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사관 양성제도의 마련
조선정부는 신식 군사지휘관인 사관을 양성하기 위하여 1882년 12월 서재필을 비롯한 14명의 청년을 선발하여 일본 동경의 陸軍戶山學校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갑신정변을 추진하던 김옥균 일파의 소환으로 교육을 받기 시작한 지 일년 좀 넘어 귀국하였다. 개화당 요인들은 1884년 7월 서재필 등 유학갔던 사관생도 14명이 일본에서 귀국하자 국왕에게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그들을 수용하도록 건의하였다. 또 창덕궁으로 불려가 교련과 체조 등을 시범하여 국왕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사관생도들이 국왕에게 사관학교 설립을 간청하자, 고종은 이를 받아들여 조련국을 설치하고 서재필을 사관장으로 임명하고 사관학교 설립을 추진토록 하였다. 이 는 청국군의 압력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340)
조선의 사관양성제도는 미국으로부터 군사교관이 초빙되어 온 1888년에 이르러 연무공원이 설립됨으로써 드디어 정식 출범하게 되었다. 1882년 미국과 수호조약을 체결한 조선정부는 미국에 대하여 군사교관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후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1884년 4월 미국으로부터 다이준장, 커민스대령, 리소령, 그리고 일본에 있던 예비역 해군 대령 닌스테드가 고빙되어 부임하였다.341)
미국 군사교관의 부임에 앞서 국왕 고종은 1888년 1월(음력 1887년 12월) 16세 이상 27세 이하로 훈련받을 학생을 우선 천거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한 달 뒤에는 연무공원 설치에 관한 조서를 내리고 그 시행에 다른 제반규칙에 관한 자세한 절목을 만들어 바치도록 내무부에 명령하였다. 국왕의 명에 따라 내무부는 일차로 40명의 청년을 선발하여 장교교육을 시키는 한편 같은 해 6월<연무공원직제절목>을 만들어 바쳤다. 한편 국왕은 연무공원을 운영할 관리들을 임명함으로써 운영체계를 갖추게 되었다.342)
이렇게 출발한 연무공원은 초기 얼마 동안은 활기에 넘쳐 있었다. 일차로 선발된 40명의 연무공원 학도들은 새로운 제복을 입고 장차 새로운 군대의 장교가 될 희망으로 열심히 교육에 임하였다. 그들의 열성적인 관심과 소질은 교관들에게 큰 자극을 줄 정도였다. 그리고 정부는 이들 연무공원 학도들에게 각종 신식 무기의 사용법을 체득시키기 위하여 신식 무기를 구입하였다. 즉 고종 25년(1888년) 9월 21 조선정부는 각국 공사에게 공문을 보내 연무학도들에게 보여주려고 하니 각국에서 현재 사용하는 무기를 한 자루씩 신속히 구입해 보내주도록 협조를 요청하였다. 이 결과 미국 일본·독일·러시아의 무기들이 수입되어 연무공원 학도들의 군사훈련에 이용되었다.343)
그러나 연무공원의 운영은 점차 부진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정부의 재정난, 담당관료들의 무능과 부패, 담당관료와 교관들간의 불화, 기성 군인과 원세개 등의 방해공작 등으로 교관과 학생들은 점차 의욕을 상실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운영이 지지부진하던 연무공원은 동학농민전쟁을 계기로 조선에 진출한 일본군이 1894년 7월 조선군을 무장해제 시키는 한편 신식 무기를 약탈한 뒤 개혁을 강요함으로써 자연히 없어지게 되었다.344)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무공원은 근대한국군제사에서 일정한 위치를 점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895년 을미사변 1개월 뒤 친일 훈련대가 해산되고 친위대가 설치되었을 당시 연무공원 출신 인 이범래가 참령으로 제1대대장, 이진호가 참령으로 제2대대장, 남만리가 중대장으로 임명되어 국왕친위대의 요직을 독점했던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고 할 것이다. 열강의 각축에 따른 정세의 변화로 상당수의 연무공원 출신들이 희생되었으나 연무공원교육을 통해 이루어진 미국식 훈련규칙과 작전법 등이 상당기간 근대 초기 한국군훈련에 계속 적용되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