임오군란
          • 1) 임오군란의 배경
            • (1) 서울의 사회경제 구조와 하층민
            • (2) 하급 군병의 성격과 군제개편
            • (3) 하층민의 저항운동
          • 2) 임오군란의 전개과정
            • (1) 운동의 발생과 확산
            • (2) 정치적 차원에서의 운동의 실현
            • (3) 외세의 개입과 운동의 좌절
          • 3) 임오군란의 영향
            • (1) 일본의 국내 사정과 대조선정책의 변화
            • (2) 청의 대조선정책의 변화와 영향력 확대
            • (3) 국내 상황의 변화
          • 4) 임오군란의 구조와 성격
            • (1) 참가층의 구성과 동원조직
            • (2) 공격 목표와 요구의 한계
            • (3) 정부 및 지배층의 대응
        • 2. 조선중국상민수륙무역장정과 조·청관계의 변질
          • 1) 조선정부의 대청통상정책
          • 2) 조선중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과 조·청관계의 변질
            • (1) 조·청통상협의
            • (2)<조선중국상민수륙무역장정>체결과 조·청관계의 변질
      • Ⅴ. 갑신정변
        • 1. 갑신정변의 배경
          • 1) 구미열강과의 외교
          • 2) 차관교섭
          • 3) 집권파와의 대립과 위기의식
        • 2. 갑신정변의 주도세력
          • 1) 정변의 핵심세력
          • 2) 정변의 행동대원
        • 3. 갑신정변의 전개
          • 1) 정변 주도세력의 목표
          • 2) 갑신정변의 준비
            • (1) 개화당의 정변 무력문제
            • (2) 정변 단행의 결정
            • (3) 북청군대의 상경과 일부 유경
            • (4) 일본공사관 호위용 일본군의 차병
            • (5) 국왕의 밀칙 획득
            • (6) 행동계획의 최종 정리
          • 3) 개화정권의 수립
            • (1) 1884년 10월 17일 밤의 거사
            • (2) 신정부의 수립
            • (3) 개화파 신정부의 혁신정강 공포
          • 4) 청국 및 일본의 개입과 정변의 실패
          • 5) 갑신정변 실패의 요인
        • 4. 갑신정변의 영향과 의의
          • 1) 갑신정변의 영향
            • (1) 수구파정권의 재수립
            • (2) 개화당의 몰락과 숙청
            • (3) 조선·일본의 교섭과<한성조약>의 체결
            • (4) 청국·일본의 교섭과<천진조약>의 체결
          • 2) 갑신정변의 역사적 의의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1. 개화파의 형성과 활동

1) 개화파의 형성

조선왕조에서는 19세기 중엽 서양세력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조성된 민족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사상의 하나로 개화사상이 吳慶錫(1831∼1879), 劉鴻基(1831∼1884?), 朴珪壽(1807∼1876) 등 3인의 비조에 의하여 1853년∼1860년대에 형성되었다.

1866년(고종 3)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병인양요’의 큰 충격을 받고 개화사상의 3인의 비조는 개화사상을 실천하여 나라를 크게 개혁해서 구해 낼 혁신적 정치세력인 개화파를 형성시키고자 하였다.001) 오경석의 아들 吳世昌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여 기록하였다.

나의 아버지 오경석은 조선의 譯官으로서 당시 조선으로부터 중국에 파견되는 冬至使 및 기타의 사절의 통역으로 자주 중국을 왕래하였다. 중국에 체재 중 세계 각국의 각축하는 상황을 견문하고 크게 느낀 바 있었다. 뒤에 列國의 역사와 각국 흥망사를 연구하여 자기 나라 정치의 부패와 세계 대세에 실각되고 있음을 깨닫고, 앞으로 언젠가는 반드시 비극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여 크게 개탄하는 바가 있었다. 이로써 중국에서 귀국할 때에 각종의 新書를 지참하였다…평상시 가장 친교가 있는 友人 중에 大致 劉鴻基라는 동지가 있었다. 그는 학식과 인격이 모두 고매 탁월하고 또한 교양이 심원한 인물이었다. 오경석은 중국에서 가져온 각종 新書를 그에게 주어 연구를 권하였다. 그 뒤 두 사람은 사상적 동지로서 결합하여 서로 만나면 나라의 형세가 실로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하다고 크게 탄식하고 언젠가는 일대 혁신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상의하였다. 어떤 날 劉大致가 오경석에게 ‘우리 나라의 개혁은 어떻게 하면 성취할 수 있겠는가’ 하고 묻자, 후자는, ‘먼저 동지를 北村(서울의 북부 당시 상류계급의 거주구역)의 양반자제 중에서 구하여 혁신의 기운을 일으켜야 한다’고 하였다(古筠紀念會 編,≪金玉均傳≫ 상, 慶應出版社, 1944, 48∼49쪽).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은 풍전등화같이 위태한 형세에 있는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일대 혁신을 일으킬 수 있는 동지들로서 서울 북촌의 양반자제들 중에서 영민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개화사상을 전파 교육해서 혁신적 정치세력을 형성한 시기가 언제인가의 문제이다.

오경석과 유홍기는 中人신분의 역관과 한약사이었으므로, 당시의 양반신분사회에서는 북촌의 영민한 양반자제들을 선발하여 교육시킬 수 있는 사회신분이 아니었다. 개화사상의 세 비조 중에서 양반신분은 박규수뿐이었다. 박규수는 실학자 燕巖 朴趾源의 친손자로서 그가 조부의 실학을 계승하여 개화사상을 형성한 무렵에는 그는 이미 고관대작의 지위에 있었다. 그러므로 박규수는 북촌의 영민한 양반자제들을 자유롭게 선발하여 개화사상을 교육시킬 수 있었다.

박규수는 1866년 음력 2월 4일 평안도관찰사로 임명되어,002) 3월 22일 서울을 출발하여 평양에 부임해서,003) 7월 19일(양력 8월 28일) ‘제너럴 셔먼호’의 도발을 받고, 이를 7월 23일(양력 9월 1일) 火攻으로 격침시켰다.004) 박규수가 평안도관찰사의 임기를 끝내고 藝文館提學의 발령을 받은 것은 약 3년 후인 1869년 4월 3일이었다.005) 박규수는 상경하자 바로 4월 23일자로 한성판윤에 임명되었고,006) 뒤이어 6월 15일자로 형조판서에 겸임으로 임명되었다.007) 이 때 박규수의 집은 북촌의 齋洞에 있었다.008)

한편 오경석은 1866년에는 프랑스 동양함대의 침공설로 말미암아 그 해 5월에 중국에 파견되어 10월에 귀국하였다.009) 또한 1869년에는 오경석은 열 번째로 또 중국에 파견되어 12월에 귀국하였다.010)

그러므로 오경석·유홍기를 하나로 하고 박규수를 다른 하나로 하여 형성된 한국의 개화사상의 3비조가 합류한 시점은 1869년이라고 볼 수 있다. 북촌의 영민한 양반자제들을 선발하여 개화사상을 교육해서 개화파 혁신세력을 형성하려는 전략을 일찍이 합의하여 갖고 있던 오경석과 유홍기가 ‘제너럴 셔먼호사건’을 처리하고 1869년에 서울의 관직에 임명받아 귀경한 박규수를 방문하여 서양세력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조성된 나라의 위기를 논의했을 것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뿐만 아니라 오경석의 후손들이 증언하는 바와 같이 북학파인 박규수 가문과 8대나 대대로 중국어 통역관인 오경석의 가문은 대를 이은 교제가 있었다. 또한 박규수가 오경석에 보낸 날짜가 적혀 있지 않은 편지 한 통이 남아 있는 바, 박규수는 이 편지에서 오경석을 정3품 당하관 이하의 관인에게 쓰이던 ‘혜인’이라는 예의상의 호칭을 사용하면서 매우 친밀한 안부와 중국인 관계의 문의를 하고 있는데, 오경석은 1869년 7월에 정3품 堂上譯官이 되었으므로 1869년 이전에 박규수와 오경석이 신분은 다르지만 친밀한 교제가 있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011)

요컨대 오경석·유홍기·박규수는 1869년 말에 완전히 합류하였고, 박규수가 북촌의 양반자제들 중에서 영민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1870년 초 전후하여 개화사상의 교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물론 박규수의 사랑방에 학숙을 차린 것은 아니었고, 북촌의 영민한 양반자제들이 집단으로 또는 개인으로 박규수의 사랑방을 정기적으로 또는 부정기적으로 방문하여 박규수의 지도를 받은 것이었다. 박규수의 가르침을 받아 개화사상을 형성한 대표적 인물로는 우선 金玉均·洪英植·朴泳敎·朴泳孝·徐光範 등이 있었다. 박영효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그 新思想은 내 일가 朴珪壽 집 사랑에서 나왔소. 金玉均·洪英植·徐光範 그리고 내 백형(朴泳敎를 가리킴)하고 齋洞 朴珪壽 집 사랑에 모였지요…≪燕巖集≫의 귀족을 공격하는 글에서 평등사상을 얻었지요(李光洙,<朴泳孝씨를 만난 이야기>,≪東光≫, 1931년 3월호).

신채호도 박규수가 그의 집에서 김옥균에게 실학을 계승하여 개화사상을 교육한 사례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金玉均이 일찍이 우의정 朴珪壽를 방문한즉, 박씨가 벽장 속에서 地球儀 1座를 내어 김씨에게 보이니, 그 지구의는 곧 박씨의 조부 燕巖선생이 중국에 유람할 때에 사서 휴대하여 온 바더라. 박씨가 지구의를 한 번 돌리더니 김씨를 돌아보며 웃어 가로되,

‘오늘에 중국이 어디 있느냐. 저리 돌리면 미국이 중국이 되며, 이리 돌리면 朝鮮이 中國이 되어, 어느 나라든지 한 가운데로 돌리면 중국이 되나니, 오늘에 어디 정한 중국이 있느냐’ 하니,

김씨 이 때 開化를 주장하여 新書籍도 좀 보았으나, 매양 수백년래 流傳된 사상, 곧 대지 중앙에 있는 나라는 중국이요, 동서남북에 있는 나라는 四夷니 사이는 중국을 높이는 것이 옳다 하는 사상에 속박되어 국가독립을 부를 일은 꿈도 꾸지 못하였다가 박씨의 말에 크게 깨닫고 무릎을 치고 일어났더라. 이 끝에 甲申政變이 폭발되었더라(申采浩,<地動說의 效力>,≪改訂版 丹齋申采浩全集≫ 하, 1987, 384쪽).

金允植도 김옥균과 함께 박규수의 문하에서 개화사상을 공부하였다. 김윤식은 자기가 김옥균과 함께 박규수의 제자임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① 처음에 古愚(김옥균)는 瓛齋(박규수)선생 문하에서 배워 宇內의 대세를 대개 깨닫고 일찍이 동지들과 더불어 국사를 근심하고 개탄했다(金允植,≪續陰晴史≫ 하, 국사편찬위원회판, 577쪽).

② 옛날에 朴瓛齋(珪壽)께서 丙寅洋擾의 때를 당하여 사람들이 모두 西學에 물드는 것을 우려하였는데, 瓛齋만이 홀로 말하기를, ‘어찌 우리 道가 서양에 적셔 들어가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가. 이 말이 거의 장차 증명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金允植,≪續陰晴史≫하, 125쪽).

兪吉濬(榘堂)도 박규수의 가르침을 받아 박규수가 준≪海國圖志≫등을 읽고 개화사상을 갖게 되었으며 개화파가 되었다. 김윤식은 유길준도 김윤식과 함께 박규수로부터 개화사상을 배웠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兪榘堂(길준)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다박머리 유소년 때에도 말하는 바가 속되지 않았다. 朴瓛齋(박규수)선생이 이 때에 그를 보고 그 國器임을 알아 크게 칭찬했으며, 魏黙深(魏源)이 지은≪海國圖志≫를 주며 가로되, ‘이 시기에는 外洋의 외국일들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우리들은 이로써 더욱 스스로 분발하였다(金允植,<榘堂詩鈔序>,≪兪吉濬全書≫5권, 일조각판, 161쪽).

金弘集은 북촌 재동 박규수의 이웃집에 거주했는데, 그의 또래 영민한 양반출신 청년들이 출입하는 박규수의 사랑방에 김홍집도 방문하면서 공부했으리라는 것은 추정하기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즉 박규수는 자기의 사랑방에서 뒤에 한국 근대 개화파 거물들이 된 김옥균·김윤식·박영교·박영효·홍영식·서광범·유길준·김홍집 등에게 개화사상을 교육하여 개화세력을 양성한 것이었다.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개화사상을 학습한 청소년들은 처음에는 중인출신 오경석과 유홍기에게서 직접 배우려 하지 않았지만, 일단 개화사상이 형성되어 사회신분제의 부당성을 깨닫고 신분 장벽을 극복할 수 있게 되자, 오경석과 유홍기로부터도 때때로 직접 개화사상을 배우게 되었다. 오세창은 유홍기와 김옥균이 서로 만나 알게 된 것은 김옥균이 20세 때였으며, 이 때부터 유홍기로부터 배우게 되었다고 다음과 같이 회고하여 기록하였다.

劉大致가 金玉均과 서로 안 것은 김옥균이 20세 전후의 무렵이다. 김옥균은 유대치로부터 新思想을 배웠으며, 일면에는 세간의 교유을 널리 구하고, 또 壯年科擧에 응하여 문과에 등제하고 官場에 올랐으며, 새로이 官途에 나아가자 동지를 구하는데 급급하게 노력하였다(≪金玉均傳≫ 상, 50쪽).

김옥균이 20세 때는 1870년이다. 즉 1870년 전후에 김옥균 등 박규수 사랑방에서 개화사상을 공부하는 양반자제들은 유홍기·오경석으로부터도 개화사상을 배우게 된 것이었다.

박규수·유홍기·오경석 등이 김옥균 등 영민한 양반자제들에게 개화사상을 교육할 때의 지적 자료들은 ① 오경석·유홍기·박규수 등이 형성한 최초의 개화사상, ② 燕巖 朴趾源·楚亭 朴齊家 등 북학파의 실학사상과 그 밖에 다른 실학자들의 실학사상, ③ 오경석과 박규수 등이 중국으로부터 구입해 온≪海國圖志≫·≪瀛環志略≫등을 비롯한 각종 신서들이었다.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그리고 유홍기와 오경석 등으로부터 개화사상을 배우고 발전시킨 김옥균 등 청년들은 언제부터 정치세력으로서의 ‘開化派’를 형성했는가. 김옥균은 갑신정변(1884)의 10년 전부터 자기의 정치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하였다.

궁녀 모씨는 나이는 42세이고, 신체가 튼튼하고 커서 남자 이상의 膂力을 가져 보통 남자 5·6인을 당할 수 있다. 평상시에 顧大嫂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곤전의 近侍로 뽑혀 있는 분인데, 벌써 10년 전부터 我黨(우리 당)을 따라서 때로 密事를 통고해 주는 사람이다(金玉均,<甲申日錄>, 1884년 12월 1일,≪金玉均全集≫, 아세아문화사판, 73쪽).

김옥균이 스스로 1884년 10년 전에 이미 ‘우리 당(我黨)’에 비밀스런 일을 알려주던 궁녀의 일을 기록하고 있으니, 김옥균에 의하면 ‘개화파’가 적어도 1874년에는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또한 오경석의 아들 오세창은 김옥균의 정치세력 형성에 대하여, “김옥균은…일면에는 세간의 교유를 널리 구하고, 또 장년 과거에 응하여 문과에 급제하고 官場에 올랐으며, 새로이 官途에 나아가자 동지를 구하는데 급급하게 노력하였다”012)고 회고하여 기록하였다. 즉 김옥균이 동지를 모으는데 적극적 활동을 한 것은 그가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간 때부터라는 것이다.

김옥균은 22세 때인 1872년 2월 4일에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였고,013) 24세 때인 1874년 2월 24일에는 弘文館校理에 임명되었다.014) 오세창이 증언한 바 김옥균이 문과에 급제한 후 官途(홍문관 교리)에 나아가자 동지를 모으는 일에 급급했다는 해인 1874년과, 앞서 김옥균이 기록한 바 궁녀 顧大嫂가 ‘我黨(우리 당)’에 비밀스러운 일을 통보해 주었다는 해인 1874년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김옥균의 관직 경력을 보면, 1874년 2월 24일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다가 같은 해 12월 3일에는 도리어 홍문관 부교리로 좌천되었다.015) 그 후 김옥균은 약 8년을 부교리로서 더 이상 승진을 못한 채 같은 지위에 있다가,016) 제1차 渡日 이후인 1882년 9월 22일에야 비로소 승정원 우부승지로 승진하였다.017) 김옥균이 홍문관 교리와 부교리로 재직하던 시기가 김옥균이 동지들을 급급하게 구하여 개화파를 형성하는데 정력적으로 활동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개화파 형성의 기점을 이상과 같이 1874년으로 볼 수 있지만, 때로는 1879년을 기점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018) 그러나 명백한 논증자료가 있는 이상 1874년설을 취함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019)

개화파는 1874년경에 형성되기 시작했으나,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체결과 개항 때에는 개화파 요인들은 아직 어린 청년들이어서 정치적 활동을 통해 영향을 끼칠 처지가 못되었다. 1876년의 조·일수호조규체결 때에는 개화파의 스승인 박규수가 우의정을 역임한 판중추부사로서, 역시 개화파의 스승인 오경석이 問情官으로서 활동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1876년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되고 부산(1876)·원산(1880)·인천(1883)의 3항이 연이어 개항되자 조선왕조의 민비정권은 세계의 정세와 대외통상을 아는 새로운 관료들을 긴급히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그리고 오경석·유홍기 등으로부터 개화사상의 교육을 받은 김옥균·김윤식·박영교·박영효·홍영식·서광범·김홍집·유길준 등 최초의 개화파들이 정부조직에 진출하여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국왕과 다른 고위 관료들을 움직여 가면서 초기 개화정책을 추진했을 뿐 아니라 다른 신진관료들과 청년들에게 개화사상을 전파하면서 적극적으로 개화파를 형성 확대시켜 나갔다. 특히 김옥균은 이 시기에 개화사상 전파와 동지 규합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에 개화사상의 3비조 중에서 박규수는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가 체결된 병자년 12월 27일(양력 1877년 2월 9일) 별세하였으므로 개항 후의 개화파의 확대에는 별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또한 오경석은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할 때 과로한 결과 1876년 4월 중풍으로 쓰러져 반신불수의 상태로 병석에 누웠으며, 1879년 8월 22일(양력 10월 7일) 49세를 일기로 역시 별세하였으므로, 개항 후의 개화파의 확대에는 오경석 역시 큰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오직 유홍기만이 건강하게 정력적 활동을 계속했으므로, 김옥균 등이 중심이 된 개화파의 세력형성과 확대에는 유홍기가 스승으로서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일찍이 최남선은 개화파 형성과 유홍기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런데 吳慶錫이 朝官을 유도하여 외교를 운용할 때에, 一白衣로 市井에 隱伏하여≪海國圖志≫·≪瀛環志略≫등으로써 세계의 사정을 卜察하면서 뜻을 내정의 국면 전환에 두고 가만히 귀족 중의 英俊을 규합하여 방략을 가르치고 志氣를 고무하여 준 이가 있으니, 당시 아는 이들 사이에 白衣政丞의 이름을 얻은 劉大致가 그라. 朴泳孝·金玉均·洪英植·徐光範과, 귀족 아닌 이로 白春培·鄭秉夏 등은 다 大致 문하의 俊髦로…박영효·김옥균 등이 연래로 일본교섭의 선두에 선 것은 실상 大致의 指劃 중에서 나온 것이요, 세상이 開化黨으로 지목하는 이는 대개 大致의 門人을 이름하였다(崔南善,≪古事通≫, 1943, 218쪽).

여기서 후에 중요한 개화파 인사로 활동한 白春培·鄭秉夏 등이 유홍기의 영향으로 개화파에 참가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능화는 유홍기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인물로서 김옥균·서광범·박영효를 비롯하여 李淙遠·李鼎煥·朴齊絅·吳慶潤·吳慶林·金永漢·金永汶·韓世鎭·李熙穆 등을 들었다.020) 이들은 유홍기로부터 불교사상만 배운 것이 아니라 개화사상의 영향도 받아 개화파의 일부를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유홍기의 영향을 받은 불교승려로서는 李東仁·卓挺埴 등이 일찍이 개화사상을 배워 개화파에 가담하였다.

김옥균의 활동에 의하여 개화사상을 갖게 되고 개화파의 일원이 된 인사로는 왕족으로서 李載兢(영의정 李最應의 아들)·李獻愚 등이 있었고, 그 밖에 무인으로서 柳赫魯와 柳相五 부자, 중인출신으로서 邊樹(燧), 吳鑑·朴永昌·吳世昌 등이 있었다. 尹雄烈과 尹致昊 부자도 개화파에 가담하였다.

김옥균은 또한 군인 장교들도 개화파에 포섭하였는 바, 일찍이 申福模·李殷乭(李銀石) 등의 외국에서 사관교육을 받은 장교들이 개화파에 가담하였다. 김옥균은 후에 14명의 사관생도들을 선발하여 일본 陸軍戶山學校에 유학시켰는데, 徐載弼·鄭蘭敎·朴應學·鄭行徵·林殷明·申重模·尹泳觀·李圭完·河應善·李秉虎·申應熙·李建英·鄭鍾振·白樂雲 등 사관생도들이 개화파가 되었다. 이들 사관생도들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일본에 유학하여 양잠학과 영어를 공부하고 돌아온 徐載昌, 의학(우두)을 공부하고 돌아온 南興喆, 승려였다가 환속하여 김옥균을 수행해서 일본에 다녀온 車弘植도 개화파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021)

김옥균은 궁궐 안에도 개화파를 심기 시작하였다. 그는 환관 柳載(在)賢을 개화파로 포섭하였으며,022) 顧大嫂라는 별명을 가진 궁녀는 일찍이 개화파에 가담하여 1874년경부터 김옥균 등에게 궁중의 중요한 정보들을 알려주었다.023) 고대수의 본명은 갑신정변 뒤에 희생되었다는 李禹石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024)

김옥균은 특히 武弁들 중에서 유능한 인물들에게 개화사상을 교화시키고 개화파에 참가시켰다. 姜瑋와 윤웅렬이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025) 신복모·이은돌 등이 일찍이 개화파가 된 것도 김옥균의 영향이었다. 김옥균은 친군영 전영의 군인 장교들도 비밀리에 개화파에 가담시켰는데, 尹景完·李應浩·閔昌洙·全興龍·金昌基·崔聖郁 등이 그 대표적 장교들이었다.

김옥균은 또한 하인들 중에서도 능력 있는 자들에게 개화사상을 교육하여 개화파에 참가시켰다. 金奉均·高興宗·李占乭·李允相 등이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었다.

김옥균은 이와 같이 신분·계급·지위·종교를 초월하여 개화파 형성에 진력한 결과 1874∼1878년 사이에 개화파는 상당한 세력으로 확립되었다. 그리하여 정치세력으로서의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는 1878년경에는 활발한 정치활동을 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일찍이 갑신정변과 김옥균을 연구한 민태원은 오늘날 우리가 갖지 못한 다수의 자료들과 생존자들의 증언을 채록하여 검토한 후에, 개화파 형성의 시기는 밝히지 않으면서도 김옥균 등 개화파가 1878년(戊寅)에 개혁단행의 ‘제1차 구체적 계획’이 있었다가 뜻하지 않은 중요 동지의 사망으로 계획을 중지했었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이와 같이 남 모르는 목적을 품은 그(김옥균-인용자)는 우선 교제를 널리하여 有爲한 동지를 구하였으니, 錦陵尉 朴泳孝, 徐光範, 柳相五 등은 실로 동지 중의 동지였으며, 더욱이 駙馬 금릉위가 참가한 것은 밖으로 세인의 신망을 더하고 안으로 宮中府中의 연락이 편리하게 되어 무엇보다도 유리한 조건으로 볼 수 있었다.

그네들 중에 구체적 계획이 있은 것은 이로부터(갑신정변으로부터-인용자) 7년 전 되는 戊寅의 해였으나, 마침 중요 동지의 사망으로 제1계획은 土崩瓦解에 돌아가고 이래 3년간에 하염없는 세월을 보내던 金·朴·徐 3인은 우선 외국에 유람하여 세계대세와 문물제도를 살필 필요가 있음을 생각하고 같이 일본에 도항하기를 결정하였으나, 박영효는 사정이 있어 이를 중지하였고, 김씨 홀로 인천을 출발하여 일본을 향하게 되니 때는 辛巳 12월이었다(閔泰瑗,≪甲申政變과 金玉均≫, 1925 또는 1947, 37∼38쪽).

민태원의 기록과 같이 1878년에 개혁단행의 제1차 계획을 실천하려다가 중요 동지의 사망으로 그것을 중단했다면 개화파는 이미 1878년 이전에 확고하게 형성되었기에 1878년에는 정치개혁의 제1차 계획을 실천하려고 추구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가 1878년부터 이동인을 일본에 파견하려고 노력하다가 1879년에 마침내 이동인을 일본에 보낸 사실에서도 개화파는 1878년 이전에 이미 형성되었음을 방증해 준다.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의 東本願寺 일본승려 오쿠무라(奧村圓心)는 1878년에 이동인을 처음 만났고,026) 1879년에는 이동인과 함께 일본에 건너갔었는데, 그 때 그의 일기에서 김옥균·박영효 등을 ‘韓國改革黨’이라 기록하고, 이동인을 ‘革命黨’ 박영효·김옥균의 동지라고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東仁은 원래 승려일지라도 평상시 愛國護法의 神經家로서 최근 조선국의 국운이 날로 쇠폐하고 종교는 이미 땅에 떨어졌다고 하다. 이 때 革命黨 朴泳孝·金玉均 등은 국가의 쇠운을 분개하고 크게 쇄신하려고 하다. 또한 東仁도 의견이 竹節하였으므로 朴泳孝·金玉均 양씨가 東仁을 引見하고 중용하기에 이르다. 그러므로 列國의 公法 등을 알기 위하여 我宗門에 歸入하여 일본에 도항하려고 하다. 東仁은 박영효가 준 純金의 丸棒 4본(길이 2촌, 둘레 1촌 여의 물건)을 나에게 보이고 이것을 路費로 하여 도항한다고 말하다. 그러므로 和田씨 및 총영사관 前田獻吉씨에게 計하여 本山에 보내기로 하다. 이것은 즉 韓國改革黨이 일본에 도항하는 시작이다(奧村圓心,≪朝鮮布敎日誌≫, 1879).

일본승려 오쿠무라(奧村)가 1878년의 일기에서 이동인을 처음 만났다고 하고, 1879년의 일기에서 이동인을 한국개혁당 또는 혁명당의 김옥균·박영효의 동지라고 기록한 것은 조선 개화파가 1878년에는 확고하게 형성되어 동지의 해외파견 활동까지 추진했었음을 잘 알려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과거에 일본학계에서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조선 개화당의 형성은 김옥균의 1881년 음력 12월(양력 1882년 2월) 제1차 일본방문 때 일본 개명파 후쿠자와(福澤諭吉)의 영향을 받고 돌아간 직후라고 보아 온 것은 전혀 사실과 일치하지 않은 천만부당한 억설인 것이다.027)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결사로서의 조선 개화파는 이미 1874년∼1878년경에 확고하게 형성되어 동지의 해와파견까지 적극 추진한 것이었다. 김옥균·박영효에 의해 1879년에 일본에 파견된 개화승 이동인은 일본에서 각국 공사관의 외교관들과도 접촉하면서 ‘일본국정시찰단(신사유람단)’의 파견계획까지 추진하였다.028) 이것이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의 활동의 일환이었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동인이 1881년에 암살당하자 일본의≪朝野新聞≫은 김옥균의 제1차 도일 이전인 1881년 양력 5월 6일자에<朝鮮開化黨을 위하여 암살된 李東仁>이라는 제목 아래 이에 대한 장문의 해설을 게재하였다.029)

또한 일본국정시찰단(신사유람단)이 조선조정으로부터 일본에 파견되어 부산을 출발하자 일본의≪東京日日新聞≫은 김옥균의 제1차 도일 이전인 1881년 5월 7일자에서<(조선)開化黨員 50명은 日本漫遊>라고 보도하였다.030) 또한 조선의 일본국정시찰단이 일본에 도착하여 활동을 시작하자 일본의≪조야신문≫은 김옥균의 제1차 도일 이전인 1881년 5월 20일자에<朝鮮國朝士 日本硏究에 渡來―開進·守舊의 吳越同舟―>라는 표제로 일본국정시찰단 중의 개화당 魚允中과 수구당 인사 사이의 논쟁을 보도하였다.031) 일본측은 1878년경에 조선에서 개화파의 형성이 확고히 되었고, 1881년에 들어서자 조선의 개화파와 수구파 사이에 갈등과 논쟁이 있었을 정도로 개화파의 성장이 있었음을 이 때에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개화파의 영수격인 김옥균은 개화파가 추진한 일본국정시찰단이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귀국하자 그 자신이 직접 일본의 근대화 진행과정을 시찰할 필요를 절감하고 1881년 음력 12월(양력 1882년 2월) 제1차 일본방문 길에 올라 부산을 출발하였다. 이 때 부산의 일본거류민 신문인≪朝鮮新報≫는 1882년 양력 3월 15일자에<金玉均 왕명을 받아 日本에>라는 제목 밑에 ‘朝鮮의 開化黨의 유명한 金玉均씨는 왕명을 받들고 我國(일본-인용자)에 渡航’032)하려 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김옥균이 아직 최초로 일본에 도착하기도 전에 ‘조선의 개화당의 유명한 김옥균씨’라고 하여, 조선 개화당이 김옥균 도일 후에 후쿠자와를 만나 영향을 받고 나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이전에 형성되었음을 명료하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김옥균이 나가사키(長崎)에 도착하자 일본의≪동경일일신문≫은 1882년 양력 4월 13일자에서<朝鮮開化黨 首領 金玉均 來遊―≪朝鮮新報≫의 기사에 신경을 날카롭게 하다―>라는 제목을 달아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이전에 우리 지상에 보도한 바와 같이 朝鮮開化黨의 領首인 金玉均씨는 日本遊歷을 하려고 요사이 長崎에 도착하여 아직 同港에 체류중이다. 원래 同氏는 우리 무역상회의 甲斐軍次씨와 동행하여 도항했으나, 甲斐씨는 어떤 지급한 볼일이 있어서 부산으로 가고 볼일을 끝낸 다음에 또 長崎에 귀항하게 되면 그 때에는 다시 金玉均과 일당의 柳五衛씨도 동행할 것 같은데, 이 양씨의 도항의 일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소문이 있다. 이미 지난 일자 발행의≪朝鮮新報≫등에는 右兩氏의 일본행은 전적으로 國王의 內命을 받들어서 國債募集을 위함이다라고 게재되었다. 양씨는 이 신문을 보고 크게 놀라서 당혹한 모습으로 다음과 같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였다. 금일 우리들의 일본행은 결코 官用의 義를 띤 것이 아님은 우리 조정의 실정을 보아도 명료한 것인데, 어떻게 하여 이러한 訛言이 전해졌는가. 그렇지 않아도 우리 반대당은 이것저것 誣說을 지어내고 여러 가지 疑念을 품어서 우리들에게 대항하려고 하는 勢에 있는데, 이제 이 신문이 한번 그들의 눈에 띄어 우리들의 일본행은 이러한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들이 歸韓의 後에 어떠한 變事가 몸에 미칠지 알 수 없다. 원래 우리의 此行은 一은 반대당의 氣焰을 피하고, 一은 일본 近事의 內情을 시찰하여 향후 隣交內地의 참고에 충당하려는 의도 외에 없는 것이다라고 하여 심하게 同新聞의 誤傳에 迷惑하고 있다더라(≪東京日日新聞≫, 1882년 4월 13일, 朝鮮開化黨首領 金玉均來遊-≪朝鮮新報≫の記事に神經を尖らす-;≪新聞集成明治編年史≫5권, 62쪽).

위의 자료들에서 명백히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조선의 개화파 형성은 김옥균의 제1차 도일시기 이전에 이미 확고하게 이루어진 것이었다 사실이 그러했기 때문에 정작 김옥균이 제1차로 일본에 건너갈 때에는 당시 일본의 중요한 중앙지들이 김옥균을 ‘朝鮮開化黨의 首領’이라고 보도하고, 조선 개화당의 유명한 김옥균씨가 일본을 방문한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한 것이었다. 아직 조선에서 개화파가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김옥균이 제1차로 일본에 건너가 일본 개명파의 거두 후쿠자와를 만나 그로부터 배워서 그 후 개화사상과 개화파를 형성했다고 가정하면 김옥균이 제1차로 일본에 건너가 도착하기도 전에 ‘조선 개화당 수령’ 김옥균씨가 일본에 온다고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김옥균이 제1차로 도일하여 후쿠자와를 만난 후 조선 개화파가 형성되었다는 과거 일본학계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억설인 것이다.

요컨대 조선의 개화파는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여 주로 유홍기의 지도를 받으면서 1874년∼1878년경에 확고하게 형성되었다. 뿐만 아니라 1878년에는 근대적 개혁 단행을 위한 ‘제1차 구체적 계획’까지 수립하여 실천하려다가 중요 동지의 사망으로 중단하기도 하였다. 조선 개화는 1879년에는 이동인을 일본에 파견할 수 있을 만큼 활발하게 활동범위를 외국에까지 넓혔으며, 일본국정시찰단(신사유람단)의 파견을 기획하고 추진하기까지 하였다.

조선 개화파의 초기 성장이 이와 같이 급속하게 진전된 결과 1881년 말 김옥균이 제1차로 일본에 건너가기 직전에는 개화파의 이동인이 암살당하였고 김옥균 등이 반대당의 공격을 두려워할 정도로 개화파와 수구파 사이에 갈등과 대립이 조선조정 내부에 나타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001)姜在彦,<開化思想·開化派·甲申政變>(≪朝鮮近代史硏究≫, 日本 東京, 1970).

李光麟,<開化黨의 形成>(≪省谷論叢≫3, 1972;≪開化黨硏究≫, 一潮閣, 1973).

愼鏞廈,<金玉均의 開化思想>(≪東方學志≫ 46·47·48, 1985).

金雲泰,<韓末開化思想과 그 運動의 展開>(≪朝鮮朝政治思想硏究≫, 1987).
002)≪高宗實錄≫, 고종 3년 2월 초4일.
003)≪高宗實錄≫, 고종 3년 3월 22일.
004)≪高宗實錄≫, 고종 3년 7월 22일 및 7월 27일 平安監司 朴珪壽狀啓 참조.
005)≪高宗實錄≫, 고종 6년, 4월 초3일.
006)≪高宗實錄≫, 고종 6년 4월 23일.
007)≪高宗實錄≫, 고종 6년 6월 15일.
008)≪高宗實錄≫, 고종 11년 3월 초5일.

文一平,<名相 朴珪壽의 옛터>(≪湖岩全集≫3, 朝光社, 1941), 266∼268쪽.
009) 吳世昌 작성,≪吳慶錫·吳世昌年譜≫ 참조.
010) 愼鏞廈,<吳慶錫의 開化思想과 開化活動>(≪歷史學報≫107, 1985), 130∼133쪽 참조.
011)<朴珪壽의 吳慶錫에게의 ‘惠人’ 書簡>(吳一六 소장) 참조.
012) 古筠記念會,≪金玉均傳≫ 상(慶應出版社, 1944), 50쪽.
013)≪高宗實錄≫, 고종 9년 2월 초4일.
014)≪高宗實錄≫, 고종 11년 2월 24일.
015)≪高宗實錄≫, 고종 11년 12월 초3일.
016)≪高宗實錄≫, 고종 17년 6월 초7일.
017)≪高宗實錄≫, 고종 19년 9월 22일.
018) 李光麟,≪開化黨硏究≫(一潮閣, 1973), 15∼16쪽 참조.
019) 愼鏞廈,<金玉均의 開化思想>(≪東方學志≫ 46·47·48, 1985) 참조.
020) 李能和,≪朝鮮佛敎通史≫하(新文館, 918), 899쪽.
021) 李光麟, 앞의 책, 31쪽.
022)≪尹致昊日記≫, 1884년 6월 13일(양력 8월 3일) 참조.
023) 金玉均,<甲申日錄>, 1884년 (양력)12월 1일.
024)≪金玉均傳≫ 상, 421쪽.

李光麟, 앞의 책, 30쪽.
025) 李光麟,<姜瑋의 人物과 思想>(≪東方學志≫ 17, 1976) 참조.
026) 奧村圓心,≪朝鮮布敎日誌≫, 1878년(明治 11) 6월 2일.
027)田保橋潔,≪近代日鮮關係の硏究≫(1940), 909쪽 등에서 朝鮮開化思想과 開化黨의 형성을 1882년 이후 金玉均이 福澤諭吉의 가르침을 받은 이후라고 왜곡하여 해설하였다.
028)≪Satow日記≫, 1880년 12월 1일, Asano (淺野:李東仁의 일본 변명) went off this morning after breakfast. His last idea is to bring a mission composed of the most advanced men here and make conventions with the foreign representatives 참조.
029)≪朝野新聞≫, 1881년(明治 14) 5월 6일,<朝鮮開化黨の爲に暗殺された李東仁>(≪新聞集成明治編年史≫4권, 386∼387쪽).
030)≪東京日日新聞≫, 1881년 5월 7일(≪新聞集成明治編年史≫ 4권, 388쪽).
031)≪朝野新聞≫, 1881년 5월 20일(≪新聞集成明治編年史≫ 4권, 393쪽).
032)≪朝鮮新報≫, 1882년 3월 15일(≪新聞集成明治編年史≫ 5권, 48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