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4. 사회신분제의 동요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1. 청의 간섭
          • 1) 청의 주차관 임명
          • 2) 청의 외교 및 내정간섭
          • 3) 청의 경제이권 확장
          • 4) 경제적 영향
        • 2. 조선의 대외관계
          • 1) 조·일관계
          • 2) 조·미관계
          • 3) 조·러관계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1. 통치기구의 재정비
        • 2. 민씨척족정권의 시정
        • 3. 독립외교의 추진
        • 4. 개화정책의 추진과 좌절
        • 5. 외국인 고문의 고빙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1. 개항 후의 국제무역
          • 1) 불평등조약 체계의 성립
            • (1) 일본에 의한 개항과 무관세무역
            • (2) 청의 속방화정책과 불평등조약체계의 성립
          • 2) 국제무역의 추이(1876∼1894)
            • (1) 개항 이전의 국제무역
            • (2) 일본의 독점무역기(1876∼1882)
            • (3) 청·일 경쟁무역기(1883∼1894)
          • 3) 외국 상인의 침투와 조선 상인층의 대응
            • (1) 일본 독점무역기(1876∼1882)
            • (2) 청·일 경쟁무역기(1883∼1894)
            • (3) 조선상인층의 대응과 변모
        • 2. 국내적 상품유통의 변동
        • 3. 방곡령실시의 사례와 원인
          • 1) 제1기(1876∼1884)
          • 2) 제2기(1884∼1894)
          • 3) 제3기(1895∼1904)
        • 4. 사회신분제의 동요
          • 1) 노비제의 변화
            • (1) 제도적 변화
            • (2) 노비 호구의 변화
          • 2) 중간신분층의 동향
          • 3) 양반 신분의 동향
            • (1) 양반 호구의 변화
            • (2) 양반 신분의 동요와 분화
        • 5. 개항기 지주제와 농업경영
          • 1) 개항 후 농업변동의 요인
            • (1) 통상무역의 확대와 농촌사회
            • (2) 정부 지배층의 농업문제 인식과 농업정책
          • 2) 지주제의 유형과 동향
          • 3) 농업생산과 지대의 변화
          • 4) 1894년 이후 지주제 전망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1. 동학농민전쟁의 사회경제적 배경
          • 1) 개항 이후 미곡수출의 증대와 지주경영의 강화
          • 2) 일·청상의 침투와 제국주의적 상품유통구조의 창출
          • 3) 부세운영의 변화와 농민몰락의 심화
          • 4) 향촌사회의 변동과 농민항쟁의 고양
        • 2. 동학교조 신원운동
          • 1) 동학교단의 조직과 운영
          • 2) 교조신원운동의 전개
            • (1) 공주취회
            • (2) 삼례취회
            • (3) 광화문복소와 척왜양방문 게시운동
            • (4) 보은취회와 금구취당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1. 동학농민군의 봉기
          • 1) 고부민란
            • (1) 고부민란의 배경
            • (2) ‘사발통문’ 거사계획
            • (3) 고부민란의 전개
            • (4) 관권의 대응
            • (5) 고부민란의 농민전쟁으로의 발전
          • 2) 전봉준의 기병과 격문
            • (1) 무장기포
            • (2) 고부점령
            • (3) 백산대회
        • 2. 동학농민군의 격전
          • 1) 관군의 남하와 황토현·장성전투
            • (1) 농민군의 진군과 감영군의 출동
            • (2) 황토현전투
            • (3) 경군의 남하와 농민군의 남행
            • (4) 장성전투
          • 2) 전주성의 점령과 화약
            • (1) 전주성 점령
            • (2) 완산전투
            • (3) 전주화약
        • 3.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 요구
          • 1) 조세수취체제에 대하여
            • (1) 조세수취제도 전반에 관하여
            • (2) 전정에 관한 요구조항
            • (3) 군정에 관한 요구조항
            • (4) 환곡에 관한 요구조항
            • (5) 잡세·잡역에 관한 요구조항
            • (6) 전운영에 관한 조항
            • (7) 탐관오리에 관한 요구조항
          • 2) 무역·상업 문제에 대하여
            • (1) 일본의 경제적 침투에 대하여
            • (2) 국내상업문제에 대하여
          • 3) 기타 정치적 요구조항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1. 집강소의 설치
          • 1) 휴전과 집강소의 설치(5월 8일∼6월 15일경)
          • 2) 집강소 설치의 전면화(6월 15일경∼7월 5일)
          • 3) 집강소의 공인 (7월 6일∼10월)
        • 2. 집강소의 구성과 조직
        • 3. 집강소의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1. 동학농민군의 재기
          • 1) 남접농민군의 재기
          • 2) 북접농민군의 기포
        • 2. 반일투쟁의 전개
          • 1) 반일투쟁의 발발
          • 2) 남·북접 연합과 봉기의 확산
          • 3) 관군 및 일본군의 남하
          • 4) 농민군의 북상과 공주전투
          • 5) 항일연합전선의 추진
          • 6) 농민군의 후퇴와 농민전쟁의 좌절
        • 3. 동학농민전쟁의 역사적 의의
          • 1) 결합의 유대
          • 2) 경제적 지향
          • 3) 국가·민족·국민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2) 중간신분층의 동향

 서얼은 15세기 후반 이래 법과 관습의 양 측면에서 규제되고 차대되는 확고한 하나의 신분으로 성립되었다. 서얼은≪경국대전≫의 규정에 의하여 과거응시자격을 박탈당하였다. ‘勿許赴擧’에 의한 서얼금고는 서얼의 양반 신분에의 참여 가능성을 봉쇄한 것으로, 嫡子孫들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신분을 성립시킨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관직에 진출한 서얼에 대해서는 限品叙用과 雜職叙用의 제약을 가함으로써 양반 신분에의 참여 가능성을 더욱 철저히 봉쇄하였다. 이와 같은 仕宦의 제한은 신분으로서의 서얼이 당면하게 된 일차적 문제였고, 이는 ‘許通’과 ‘通淸’의 문제로 집약되었다.

 서얼 신분에게 가해진 사환의 제한은 순서상 허통의 문제로부터 완화되기 시작하였다. 일찍이 명종 8년(1553) 양첩자의 아들대부터 허통하는 조치가 있은 후, 인조 3년(1625)에는 다시 천첩자의 손자대부터 허통되었다. 이후 숙종 22년(1696)에 이르러 앞서 선조 16년(1583) 이후부터 양첩의 아들과 천첩의 아들·손자에게 적용하였던 ‘納米許通’의 조건을 폐지함으로써 ‘물허부거’의 문제는 일단 해소되었다. 또한 이 때 서얼 신분이 과거에 나아갈 때 허통 또는 서얼로 표기하던 직역 명칭도 業儒(文)·業武(武)로 바꾸되 양첩의 손자와 천첩의 증손부터는 幼學을 칭하도록 허용하였다. 직역 명칭에 대한 규제는 숙종 34년(1708) 경부터 서얼 당자만 업유·업무를 칭하고 그 아들부터는 幼學을 사용해도 무방하도록 허용함으로써 더욱 완화되었다. 이와 같이 17세기 말엽에 이르면 서얼 허통의 문제는 법제적 수준에서는 대개 해결 국면에 들게 된다.

 그러나 통청의 문제, 즉 과거나 음서를 통해 관직에 나아간 서얼에게 가해진 제약이 해소되는 데는 좀 더 긴 시간이 필요하였다. 인조 3년(1625)에 ‘요직은 허용하나 청직은 불허한다(許要而不許淸)’는 원칙을 세워 戶·刑·工曹의 낭관에 서얼 출신도 서용할 수 있도록 하였지만 실제 임용된 사례는 희소하였다.0462) 이후 18·19세기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된 서얼통청운동과 맞물려 제약이 완화되어 갔다.0463) 정조 원년(1777)의<丁酉節目>에서 문관은 호·형·공 3조(참상관)와 直講, 무관은 五衛將·中樞·虞候 등을 허용하였고, 지방 수령도 목사(문무당상)·부사(문무당하)·군수(生進·蔭)·현령(未生進·引儀出身) 등에 차등을 두어 임명될 수 있게 하였다. 순조 23년(1823)의<癸未節目>에서는 限品을 종2품으로 상향 조정하고, 문관은 左尹·右尹과 호·형·공 3조의 참의 및 臺職, 음관은 목사, 무관은 병사를 허용하였다.<계미절목>은<정유절목>에 비하여 疏通 범위가 다소 넓혀지고 비록 臺官에 한한 것이긴 하지만 淸職에도 진출할 수 있도록 배려되어 있다. 다시 철종 2년(1851)에는 서얼도 사족과 같이 ‘文槐武宣’ 즉 문과 급제자는 承文院에 分館하고 무과 급제자는 宣傳官廳에 薦望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제약이 더욱 완화되었다.

 한편, 17세기 초 인조 대에 이르러 중인 신분이 기술직의 세습화 경향과 ‘淸職에의 枳塞’ 관행을 배경으로 양반과 구별되는 중인의 명호를 얻게 되면서 하나의 신분으로 성립되었다. 중인은 19세기 후반에도 그 品第와 等級이 서얼과 엇비슷하여 ‘中庶’라 통칭되고 있었다.0464) 이들은 서얼이 통청운동을 통해 신분상황을 개선해 나가는 데 자극 받아, 철종 2년 서얼의 ‘문괴무선’ 허용 조치를 계기로 한 때 대대적인 통청운동을 전개하려는 노력을 펴기도 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0465) 중인은 운동의 실패를 우려해서 자제할 만큼 현실적으로 누리고 있던 이익 또한 적지 않게 가지고 있던 신분이었다.0466) 중인은 다른 신분층에 비해서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상층에 속하는 역관·의관 등은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형성하거나 사신 행차의 수행원으로서 국제 정세에 관한 상당한 식견을 지니기도 하였다. 김옥균 일파를 지도하는 입장에서 개화사상의 형성과 전파에 공헌하였던 吳慶錫(역관)·劉鴻基(의관)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향리의 경우, 조선 후기에 오면서 내부 3계층의 위계질서 즉 三壇에 대한 언급은 사라지고 그 대신 향리와 ‘假吏’의 구분이 강조되었다. 18세기 초반까지 가리층은 주로 노비로 충원되었지만 이후로는 양민층이 대거 참여하는 양상을 보인다.0467) 가리의 향리직으로의 활발한 진입으로 인해 향리 직임을 둘러싸고 경쟁·대립이 격화되어 가고, 그만큼 입지가 좁아진 기존 향리층은 이들의 진입이나 득세를 막기 위해 각종 完議나 節目을 만들어 향리와 가리의 구분을 강조하였다. 또한 향리 가문 내에서도 향리직에 계속 참여하는 경우와 탈락하는 경우로 분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에 따라 같은 향리 가문 내에서도 향리와 유학 등 다른 신분직역이 혼재되는 경우도 나타난다. 이는 사족층의 입지가 점차 약화되어 가고 있던 당시 현실상황에서는 경제적 이권이 많은 향리직을 고수하는 것이 오히려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0468) 다른 한편, 호장·육방·색리층 간의 엄격한 위계관계도 무너져가고 각 직임이 가지는 현실적 힘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 향리층은 조선 후기의 사회변화 속에서 이미 구조화·관행화된 중간수탈구조를 형성하고 있었고0469) 이들은 지방행정에 능통한 점을 악용하여 수령과 밀착해 가면서 鄕廳(鄕所)의 통제도 벗어나고 있었다.

 중간신분층은 임오군란 직후인 고종 19년(1882) 7월에 이르러 왕이 門地와 귀천을 가리지 않고 “西北·松都·庶孽·醫譯·胥吏·軍伍를 顯職에 通用한다”0470)는 방침을 천명함으로써 관직 진출의 면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고종 년간에 서얼로서 淸顯에 이른 자로 첫 손에 꼽는 李祖淵이 청요직에 진출하여 이조참판의 망에 들고 左營使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임오년 이후였다.0471) 또한 1894년 갑오개혁에 참여한 소장 관료 가운데 서얼(金嘉鎭·安駉壽·權在衡·李允用·尹致昊), 중인(鄭秉夏·高永喜·吳世昌), 토반(金鶴羽·張博) 등 한미한 신분배경을 가진 ‘亞流兩班’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었다.0472) 특히 이들 중 서얼 출신인 金嘉鎭·權在衡·安駉壽 등은 각각 공부·군부·탁지부의 협판직을 맡아 개혁을 적극 추진하는 위치에 있었다.0473)

 이처럼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중간신분층, 그 중에서도 특히 서얼의 신분적 지위가 많이 개선되어 사환의 제한에 관한 법적 제약은 거의 해소되었다. 그러나 서얼의 경우, 관의 지배 영역에서 가해졌던 제약이 완화되어 갔던 것과는 달리 사회 관습의 영역에서는 차대가 엄연히 존재하였고 오히려 더욱 심화되어가는 일면도 있었다.0474)

0462)≪英祖實錄≫2, 영조 즉위년 12월 병술.
0463)李鍾日,<18·19세기의 庶孼疏通運動에 대하여>(≪韓國史硏究≫58, 1987).
0464)黃 玹,≪梅泉野錄≫권 1, (≪黃玹全集(下)≫, 亞細亞文化社, 1978), 93쪽.
0465)韓永愚,<朝鮮時代 中人의 身分·階級的 性格>(≪韓國文化≫9, 1988).
0466)金弼東,<중인 신분의 형성과 발전>(≪차별과 연대-조선 사회의 신분과 조직-≫, 문학과지성사, 1999), 133쪽.
0467)金俊亨,<朝鮮後期 蔚山 地域의 鄕吏層 變動>(≪韓國史硏究≫56, 1987).
0468)崔承熙,<朝鮮後期 鄕吏身分移動與否考 2>(≪韓國文化≫4, 1983).
0469)張東杓,<18∼19세기 吏額增加의 현상에 관한 硏究>(≪釜大史學≫9, 1985).
0470)≪高宗實錄≫19, 고종 19년 7월 22일.
0471)黃 玹, 위의 책, 79쪽.
0472)柳永益,<甲午更張과 社會制度 改革>(朱甫暾 외,≪韓國社會發展史論≫, 一潮閣, 1992), 238쪽.
0473)서얼 출신으로 갑오년 이후 大官에 이른 사람들로는 李祖淵을 비롯 李範晋·金嘉鎭·閔致憲·閔商鎬·閔泳綺·李允用·尹雄烈·安駉壽·金永準 등이 꼽힌다. 黃玹, 위의 책, 93쪽.
0474)宋俊浩,<朝鮮時代의 科擧와 兩班 및 良人>(≪歷史學報≫69, 1976), 123∼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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