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갑신정변 실패의 요인
갑신정변 실패의 요인으로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으나, 특히 다음의 요인들이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청군의 불법적 범궐과 군사적 공격이다. 청군은 국왕의 요청도 없고 조선정부의 반대와 항의에도 불구하고 서울에 주둔시킨 1,500명의 병력을 총동원하여 조선왕국의 궁궐을 침범해서 군사적 공격을 자행함으로써 개화당의 신정부를 무력으로 붕괴시켰다. 이것은 조선의 주권을 완전히 무시한 처사였으며, 전적으로 불법적 궁궐침입이었고, 군사적 만행이었다.
둘째는 개화당의 일본군 차용과 일본군의 철병이다. 개화당은 일본공사관의 호위병력 150명을 빌려다 개화당의 부족한 무력을 보충하려 하여 “일본공사는 와서 짐을 호위하라”897)는 국왕의 친필 명령서까지 받아다가 합법적으로 일본군을 정변에 끌어들였다. 김옥균 등 개화당은 당시의 국제적 모순을 이용하여 일본군을 차용해서 청군의 공격에 대해서는 일본군으로 이를 견제하여 막고, 국내 수구파는 국내 개화당이 맡는다는 전술을 택했으나 이것은 적중한 것이 되지 못하였다. 일본군 무력은 결정적 순간에 개화당의 기대를 배신하여 국왕을 호위하지 않고 철병해 버림으로써 정변 전체를 와해시키는데 크게 작용하였다.
일본측이 정변 직전에 조선 개화당에 추파를 던져 온 것은 개화당을 도와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개화당을 침략의 통로로 이용하려 한 것 뿐이었고, 정작 개화당이 집권하여 조선이 자주부강한 근대국가로 발전하는 것은 그들이 바라지 않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일본측은 征韓論 이래 침략의 기회를 기다리던 대상인 조선이 강대한 근대국가가 되면 침략이 불가능하게 될 뿐 아니라, 동아시아에 또 하나의 근대국가가 건설되어 그들의 경쟁국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개화당이 정변을 자기 힘으로서만 하지 않고 침략의도를 가진 외국 특히 일본의 무력을 빌린 것은 개화당의 큰 실책이었다. 이것은 정변 그 자체를 실패케 한 가장 큰 요인의 하나가 되었고, 조선 백성들에게도 개화당은 친일파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과 비난을 자초한 요인이 되었다.
셋째는 백성들로부터 지지의 결여이다. 당시 조선 백성들은 왜 정변까지 일으켜 가면서 시급히 ‘개화’를 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했으므로 개화당의 정변에 냉담하였다. 당시 청군의 무장력은 근대적 소총 수준의 것이었으므로, 만일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만 있었다면 서울 시내의 청·장년들만 개화당을 지지하여 함께 봉기해도 청군의 군사개입은 저지될 수 있는 것이었으나, 백성들은 개화당의 정변에 시종일관 냉담하였다. 백성들은 오히려 갑신정변을 양반귀족들 사이의 권력쟁탈전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일부 개화당을 친일파로 오인한 백성들은 개화당을 공격하는데 가담하기도 하였다.
갑신정변같이 체제를 변혁하려는 급격한 운동은 그에 앞서 지지해 줄 민중을 계몽하는 운동을 선행시켜야 하는데, 계몽운동을 선행시키지 않은 정변이 민중의 지지를 얻어 성공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넷째는 시민층의 미성숙이다. 개화당 신정부의 혁신정강과 개화정책은 근대 시민적인 것이었으며, 시민계층의 이해관계에 가장 잘 합치하고, 시민계층에 우선적으로 지원적인 내용의 것이었다. 따라서 시민계층만 성장해 있었으면 정변은 확고한 지지층을 갖고 성공할 수 있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한국사회의 근대 시민층은 대두하기 시작하고 있기는 했으나 아직 미성숙하여 개화당의 지지세력을 형성하기는 전혀 불가능하였다.898) 개화당의 신정부가 확고한 지지층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이 정변 실패의 한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다섯째, 개화당의 준비 부족과 정변 기술의 부족을 들 수 있다. 정변은 군사무력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인데, 개화당은 청군 1,500명을 압도할 수 있는 조선군 무력 준비가 부족하였다. 친군영 전·후·좌·우의 4영 중에서 전영만 확고하게 장악하였고, 후영은 북청병정 외에는 충분하게 장악하지 못하였다. 또한 개화당은 친군영 좌영과 우영은 전혀 장악하지 못한 결과, 정변 도중 대세가 청군에게 유리하게 기울자 좌영과 우영 조선군 병사들은 원세개의 지휘를 받는 형편이었다. 조선군을 비밀리에 사전 장악하는 준비가 크게 미흡했던 것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정변이 성공하기는 어려웠다.
또한 개화당은 민비의 동태를 잘 감시하지 못하였고, 경기관찰사 심상훈에게는 속아 넘어가서 그를 개화파 동정자로 오해하여 궁궐 무상출입을 허용하였다. 그 결과 심상훈은 청군측과 민비 사이에 연락을 담당해서 국왕의 처소를 방어가 쉬운 경우궁으로부터 방어가 어려운 창덕궁으로 옮기게 작용했으며, 개화당의 통신과 연락을 방해하는데 크게 작용하게 되었다. 이것은 개화당의 정변 준비와 기술의 부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요인들이 복합되어 조선의 선진 개화독립당 청년들이 조선왕국에 대하여 청국이 적극적으로 간섭하는 속방화정책을 끊어버리고 자주부강한 근대국가를 건설하려는 목표로 일으킨 갑신정변은 일단 집권에는 성공했으나 신정부를 수립한 지 3일 만에 결국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愼鏞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