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Ⅱ. 개화정책의 추진3. 제도의 개혁1) 정치·군사부문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1. 개화파의 형성과 활동
          • 1) 개화파의 형성
          • 2) 개화파의 분화
          • 3) 개화파의 활동
            • (1) 통리기무아문의 설치(1880)
            • (2) 일본국정시찰단(신사유람단)의 파견(1881)
            • (3) 영선사(병기학습 유학생사절단)파견(1881)
            • (4) 신식 육군(별기군)의 창설(1881)
            • (5) 기무처의 설치(1882)
            • (6) 감생청의 설치(1882)
            • (7) 대외적 균세정책의 실시(1882)
            • (8) 해관의 설치(1882∼1883)
            • (9) 근대학교의 설립(1883)
            • (10) 근대신문의 발간(1883)
            • (11) 근대적 산업시설의 대두와 고취
        • 2. 개화사상의 발전
          • 1) 동도서기론의 대두
          • 2) 온건개화파의 개화사상
          • 3) 급진개화파의 개화사상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1. 개화정책의 추진세력
          • 1) 고종의 개화의지
          • 2) 개화파의 형성과 활동
          • 3) 개화추진세력의 분화
        • 2. 신문명의 도입
          • 1) 일본시찰단의 파견
            • (1) 파견계획의 수립
            • (2) 고종의 밀명
            • (3) 어떤 인물들인가
            • (4) 일본시찰 활동
            • (5) 일본견문 보고서
            • (6) 일본을 보는 두 개의 눈-엇갈리는 진단과 평가
          • 2) 청국유학생(영선사)의 파견
            • (1) 사행의 교섭
            • (2) 사행준비와 출발
            • (3) 학습상황
            • (4) 유학생의 철수
          • 3) 미국시찰단의 파견
            • (1) 조미조약의 체결
            • (2) 조선보빙사의 미국파견 및 일정
            • (3) 조선보빙사 파견의 성과
        • 3. 제도의 개혁
          • 1) 정치·군사부문
            • (1) 정부기구의 개편
            • (2) 군사제도의 개혁
          • 2) 경제부문
            • (1) 농업기술의 도입과 상업적 농업의 진흥
            • (2) 상업의 보호와 수세정책
            • (3) 전환국의 설립과 신식 화폐주조
          • 3) 문화·교육·사회부문
            • (1) 박문국의 설치와≪한성순보≫·≪한성주보≫의 간행
            • (2) 서구식 근대교육의 수용
            • (3) 근대적 우정·전신·전기시설
            • (4) 근대 의료시설
      • Ⅲ. 위정척사운동
        • 1. 위정척사사상의 대두
          • 1) 위정척사사상의 대두
          • 2) 위정척사사상의 보급
            • (1) 위정척사사상의 정립
            • (2) 위정척사사상의 심화와 확산
        • 2. 위정척사운동의 전개
          • 1) 병자년의 위정척사운동
          • 2) 신사년의 위정척사운동과 척사·개화논쟁
        • 3. 위정척사운동의 영향과 의의
          • 1) 위정척사운동의 영향
          • 2) 위정척사운동의 의미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1. 임오군란
          • 1) 임오군란의 배경
            • (1) 서울의 사회경제 구조와 하층민
            • (2) 하급 군병의 성격과 군제개편
            • (3) 하층민의 저항운동
          • 2) 임오군란의 전개과정
            • (1) 운동의 발생과 확산
            • (2) 정치적 차원에서의 운동의 실현
            • (3) 외세의 개입과 운동의 좌절
          • 3) 임오군란의 영향
            • (1) 일본의 국내 사정과 대조선정책의 변화
            • (2) 청의 대조선정책의 변화와 영향력 확대
            • (3) 국내 상황의 변화
          • 4) 임오군란의 구조와 성격
            • (1) 참가층의 구성과 동원조직
            • (2) 공격 목표와 요구의 한계
            • (3) 정부 및 지배층의 대응
        • 2. 조선중국상민수륙무역장정과 조·청관계의 변질
          • 1) 조선정부의 대청통상정책
          • 2) 조선중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과 조·청관계의 변질
            • (1) 조·청통상협의
            • (2)<조선중국상민수륙무역장정>체결과 조·청관계의 변질
      • Ⅴ. 갑신정변
        • 1. 갑신정변의 배경
          • 1) 구미열강과의 외교
          • 2) 차관교섭
          • 3) 집권파와의 대립과 위기의식
        • 2. 갑신정변의 주도세력
          • 1) 정변의 핵심세력
          • 2) 정변의 행동대원
        • 3. 갑신정변의 전개
          • 1) 정변 주도세력의 목표
          • 2) 갑신정변의 준비
            • (1) 개화당의 정변 무력문제
            • (2) 정변 단행의 결정
            • (3) 북청군대의 상경과 일부 유경
            • (4) 일본공사관 호위용 일본군의 차병
            • (5) 국왕의 밀칙 획득
            • (6) 행동계획의 최종 정리
          • 3) 개화정권의 수립
            • (1) 1884년 10월 17일 밤의 거사
            • (2) 신정부의 수립
            • (3) 개화파 신정부의 혁신정강 공포
          • 4) 청국 및 일본의 개입과 정변의 실패
          • 5) 갑신정변 실패의 요인
        • 4. 갑신정변의 영향과 의의
          • 1) 갑신정변의 영향
            • (1) 수구파정권의 재수립
            • (2) 개화당의 몰락과 숙청
            • (3) 조선·일본의 교섭과<한성조약>의 체결
            • (4) 청국·일본의 교섭과<천진조약>의 체결
          • 2) 갑신정변의 역사적 의의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3. 제도의 개혁

1) 정치·군사부문

(1) 정부기구의 개편

조선국왕 고종은 강화도조약체결 이후 종래의 의정부와 삼군부체제로는 새로운 대내외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의정부 중신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정부 관료들은 사대교린체제에 안주하려 하였으므로 새로운 국제관계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동래부사를 비롯한 지방관으로부터 예조, 의정부로 이어지는 외교통로와 일본 외교관의 도래 또는 외교적 현안이 발생할 때 임시로 마련되는 接見官 講修官 임명 등을 통한 양국관계의 처리는 많은 문제를 야기하였다. 현안처리 기일이 지연되거나 담당관료들의 의식 차이에 따른 사안 처리의 일관성 결여로 분쟁이 끊이지 않는 등 많은 문제를 야기하였다. 또한 대원군이 서양세력의 통상요구를 거절하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신무기를 개발하고, 해안경비를 강화하는 등 국방을 강화하는 동안 중시되었던 삼군부는 대원군이 실각하고 일본의 강압적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무력감을 드러내었다. 조선 후기 비변사가 국방문제를 비롯한 대내외 문제 전반을 다루었다면 삼군부는 邊情과 군사문제에 국한하여 그 권한을 행사하도록 조치되어, 1871년의 신미양요 당시에는 그런 대로 그 존재 가치를 발휘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이 실각하고 雲揚號사건에서 일본의 무력시위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던 삼군부는 유명무실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301)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외교적 현안은 더욱 증대되었고 문호개방을 요구하는 열강의 위협 또한 계속 증대되었다. 조선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효과적인 외교와 武備自强策을 강구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조선국왕 고종은 수신사의 보고를 통해 일본의 발전상을 알게 되었고, 또한 일본과 러시아의 위협이 증대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에 대한 수교의 유용성도 알게 되었다. 서양의 새로운 문물도입을 통한 부국강병책의 마련이 시급함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종은 이를 위한 새 기구의 설치를 마련토록 지시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마련된 새 기구가 통리기무아문이었다.302)

통리기무아문 설치의 직접적인 계기는 새로운 기계제조 기술을 배우게 해달라는 조선정부의 청원에 대한 청나라의 답신이 오면서부터였다. 새로운 무비에 관심이 많았던 고종은 1880년 4월 사역원에 명하여 기기의 수입 및 기계제조 기술의 학습에 대한 청나라의 협조를 구하는 문안을 작성토록 지시하는 한편 정부에 대하여 청에 파견할 인재들을 천거하도록 명하였다. 이어 정부는 무비강구의 자문을 만들어 청나라에 보냈고, 청나라는 조선의 요구를 수락하였다. 기계제조 학습에 대한 청나라의 수락통보를 받은 고종은 바로 이 문제의 처리와 사대·교린·변정 등에 관한 일을 맡을 새로운 기구의 설치를 명하였다.303) 이어 신설 기구에 대한 절목을 빨리 만들어 바치도록 독촉하였다.304)

국왕의 독촉을 받은 의정부는 대신과 참찬, 그리고 유사당상들과 의논하여 절목을 만들어 바치는 한편 신설아문의 처소 마련이 쉽지 않음을 호소하였다. 이에 대해 국왕은 “삼군부의 설치가 비록 여러 해가 되었으나 지금은 한만한 직책이니 이를 혁파해서 신설아문의 처소로 삼도록 하라”고 답하였다.305) 이렇게 해서 마련된 통리기무아문은 事大司·交隣司·軍務司·邊政司·通商司·軍物司·機械司·船艦司·譏沿司·語學司·典選司·理用司 등 12개사로 조직되었다.306) 통리기무아문은 군국기무를 總領할 수 있도록 정1품아문으로 그 지위가 보장되었고, 대신 중에서 총리를 임명하고 시·원임대신으로 이 기관의 都相을 겸하게 하였다. 따라서 1881년 1월 19일(음력 12월 20일) 아문이 설치되자 당시의 실력자들이 당상으로 임명되었고, 중견 인물들이 각사의 낭청에 등용되었다. 또한 외무를 처리하여야 했으므로 외국어에 밝은 漢學과 倭學의 역관들을 참사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당시 비상한 인물로 알려진 수문장 이제마(한의)와 별선군관 이동인(승려) 등이 참모관으로 발탁되었다.307)

이렇게 출발한 통리기무아문은 나라의 모든 중요 기밀을 취급하게 되어 처음 삼군부 자리에 있다가 그 처소를 궁궐 안 內兵曹·典設司 근처로 옮기게 되었다.308) 그러나 12사는 그 설립 취지에 비해 업무처리와 효율성에 문제가 있었던 듯 1881년 12월에 이르러 사대사와 교린사를 통합하여 同文司로 합치는 등, 軍務司·通商司·典選司·律例司·監工司 등으로 축소 조정되었다.309) 주로 대외문제의 효과적인 처리를 위해 설치되었던 통리기무아문은 대외문제 만이 아니라 군국기무와 관련된 내정문제도 처리함으로써 조선 후기의 비변사와 같이 국정의 최고기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고종은 통리기무아문을 중시하여 아문의 현판을 직접 써서 하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앙의 각사 제궁과 지방 8道4都로부터 대·소 업무를 보고 받아 처리하도록 하였다. 평상시 국왕과 차대할 때에는 경리당상들이 모두 모여 국정을 협의 결정하고, 긴급한 일이 있을 때에는 각사의 당상들이 일단 궁궐 밖에 모여 협의한 뒤 국왕에게 보고하도록 함으로써 통리기무아문은 국가의 모든 중요한 문제에 관여하였다.310)

통리기무아문은 설치된 이후 제일 먼저 領選使의 파견문제를 처리하였다. 영선사란 새로운 군기제조의 기술습득을 위하여 학도와 공장을 인솔하고 청나라에 갔던 사신을 말하는 것으로, 이에 대한 조선의 청원이 청나라에 의해 받아들여지면서 이의 처리가 통리기무아문 설치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던 것이므로 당연하다 하겠다. 다음으로 통리기무아문은 일본의 신문물 시찰을 위한 신사유람단 파견, 신식 군인 별기군 설치와 군제개편, 미국을 비롯한 서양제국과의 수호조약체결 등을 추진하여 개화정책 담당기구로서 기능을 발휘하였다. 이외에도 일본인의 침투가 심해진 울릉도에 대한 검찰관의 파견, 해로의 요충지인 동래부 절영도에 鎭을 설치하는 문제, 재정문제 해결을 위한 鑄錢, 금은채광과 包蔘管理 문제 등 각종의 현안을 처리하였다.311)

1882년 7월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통리기무아문은 폐지되었다. 보수적 유학자들을 비롯한 개화 반대세력들은 개화정책 추진에 앞장서 온 통리기무아문과 신식 군대인 별기군의 폐지를 주장하였고, 개화정책의 일환으로 별기군이 설치되면서 소외되고 차별대우를 받았던 구식 군인들의 난을 계기로 대원군은 정권을 잡게 되었고, 별기군의 해체에 이은 군제의 복구와 더불어, 과거 대원군의 攝政기간에 중시되었던 변정·군사기구인 삼군부의 권한이 다시 부활되면서 통리기무아문은 혁파되었던 것이다.312) 그러나 대원군이 집권 33일 만에 중국으로 납치되어 가자 고종은 기무처를 궁궐 내에 설치하여 중요문제를 논의하고 처리하게 하였다.313)

그런데 기무처는 임시기구로서 규모 면에서 날로 복잡해지는 국정을 처리하기에 적절치 않았던 모양으로 고종은 다시 1882년 12월 통리아문 및 통리내무아문을 설치하였다.314) 이어 1883년 1월에는 통리아문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약칭 외아문), 통리내무아문을 통리군국사무아문(약칭 내아문)이라 개칭하였다.315) 이어 삼군부와 기무처는 통리군국사무아문에 합병하였다.316) 전자는 외교통상관계 사무를, 후자는 군국의 기무를 비롯하여 내정일체를 관장하게 하였다. 이 두 관청에는 당시 이름난 대부분의 인재들이 배치되어 개화정책을 추진하고 새로운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처하였다.317) 내정과 군사를 담당하는 통리군국사무아문은 갑신정변 이후 의정부에 합부되었다가318) 다시 내무부로 부활되었다. 내무부는 초기에 軍務局·司憲局·修文局·地理局·工作局·職制局·農務局 등을 두어 내정전반을 관할하였고, 뒤에도 필요에 따라 商理局·鑛務局 등 새로운 국을 증설하여 현안문제들을 해결하였다.319)

이와 같이 내외정세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기구가 설치되었으므로 자연히 유명무실한 기구와 인원에 대한 조정이 필요하게 되었다. 더욱이 오랜 동안 내려 온 불필요한 기구와 관직, 이에 따르는 수세정책의 난맥과 재정낭비는 개항 이후 새로운 정책과 사업의 추진을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이에 정부는 이를 시정하고자 1882년(고종 19) 10월 20일 減省廳을 설치하였다. 감생청은 국왕의 식사·복식에서부터 형식과 낭비를 줄이는 한편 왕족과 공신 후예들을 대우하기 위해 만들어진 필요 이상의 관청이나 인원을 줄이는 작업을 전개하였다. 더 나아가 행정절차를 간소화하고 중앙과 지방의 관청과 인원, 그리고 군사조직을 축소 조정하고 문벌에 관계없이 인재를 등용하여 효율성을 높이고 재정낭비를 줄일 수 있는 조치를 취하도록 국왕에게 건의하였다. 또 收稅혼란과 공물납부의 폐해도 시정토록 조치하였다. 이에 국왕은 각 기관과 관료들에게 감생청의 조치를 철저히 이행토록 명령하였다.320) 그러나 이렇게 과감하게 추진되었던 정부의 개혁작업은 실제에 있어서는 성과를 거두지 못함으로써 개화정책의 추진을 어렵게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321)

301)≪承政院日記≫, 고종 17년 12월 20일.
302)統理機務衙門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로 그 설치 경위와 조직 및 기능이 밝혀졌다.

全海宗,<統理機務衙門 設置의 經緯에 對하여>(≪歷史學報≫제17·18집 1962).

李光麟,<統理機務衙門의 組織과 機能>(≪開化派와 開化思想 硏究≫, 一潮閣, 1989).
303)≪備邊司謄錄≫261, 고종 17년(1880) 12월 7일.
304)≪備邊司謄錄≫261, 고종 17년 12월 17일.
305)≪備邊司謄錄≫261, 고종 17년 12월 20일.
306)全海宗, 앞의 글, 689쪽.

李光麟, 앞의 글, 6쪽.
307) 李光麟, 위의 글, 4∼11쪽.
308)≪承政院日記≫, 고종 18년 1월 17일·18일.
309)≪高宗實錄≫, 고종 18년 11월 9일.
310) 李光麟, 앞의 글, 12∼23쪽.
311) 위와 같음.
312)≪承政院日記≫, 고종 19년 6월 10·12일.
313)≪高宗實錄≫, 고종 18년 7월 25일.
314)≪高宗實錄≫, 고종 19년 11월 18일.
315)≪高宗實錄≫, 고종 19년 12월 4일.
316)≪高宗實錄≫, 고종 19년 12월 22일.
317) 李光麟,<開化·斥邪運動>(≪韓國史講座≫V, 一潮閣, 1981), 161쪽.
318)≪高宗實錄≫, 고종 21년 10월 21일.
319)≪高宗實錄≫, 고종 22년 5월 25일·6월 20일·8월 10일, 24년 4월 5일 참조.
320) 李鉉淙,<高宗때 減省廳 설치에 대하여>(≪金載元博士回甲紀念論叢≫, 1969).
321)≪高宗實錄≫, 고종 20년 9월 23일.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