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1. 개화파의 형성과 활동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1. 개화파의 형성과 활동
          • 1) 개화파의 형성
          • 2) 개화파의 분화
          • 3) 개화파의 활동
            • (1) 통리기무아문의 설치(1880)
            • (2) 일본국정시찰단(신사유람단)의 파견(1881)
            • (3) 영선사(병기학습 유학생사절단)파견(1881)
            • (4) 신식 육군(별기군)의 창설(1881)
            • (5) 기무처의 설치(1882)
            • (6) 감생청의 설치(1882)
            • (7) 대외적 균세정책의 실시(1882)
            • (8) 해관의 설치(1882∼1883)
            • (9) 근대학교의 설립(1883)
            • (10) 근대신문의 발간(1883)
            • (11) 근대적 산업시설의 대두와 고취
        • 2. 개화사상의 발전
          • 1) 동도서기론의 대두
          • 2) 온건개화파의 개화사상
          • 3) 급진개화파의 개화사상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1. 개화정책의 추진세력
          • 1) 고종의 개화의지
          • 2) 개화파의 형성과 활동
          • 3) 개화추진세력의 분화
        • 2. 신문명의 도입
          • 1) 일본시찰단의 파견
            • (1) 파견계획의 수립
            • (2) 고종의 밀명
            • (3) 어떤 인물들인가
            • (4) 일본시찰 활동
            • (5) 일본견문 보고서
            • (6) 일본을 보는 두 개의 눈-엇갈리는 진단과 평가
          • 2) 청국유학생(영선사)의 파견
            • (1) 사행의 교섭
            • (2) 사행준비와 출발
            • (3) 학습상황
            • (4) 유학생의 철수
          • 3) 미국시찰단의 파견
            • (1) 조미조약의 체결
            • (2) 조선보빙사의 미국파견 및 일정
            • (3) 조선보빙사 파견의 성과
        • 3. 제도의 개혁
          • 1) 정치·군사부문
            • (1) 정부기구의 개편
            • (2) 군사제도의 개혁
          • 2) 경제부문
            • (1) 농업기술의 도입과 상업적 농업의 진흥
            • (2) 상업의 보호와 수세정책
            • (3) 전환국의 설립과 신식 화폐주조
          • 3) 문화·교육·사회부문
            • (1) 박문국의 설치와≪한성순보≫·≪한성주보≫의 간행
            • (2) 서구식 근대교육의 수용
            • (3) 근대적 우정·전신·전기시설
            • (4) 근대 의료시설
      • Ⅲ. 위정척사운동
        • 1. 위정척사사상의 대두
          • 1) 위정척사사상의 대두
          • 2) 위정척사사상의 보급
            • (1) 위정척사사상의 정립
            • (2) 위정척사사상의 심화와 확산
        • 2. 위정척사운동의 전개
          • 1) 병자년의 위정척사운동
          • 2) 신사년의 위정척사운동과 척사·개화논쟁
        • 3. 위정척사운동의 영향과 의의
          • 1) 위정척사운동의 영향
          • 2) 위정척사운동의 의미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1. 임오군란
          • 1) 임오군란의 배경
            • (1) 서울의 사회경제 구조와 하층민
            • (2) 하급 군병의 성격과 군제개편
            • (3) 하층민의 저항운동
          • 2) 임오군란의 전개과정
            • (1) 운동의 발생과 확산
            • (2) 정치적 차원에서의 운동의 실현
            • (3) 외세의 개입과 운동의 좌절
          • 3) 임오군란의 영향
            • (1) 일본의 국내 사정과 대조선정책의 변화
            • (2) 청의 대조선정책의 변화와 영향력 확대
            • (3) 국내 상황의 변화
          • 4) 임오군란의 구조와 성격
            • (1) 참가층의 구성과 동원조직
            • (2) 공격 목표와 요구의 한계
            • (3) 정부 및 지배층의 대응
        • 2. 조선중국상민수륙무역장정과 조·청관계의 변질
          • 1) 조선정부의 대청통상정책
          • 2) 조선중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과 조·청관계의 변질
            • (1) 조·청통상협의
            • (2)<조선중국상민수륙무역장정>체결과 조·청관계의 변질
      • Ⅴ. 갑신정변
        • 1. 갑신정변의 배경
          • 1) 구미열강과의 외교
          • 2) 차관교섭
          • 3) 집권파와의 대립과 위기의식
        • 2. 갑신정변의 주도세력
          • 1) 정변의 핵심세력
          • 2) 정변의 행동대원
        • 3. 갑신정변의 전개
          • 1) 정변 주도세력의 목표
          • 2) 갑신정변의 준비
            • (1) 개화당의 정변 무력문제
            • (2) 정변 단행의 결정
            • (3) 북청군대의 상경과 일부 유경
            • (4) 일본공사관 호위용 일본군의 차병
            • (5) 국왕의 밀칙 획득
            • (6) 행동계획의 최종 정리
          • 3) 개화정권의 수립
            • (1) 1884년 10월 17일 밤의 거사
            • (2) 신정부의 수립
            • (3) 개화파 신정부의 혁신정강 공포
          • 4) 청국 및 일본의 개입과 정변의 실패
          • 5) 갑신정변 실패의 요인
        • 4. 갑신정변의 영향과 의의
          • 1) 갑신정변의 영향
            • (1) 수구파정권의 재수립
            • (2) 개화당의 몰락과 숙청
            • (3) 조선·일본의 교섭과<한성조약>의 체결
            • (4) 청국·일본의 교섭과<천진조약>의 체결
          • 2) 갑신정변의 역사적 의의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2) 개화파의 분화

개화파는 개항 후 개화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는 중에 1881년(고종 18)까지는 수구파인 위정척사파의 공격에 대응하기에도 힘이 부족한 형편이어서 아직 개화파 내부의 분화는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갈등은 주로 개화파와 위정척사파 사이에서 전개되었다.

개화파의 개화활동을 불안하게 보고 있던 유생들은 1880년 10월 수신사 김홍집이 일본에서 귀국할 때 주일 청국대사관의 중국인 외교관 黃遵憲이 지어준≪朝鮮策略≫을 국왕에게 바치고 이 책이 필사되어 유생들에게 전해지자 전국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개화파와 정부의 개화정책을 비판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책략≫의 주요 내용은 가장 위험한 나라를 러시아로 보고 조선은 러시아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親中國·結日本·聯美國’할 것을 권고한 것이었다. 또한 이 책은 조선이 미국과도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것을 적극 권고하면서, 야소교(신교)는 천주교와 뿌리는 같으나 당파가 달라 정치에 간여하지 않으므로 두려워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은근히 그 수용도 시사하였다.

이 책을 읽어 본 유생들은 수신사 김홍집이 귀국하여 복명한 지 약 1개월 후부터≪조선책략≫을 규탄함과 동시에 이를 가져온 김홍집의 처벌과 개화정책 추진의 중단을 요구하는 위정척사 상소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인 1881년(辛巳)에는 이른 봄부터<영남만인소>가 올라오고, 뒤이어 전국 유생들이 줄을 이어 상소를 올리면서≪조선책략≫을 규탄함과 동시에 개화파의 개화활동과 정부의 실정도 규탄했으므로 일년 내내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상소 형식을 빌린 논쟁이 계속되었다. 그 위에 대원군의 서자 李載先이 중심이 되어 위정척사파와 손잡고 정변을 일으켜서 국왕을 폐위시키고 대원군정권을 수립하려는 음모까지 발각되어 정부·개화파 대 위정척사파의 갈등은 더욱 격화되었다.

개화파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개화정책을 추진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개혁문제에 대하여 의견 차이가 나오는 경우에도 1881년까지는 서로 잘 협조하면서 개화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후에 온건개화파에 속하게 된 김윤식은 후에 급진개화파의 영수가 된 김옥균에 대하여 1881년 영선사파견 무렵까지 그들 사이의 공고한 단결과 협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처음에 古愚(김옥균)는 瓛齋(박규수)선생 문하에서 배워 宇內의 대세를 대개 깨닫고 일찍이 동지들과 더불어 國事를 근심하고 개탄했다. 辛巳년간 나는 領選使로 天津에 들어가고, 古愚 등은 동쪽으로 일본에 건너가 유람하면서 함께 扶國하기로 약속했었다(金允植,≪續陰晴史≫하, 부록 追補陰晴史, 577쪽 참조).

그러나 1882년 6월 9일(양력 7월 23일)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청군이 개입함으로써 사태는 근본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임오군란이 일어나서 민비정권이 붕괴되고 대원군이 집권하자 민비 수구파는 청국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며, 청국의 북양대신 李鴻章 등은 이에 대한 대책을 수립함에 있어서 한림원 학사 張佩綸의 이른바<東征善後六策>이라는 건의안을 채택하여 이 기회에 청국군을 파견하여 서울에 상주시키면서 적극 간섭정책을 실시하고 조선을 실질적으로 ‘속방화’하기로 결정하였다.

청국은 이에 1882년 6월 27일 약 3,000명의 청군을 조선에 파병하여 서울에 주둔시키고, 7월 7일에는 집권자이자 국왕의 아버지인 대원군을 군함에 초청해 놓고는 그대로 납치하여 청국에 실어다가 保定府에 유폐하여 버렸다. 이에 청군의 작용으로 대원군정권은 붕괴되고 다시 민비정권이 재집권하게 된 것이었다.

청국은 민비정권을 다시 세워 원상복구를 해놓고서도 3,000명의 청국군을 철수시키지 아니하고 서울 복판에 주둔시킨 채 이 무력을 배경으로 하여 허명의 종주권을 주장하면서 조선을 실질적으로 속방화하기 위한 적극 간섭정책을 집행하고 조선의 자주독립을 크게 침해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에 주둔한 청국의 장군 吳長慶과 젊은 장교 袁世凱는 조선조정의 군사권을 장악하고, 재정고문으로 파견된 陳樹棠은 재정권을 장악해 갔으며, 이홍장이 파견한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öllendorff, 穆麟德)는 새로 설립한 해관을 장악했을 뿐 아니라 외교까지 장악하려 하였다.

청국측은 뿐만 아니라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조선 개화파의 개화활동이 궁극적으로 청국으로부터의 조선의 자주독립을 추구하는 활동이라고 보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개화파를 탄압하고 개화활동을 방해하였다. 조선 개화파는 임오군란 이후에는 어떠한 개화정책을 실시하려 해도 청국측의 방해와 견제를 물리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당시 ‘임오군란’에 의하여 한 번 정권이 붕괴되었다가 청국측의 구원으로 다시 정권을 장악하게 된 민비 수구파는 청국의 ‘속방화’정책에 순종하여 조선의 독립이 청군에 의해 크게 침해되고 자주근대화가 저지되는 것은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 임오군란 이전에 제휴하여 등용했던 개화파에 대해서도 이제는 이를 경원시했으며, 도리어 청군과 야합하여 개화파를 견제하고 탄압하기까지 하였다

당시 청국이 조선의 자주독립을 얼마나 침해했는가의 몇 가지 사례를 들면 청국은 임오군란을 진압한 직후에 민비정권에게 압력을 가하여 그 동안 조선이 각국과 맺은 불평등 통상조약들 중에서도 가장 불평등하고 청국의 특권을 설정한<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을 1882년 8월 23일(양력 10월 4일) 체결토록 강요했으며, 그 전문에는 조선을 중국의 속방이라고 문자로 명시해 넣었다. 심지어 속국 조선은 중국과 ‘조약’·‘조규’의 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고 하면서 ‘章程’의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청국측이 일방적으로 초안을 작성한 무역장정의 승인을 강요하여, 국왕의 승인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선포하였다. 재정고문 陳樹棠은 방자하게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라는 귀절을 넣은 방문을 숭례문에 써 붙이기까지 하였다.033)

진수당은 또한 한국인의 집을 강제로 사들이고자 하여 이에 항의한 조선 조정의 正言 李範晋을 청군의 군영에 잡아다가 어지러이 매를 때리는 만행까지도 자행하였다.034) 또한 청국은 민비정부에 대하여 ‘무릇 외교에 관한 일은 일체를 청국에 문의하라’고 지시했으며, 청군 대장 오장경은 조선국왕 고종에게 맞대놓고 “내가 3천 군대를 거느리고 이 곳에 와 있으므로 매사에 皇朝(청국)를 배반해서는 안 된다”035)고 협박하였다. 오장경은 고종에게 “내년 봄에는 청국의 군대가 증파될 것이다”036)라고 위협하기도 하였다.

서울에 주둔한 청군의 행패도 극심하였다. 하나의 예만 들면 청군들이 광통교 약국에서 무상으로 약품을 빼앗으려 하다가 약값을 요구하는 약국주인 최씨의 아들을 사살하고 최씨에게 총을 쏘아 중상을 입힌 사건이 발생하였다.037) 조선정부에서 발행하는 개화파의 신문인≪漢城旬報≫가 이 사건을 보도하자, 청군은 이 사건을 보도했다는 이유로 해서≪한성순보≫를 발행하는 통리기무아문의 博文局을 습격하기까지 하였다.038) 그러나 청군의 도움으로 재집권한 민비정권은 이러한 청군의 만행에 대하여 항의조차 한 번 변변히 하지도 못하는 형편이었다.

임오군란 이후의 청국의 이러한 정책전환과 청군의 만행에 대하여 대응책을 놓고 1882년 8월부터는 개화파의 내부에서 현저하게 견해 차이가 노출되어, 개화파는 김옥균·박영교·홍영식·박영효·서광범 등을 중심으로 한 급진파와 김윤식·어윤중·김홍집·박정양 등을 중심으로 한 온건파로 분화되기 시작하였다. 개화파가 급진파와 온건파로 분화된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서는 다음의 세 가지 점이 특히 주목될 수 있다.

첫째, 청국의 조선에 대한 속방화의 적극적인 간섭정책에 대한 비판과 조선의 자주독립에 대한 강조의 무게에 있어서 개화파 내부에 의견 차이가 노출되었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세력은 청국의 조선에 대한 속방화 적극 간섭정책을 조선의 자주독립에 대한 중대한 침해이며 조선에 대한 매우 큰 침략적 위협이라고 간주하여 이를 격렬하게 규탄했으며, 비록 개화파의 정적이었지만 대원군을 청국이 납치해 간 것을 조선의 주권을 유린한 만행이라고 통분해 하고 이를 격렬하게 규탄하였다. 김옥균은 이 무렵 청국의 조선 독립 침해에 대하여 그의 친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자래로 청국이 자의로 (조선을) 屬國으로 생각해 온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며 나라(조선)가 振作의 희망이 없는 것은 역시 여기에 원인이 없지 않다. 여기서 첫째로 해야 할 일은 覊絆을 撤退하고 특히 獨全自主之國을 수립하는 일이다. 독립을 바라면 정치와 외교를 불가불 自修自强해야 한다(金玉均,<朝鮮改革意見書>,≪金玉均全集≫, 110∼111쪽).

김옥균이 여기서 말한 ‘獨全自主之國’은 현대어로 번역하면 ‘완전 자주독립국가’라고 말할 수 있다. 김옥균은 청국이 조선에 대하여 속방화 적극 간섭정책을 쓰기 때문에 조선의 큰 발전의 희망이 없는 것이므로 조선에서 첫째로 해야 할 일은 청국의 멍에를 철퇴하고 완전 자주독립국을 수립하는 일이라고 강조한 것이었다.

김옥균의 동지인 서재필은 이 점에 대하여 김옥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그 때 김옥균의 생각은 무엇보다도 청나라 세력을 꺾어 버리는 동시에 그에 추종하는 귀족들의 세력을 빼앗은 후에 우리 나라의 완전 자주독립정치를 수립하자는 것이 그의 이상이었고 실현의 최고 목적이었다.

더욱이 청나라에서 대원군을 납치하였다는 것은 우리로서 참을 수 없는 치욕이라고 하여 분개함을 참을 수가 없어 그 세력구축과 귀족타파의 깃발을 둘러메고 나서려 한 것이다(金道泰 編,≪徐載弼博士自敍傳≫, 首善社, 1949, 86∼87쪽).

서재필은 김옥균 등의 이 문제에 대한 견해에 대하여 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김옥균은 조국이 청국의 종주권 아래 있는 굴욕감을 참지 못하여 어찌하면 이 수치를 벗어나 조선도 세계 각국 중에 평등과 자유의 일원이 될까 주주야야로 노심초사하였던 것이다(徐載弼,<回顧甲申政變>;閔泰瑗,≪甲申政變과 金玉均≫, 82쪽).

개화파에 의하여 일본에 유학생으로 파견되었던 申重模는 당시 김옥균으로부터 들은 말을 다음과 같이 공술하였다.

나는 원래 常漢이었으나 유길준의 愛顧에 의하여 일본에 건너가서 어학을 배우고 귀국하였다. 당시 渡日한 20여 명 중에서 나를 비롯한 14명은 士官學校에서 1년 반 공부했으나, 그 후 金玉均이 일본에 와서 1주일에 1회씩 모이게 되어 누누히 相會하였다. 따라서 김옥균으로부터 들은 말에 의하면, ‘서양 각국은 모두 독립국가이다. 어떠한 국가든지 독립한 연후에야 비로소 타국과 화친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은 오직 청국의 屬國이 되어 있는 바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조선도 언젠가는 독립국가가 되어서 서양제국과 同列에 서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推案及鞫案≫, 大逆不道罪人喜貞等鞫案 중의 申重模의 供述, 亞細亞文化社版 30책, 588쪽).

김옥균 등이 청국의 조선에 대한 속방화정책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대항했으며, 청국의 종속화정책으로부터의 조선의 완전 독립쟁취를 얼마나 중시했는가를 위의 자료들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이에 비하여 김윤식·어윤중 등은 청국 체류중에 민비의 의뢰를 받고 이홍장에게 청군의 조선파병에 의한 임오군란의 진압 요청을 전달해 주었으며, 청국의 대원군 납치에도 방조적이었다. 김홍집도 청국의 적극 간섭정책과 대원군 납치에 대한 비판의 정도가 김옥균 등과 같이 강렬하지 못하였다. 조·청관계에 관련하여 자주독립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의 정도에서 개화파 내부에 현저한 견해 차이가 드러나 개화파 분화의 요인을 이룬 것이었다.

둘째, 조선의 개화를 추진하는 범위와 속도에 대하여 개화파 내부에 견해 차이가 노출되었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는 서양의 선진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할 뿐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부문에서 모든 제도의 ‘대경장개혁’을 주장하는 ‘변법적 개화’를 주창하였다. 김옥균은 일본 자유당계 요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4백년 누적된 頑俗을 갑자기 변화시키기가 매우 어렵다. 대세는 부득불 정부를 한 번 大更張改革을 한 연후에야 군권(독립권)을 높일 수 있고 민생을 보전할 수 있다”039)고 하면서 “독립을 바라면 정치와 외교를 불가불 自修自强해야 하는데, 이 일은 지금의 정부 인물로서는 될 수 없으므로 군권(독립권)을 위태롭게 하고 권세만 탐내는 고식배들을 역시 불가불 한 번 소제할 수밖에 없다”040)고 주장하였다.

서재필은 김옥균의 꿈이 국가의 모든 부문에서 급속히 개화를 성취하여 “일본이 동방의 영국 노릇을 하려 하니 조선은 아시아의 프랑스 같은 나라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었다고 다음과 같이 회고해서 기록하였다.

매 일요일이면 우리는 반드시 그(김옥균)를 築地 寓居로 심방하였다. 그럴 때마다 그는 우리를 親弟와 같이 대접하며 숨김없고 남김없는 폐간 속의 말을 우리에게 들려 주었다. 그는 祖國刷新에 대한 우리의 중차대한 임무를 말하는 동시에 나라에 돌아가 우리가 빛나는 대공훈을 세울 것을 믿어 마지아니하였다. 그리고 그는 늘 우리에게 말하기를 ‘일본이 동방의 英國 노릇을 하려 하니 우리는 우리 나라를 亞細亞의 佛蘭西로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그의 꿈이었고 또 유일한 야심이었다. 우리는 김씨의 말을 신뢰하고 우리의 전도에 무엇이 닥쳐오든지 우리의 책임을 이행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였던 것이다(徐載弼,<回顧甲申政變>,≪甲申政變과 金玉均≫, 84∼85쪽).

한편 당시에 김윤식·어윤중·김홍집 등은 서양의 선진 과학기술의 수용에는 마찬가지로 적극적이었으나, 사회제도의 대개혁에는 매우 소극적이어서 아직도 東道西器論的 성격이 강했으며, 개화의 속도도 점진적인 것을 선호하였다.041) 김윤식·어윤중·김홍집 등은 온건개화를 추구했던 것이다.

셋째, 개화독립정책을 단행하기 위한 권력 장악의 방법에 대하여 개화파 내부에 견해 차이가 내재하였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급진개화파는 자주독립과 대경장개혁의 단행을 위한 권력 장악의 방법에 있어서는 ‘權道’의 사용은 당연히 있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이 때문에 ‘정변’의 방법을 기회 있을 때마다 중시하였다.

김옥균은 대경장개혁 단행의 두 개의 방법으로 일찍이 ‘평화행사의 방법’과 ‘무력행사의 방법’을 구분하여 강조한 바 있다.042) 김옥균에 의하면 평화행사의 방법이란 국왕의 칙령을 빌어서 평화적 방법으로 점진적으로 개혁사업을 수행하는 것이다. 한편 무력행사의 방법은 국왕의 密意에 의탁하면서 무력을 사용하여 정변이나 혁명을 일으켜 먼저 정권을 장악한 다음에 급진적으로 개혁사업을 신속히 단행하는 방법이다.

서재필은 김옥균이 개화를 ① 구미형과 ② 일본형으로 나누어 보면서, 구미형은 수세기(수백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룩된 것인데 비하여 일본형은 한 세대에 이룩한 것인데, 조선은 뒤늦게 개화를 하려는 것이므로 김옥균이 단기형인 일본형을 선택하여 이를 성취하려고 정변의 방법도 생각한 것이었다고 설명하였다.

그(김옥균)는 歐美의 문명이 일조일석의 것이 아니고 열국간 경쟁적 노력에 의한 점진 결과로 幾多 世紀를 요한 것이었는데, 일본은 한 代 동안에 그것을 달성한 양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자연 일본을 모델로 청하여 백방으로 분주하였던 것이다(徐載弼,<回顧甲申政變>,≪甲申政變과 金玉均≫, 82쪽).

한편 김윤식·어윤중·김홍집 등 온건개화파는 아무리 대경장개혁이 필요하다 할지라도 권도로서의 ‘정변’의 방법은 찬성하지 않았으며, 세력을 길러 국왕의 자발적 임명에 의거한 정권 장악의 방법을 추구하는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었다.

주로 이상과 같은 요인으로 말미암아 초기 개화파는 1882년 후반부터 1884년 사이에 김옥균·홍영식·박영교·박영효·서광범 등을 중심으로 한 급진개화파와 김윤식·어윤중·김홍집 등을 중심으로 한 온건개화파로 분화하게 되었다.

1882년∼1884년 당시 국내 정치세력의 분화와 그 중요 인물 및 정치적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의<표 1>과 같다.

  정치세력당파 중요 인물 정치적 특징
급진개화파

(개화당)
劉鴻基, 金玉均, 洪英植,

朴泳敎, 朴泳孝, 徐光範,

柳相五, 徐載弼, 尹雄烈,

尹致昊, 邊樹(燧),

朴齊絅 그 밖의 다수
◦변법적 개화 및 국정 전반에 걸친 대

경장혁신을 추구

◦청국의 적극 간섭정책과 속방화정책

에 적극 저항

◦개변의 방법도 불사

◦주로 선각적 청년 지식인층으로 구성

◦조정의 중간 관직에 다수 진출
온건개화파

(중간파)
金綺秀, 金弘集, 金允植,

魚允中, 朴定陽, 金晩植,

金仁植, 姜文馨, 李 永,

申箕善, 李元會, 趙秉鎬

그 밖의 다수
◦東道西器論的 개화를 추구

◦점진적 개화를 추구

◦정변의 방법에 불찬성

◦주로 장년층 중심의 구성

◦조정의 고위 관직에 다수 진출
민비수구파

(집권파)
閔 妃, 閔台鎬, 閔謙鎬,

閔應植, 閔泳翊, 閔丙奭,

閔泳穆, 閔種黙, 趙寧夏,

韓圭稷, 李祖淵, 尹泰駿

그 밖의 다수
◦守舊를 원칙적으로 추구했으나 불가피

할 때는 開化를 승인

◦임오군란 후에는 親淸事大정책을 추구

◦閔氏戚族을 중심으로 구성

◦주로 노년·장년층이 중심

◦조정의 최고권력과 관직을 점유한 집

권파임
대원군수구파 興宣大院君(李昰應),

李載元, 李載完, 李載冕,

李載先, 洪淳馨, 鄭顯德,

申應朝, 李景夏, 韓聖根,

李載純

그 밖의 다수
◦守舊를 원칙으로 추구

◦왕권의 강화, 宗社의 구습보전을 추구

◦청에 대해서는 의례적 사대외교만 하

고, 실질적으로는 자주를 추구

◦대원군을 중심으로 하여 종친과 그 세

력으로 구성

◦임오군란 때 1개월간 집권했으나 그

이후에는 실권
위정척사파

(재야유림

수구파)

 
金平黙, 崔益鉉, 柳麟錫,

李晩孫, 白樂寬, 梁憲洙,

申 㰔, 洪在鶴, 奇宇萬,

韓洪烈, 高定柱, 金鎭淳

그 밖의 다수
◦철저한 守舊와 위정척사를 이론적 실

천적으로 고수

◦명과 중국에는 사대적이며, 淸에는 중

립적 외교지지

◦일본과 서양에 대해서는 극단적으로

배척

◦서원과 향교를 근거지로 한 유림세력

으로 구성

◦평상시에는 조정의 관직에 진출하지

않고 재야세력으로 존재

<표 1>1882∼84년의 조선 정치세력과 당파의 분화

위의<표 1>에서 ①과 ②의 정치세력과 파당이 개화파의 범주에 들어오는 것이고, ③④⑤의 정치세력이 수구파의 범주에 드는 것이다. 위의 표는 ①의 정치세력에 접근할수록 더욱 개화적이고, ⑤의 정치세력에 접근할수록 더욱 수구적인 정파의 분류표이다.

1884년의 갑신정변은 위의 표의 5개 정치세력·정파 중에서 ①의 급진개화파가 청군과 ③의 민비 수구파정권에 대항하여 일으킨 정치운동이었다.

033)≪尹致昊日記≫, 1883년 10월 5일.
034)≪尹致昊日記≫, 1884년 5월 28일.
035)≪尹致昊日記≫, 1883년 10월 3일.
036)≪尹致昊日記≫, 1883년 12월 4일.
037)≪尹致昊日記≫, 1884년 1월 3일.
038)≪漢城旬報≫10호, 1884년 1월 3일,<革兵犯罪>.
039) 金玉均,<朝鮮改革意見書>(≪金玉均全集≫, 109∼110쪽).
040) 위와 같음(111쪽).
041) 尹致昊,<風雨二十年一韓末政客의 回顧談>(≪東亞日報≫, 1930년 1월 12일).
042) 金玉均,<朝鮮改革意見書>(≪金玉均全集≫, 111∼112쪽) 참조.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