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Ⅱ. 개화정책의 추진3. 제도의 개혁1) 정치·군사부문(2) 군사제도의 개혁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1. 개화파의 형성과 활동
          • 1) 개화파의 형성
          • 2) 개화파의 분화
          • 3) 개화파의 활동
            • (1) 통리기무아문의 설치(1880)
            • (2) 일본국정시찰단(신사유람단)의 파견(1881)
            • (3) 영선사(병기학습 유학생사절단)파견(1881)
            • (4) 신식 육군(별기군)의 창설(1881)
            • (5) 기무처의 설치(1882)
            • (6) 감생청의 설치(1882)
            • (7) 대외적 균세정책의 실시(1882)
            • (8) 해관의 설치(1882∼1883)
            • (9) 근대학교의 설립(1883)
            • (10) 근대신문의 발간(1883)
            • (11) 근대적 산업시설의 대두와 고취
        • 2. 개화사상의 발전
          • 1) 동도서기론의 대두
          • 2) 온건개화파의 개화사상
          • 3) 급진개화파의 개화사상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1. 개화정책의 추진세력
          • 1) 고종의 개화의지
          • 2) 개화파의 형성과 활동
          • 3) 개화추진세력의 분화
        • 2. 신문명의 도입
          • 1) 일본시찰단의 파견
            • (1) 파견계획의 수립
            • (2) 고종의 밀명
            • (3) 어떤 인물들인가
            • (4) 일본시찰 활동
            • (5) 일본견문 보고서
            • (6) 일본을 보는 두 개의 눈-엇갈리는 진단과 평가
          • 2) 청국유학생(영선사)의 파견
            • (1) 사행의 교섭
            • (2) 사행준비와 출발
            • (3) 학습상황
            • (4) 유학생의 철수
          • 3) 미국시찰단의 파견
            • (1) 조미조약의 체결
            • (2) 조선보빙사의 미국파견 및 일정
            • (3) 조선보빙사 파견의 성과
        • 3. 제도의 개혁
          • 1) 정치·군사부문
            • (1) 정부기구의 개편
            • (2) 군사제도의 개혁
          • 2) 경제부문
            • (1) 농업기술의 도입과 상업적 농업의 진흥
            • (2) 상업의 보호와 수세정책
            • (3) 전환국의 설립과 신식 화폐주조
          • 3) 문화·교육·사회부문
            • (1) 박문국의 설치와≪한성순보≫·≪한성주보≫의 간행
            • (2) 서구식 근대교육의 수용
            • (3) 근대적 우정·전신·전기시설
            • (4) 근대 의료시설
      • Ⅲ. 위정척사운동
        • 1. 위정척사사상의 대두
          • 1) 위정척사사상의 대두
          • 2) 위정척사사상의 보급
            • (1) 위정척사사상의 정립
            • (2) 위정척사사상의 심화와 확산
        • 2. 위정척사운동의 전개
          • 1) 병자년의 위정척사운동
          • 2) 신사년의 위정척사운동과 척사·개화논쟁
        • 3. 위정척사운동의 영향과 의의
          • 1) 위정척사운동의 영향
          • 2) 위정척사운동의 의미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1. 임오군란
          • 1) 임오군란의 배경
            • (1) 서울의 사회경제 구조와 하층민
            • (2) 하급 군병의 성격과 군제개편
            • (3) 하층민의 저항운동
          • 2) 임오군란의 전개과정
            • (1) 운동의 발생과 확산
            • (2) 정치적 차원에서의 운동의 실현
            • (3) 외세의 개입과 운동의 좌절
          • 3) 임오군란의 영향
            • (1) 일본의 국내 사정과 대조선정책의 변화
            • (2) 청의 대조선정책의 변화와 영향력 확대
            • (3) 국내 상황의 변화
          • 4) 임오군란의 구조와 성격
            • (1) 참가층의 구성과 동원조직
            • (2) 공격 목표와 요구의 한계
            • (3) 정부 및 지배층의 대응
        • 2. 조선중국상민수륙무역장정과 조·청관계의 변질
          • 1) 조선정부의 대청통상정책
          • 2) 조선중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과 조·청관계의 변질
            • (1) 조·청통상협의
            • (2)<조선중국상민수륙무역장정>체결과 조·청관계의 변질
      • Ⅴ. 갑신정변
        • 1. 갑신정변의 배경
          • 1) 구미열강과의 외교
          • 2) 차관교섭
          • 3) 집권파와의 대립과 위기의식
        • 2. 갑신정변의 주도세력
          • 1) 정변의 핵심세력
          • 2) 정변의 행동대원
        • 3. 갑신정변의 전개
          • 1) 정변 주도세력의 목표
          • 2) 갑신정변의 준비
            • (1) 개화당의 정변 무력문제
            • (2) 정변 단행의 결정
            • (3) 북청군대의 상경과 일부 유경
            • (4) 일본공사관 호위용 일본군의 차병
            • (5) 국왕의 밀칙 획득
            • (6) 행동계획의 최종 정리
          • 3) 개화정권의 수립
            • (1) 1884년 10월 17일 밤의 거사
            • (2) 신정부의 수립
            • (3) 개화파 신정부의 혁신정강 공포
          • 4) 청국 및 일본의 개입과 정변의 실패
          • 5) 갑신정변 실패의 요인
        • 4. 갑신정변의 영향과 의의
          • 1) 갑신정변의 영향
            • (1) 수구파정권의 재수립
            • (2) 개화당의 몰락과 숙청
            • (3) 조선·일본의 교섭과<한성조약>의 체결
            • (4) 청국·일본의 교섭과<천진조약>의 체결
          • 2) 갑신정변의 역사적 의의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2) 군사제도의 개혁
가. 군사편제의 변천

서구열강의 통상요구가 거세지는 가운데 집권한 대원군은 집권 붕당세력의 군사권 장악의 수단으로 활용되어, 왕권을 약화시키는 기구로 기능하고 있던 비변사의 권한을 축소하여 유명무실해졌던 의정부의 정치적 기능을 회복시키는 한편 삼군부를 부활시켜 군사·국방문제를 분담하게 하였다.322) 대원군은 삼군부를 의정부와 대등한 1품아문으로 승격시켜 병조에서 독립된 아문으로서 모든 軍令權을 장악하게 하였다. 이어 대원군은 세도정치기를 거치면서 허약해진 훈련도감·금위영·용호영·총융청·어영청 등 5군영의 중앙군을 개편 강화하여 국왕호위를 보강하는323) 한편 서양세력의 침입에 대비하여 경기연안에 포대시설을 강화하는 한편 강화부를 진무영으로 승격시키고 주변 요새에 포대와 포군을 배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북의 국경경비도 강화하였다.324) 그리고 각종의 무기를 구입하거나 개발하는데 진력하였다.325) 이러한 노력을 전개하던 대원군은 1873년 국왕의 친정을 주장하는 세력에 밀려 실각하였다.

대원군을 하야시킨 새 정부는 武衛所를 설치하여 국왕에 대한 호위를 강화하는 등 국왕친위군을 강화하였다.326) 그러나 외침에 대해서는 별다른 군비 강화책을 마련하지 못한 채 일본이 보낸 운양호의 무력시위에 굴복하여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새 정권은 조약의 체결로 일단 병화를 모면하였으나 계속되는 일본과 열강의 위협 속에 새로운 군사체제를 마련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술한 바와 같이 청나라에 새로운 군기제조의 방법을 가르쳐 주도록 청원하였다. 25명의 학도와 13명의 공장을 비롯한 69명의 인원이 김윤식의 인솔하에 天津機器局에 파견되어 신무기 제조기술을 학습하도록 조치되었다. 그러나 학도들은 근대적 기술을 받아들일 태세가 되어 있지 않았고 정부의 재정적 뒷받침도 부족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327) 다만 종사관 김명균이 천진에서 공장을 데리고 귀국하여 機器廠을 설치한 것에 만족하여야 했다.328)

조선의 재정은 강화도조약체결 이후 일본의 경제적 침탈이 심화되는 가운데 어려워지고 있었다. 특히 일본으로 많은 미곡이 유출됨으로써 미곡이 부족하여 군에 대한 녹봉미 지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조선정부는 이런 가운데 군사제도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1881년 5월 통리기무아문의 진언에 의하여 신식 군대로 별기군을 창설하였다. 수신사 김홍집을 수행하여 일본에 갔던 윤웅렬이 통리기무아문 군무사 경리당상 민겸호와 예조판서 홍우창을 설득하여 추진한 것이었다. 민겸호와 홍우창은 국왕에게 새로운 군사훈련의 필요성을 건의하였고, 일본공사관 공병 소위 호리모토(掘本禮造)를 교관으로 초빙하여 5영의 군인 중에서 80여 명을 선발하여 훈련을 실시하였다.329) 한편 구식 군대의 편제도 개혁을 추진하였다. 1882년 2월 통리기무아문은 7조로 된<各軍門變通節目>을 마련하여 국왕에게 상주하였다. 즉 종래의 무위소·훈련도감·용호영·호위청을 합하여 무위영으로, 금위영 어영청·총융청을 합하여 장어영으로 하는 2영체제로 축소 조정하였다.330)

이러한 군제개혁은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다. 무위영 소속의 별기군은 일본교관의 교도 아래 구식 군인과는 달리 국왕의 근위병으로, 민씨 척족의 사병과 같이 여겨져 우대되었다.331) 이에 구식 군대 소속의 군인들은 불만을 나타내었다. 13개월이나 밀렸던 녹봉미를 지급하는 과정에서 불만을 터뜨린 구훈련도감 군인들을 중심으로 폭동이 일어나 민겸호와 이최응을 비롯한 고관들이 습격을 당하여 희생되고 민비는 충주로 피신하였다. 별기군의 일본인 교관 掘本禮造도 희생되었다. 임오군란이라고 불리는 이 난을 계기로 대원군이 다시 정권을 잡게되었다.332)

임오군란 후 고종은 무위영을 訓局으로 바꾸게 하고 각 營도 복구토록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5군영제는 다시 개편되었다. 청은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군대를 파견하여 대원군을 납치하였다. 그리고 종주권을 내세워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였다. 특히 군제개편은 군란 뒤 서울에 진주한 청국 광동수사제독 吳長慶의 막료 袁世凱의 주도하에 진행되었다. 오장경 휘하의 원세개가 조선의 장정 1,000여 명을 선발하여 1隊는 王得功을 시켜 훈련원에서 교련하고, 또 다른 1대는 朱先民·何增珠 등 청군 장교들을 교관으로 삼아 東營에서 훈련하였다. 이를 新建親軍이라 하는데, 전자는 좌영으로 이조연을, 후자는 우영으로 윤태준을 감독으로 임명하였다. 뒤이어 1883년 10월 23일 교련소를 설치하여 박영효가 廣州에서 양성하던 南漢敎鍊兵隊를 친군 전영으로 재편하고, 1884년 7월 22일 연융대에 이주한 부대를 친군 후영으로 하여 이른바 친군 4영이 성립되었다. 이들 전영과 후영은 일본식으로 훈련된 병사들로 구성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좌·우영군과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였다.333) 또 그동안 舊京軍4營(용호영·금위영·어영청·총융청)의 군이 1884년 8월 29일 친군 4영에 옮겨 같이 훈련을 받다가 이들 중 금위영과 어영청 군을 합하여 친군 별영으로 조직되었다. 이로써 중앙군인 경군은 형식적으로는 비록 군무사 조련국에 의해 통할 절제되었으나 완전히 청군식으로 편제되고 청군에 의해 훈련되었다.334) 무기는 이홍장에게 요청하여 천진기기국으로부터 구제 12방, 청동포 10문, 영국제 시조총 1,000정과 탄약 등을 공급받아 훈련에 사용하였다.335)

이후 미국으로부터 군사교관을 초빙한 조선정부는 다시 군제개혁을 단행하였다. 미국의 다이장군 등 4명의 군사교관이 도착한 뒤인 1888년 5월 11일 국왕은 총리내무부사 심순택·김홍집을 소견하여 군제변통을 詢議하였다. 청의 간섭 아래 좌·우·전·후 4영 외에 별영, 해방영 등이 설치되었는데, 각 영이 분치되어 군비가 과다하게 지출되고 또 영마다 5백명은 훈련규칙에도 적합하지 않으니 개혁하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청의 간섭하에 설치되었던 군영들은 장위영·통위영·총어영의 3영으로 축소 조정되었다. 즉 우영 후영 해방영을 합하여 통위영, 전영과 좌영을 합하여 장위영, 별영을 총어영으로 개편하였다. 그리고 1891년 2월 왕명에 의하여 경리청이 복설되었다336). 이는 수도 외곽 방비의 요충지인 蕩春臺와 北漢山城의 수비를 전담하는 군영으로 처음에 통위영에 속해 있던 전 총융군을 다시 분리하여 편성한 것이었다.337) 이듬해 용호영·총어영·경리청은 합하여 친군으로 불리게 되었다.338)

군제개혁은 주로 중앙군 중심으로 이루어져 지방군은 별다른 발전을 이루지 못하였다. 다만 중앙군이 차츰 신식 군대화함에 따라 지방 요지의 군대는 친군영체제로 신식 군대화하게 되었다. 강화도에 친군 심영, 평안도에 친군 서영, 경상도에 친군 남영 등을 두어 친군영체제를 본받아 훈련하게 하고, 때로는 상경하여 중앙군과 함께 훈련하도록 했으나, 지방은 갑오개혁에 이전까지 그대로 鎭軍이 수비를 담당하였다.339)

322)≪承政院日記≫, 고종 2년 3월 28일·5월 26일, 5년 3월 23일·6월 8일·6월 18일 참조.
323) 車文燮,<舊韓末 軍事制度의 變遷>(≪軍史≫5, 1982), 24∼48쪽.
324)≪高宗實錄≫, 고종 8년 1월 25일·5월 25일.
325)李瑄根,<國防對策과 軍制改革>(震檀學會 編,≪韓國史≫最近世篇, 乙酉文化社, 1973), 208∼218쪽.
326) 車文燮, 앞의 글, 29쪽.
327)權錫奉,<領選使行에 對한 一考察>(≪歷史學報≫17·18, 1062), 277∼312쪽.
328) 金允植,≪陰晴史≫(國史編纂委員會, 1958), 225쪽.
329) 李光麟,<別技軍의 설치>(앞의 책, 1989), 15∼16쪽.
330) 李光麟,<軍制改編>(위의 책), 20∼21쪽.
331)林在讚,<開化期 軍制改編에 대하여>(≪考古歷史學志≫5·6, 東亞大 博物館, 1990), 359∼375쪽.
332) 李光麟,<壬午軍亂>(앞의 책, 1981), 145∼149쪽참조.
333)崔炳鈺,<壬午軍亂後 親軍制의 成立과 그 矛盾>(≪軍史≫26, 1993), 76∼119쪽.
334) 林在讚, 앞의 글, 364∼365쪽.
335)≪高宗時代史≫Ⅱ(國史編纂委員會, 1968), 396쪽.
336)≪高宗實錄≫, 고종 25년 4월 19일, 28년 2월 27일 참조.
337) 林在讚, 앞의 글, 366쪽.
338)≪高宗實錄≫, 고종 29년 9월 17일.
339) 車文燮, 앞의 글, 34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