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중간신분층의 동향
서얼은 15세기 후반 이래 법과 관습의 양 측면에서 규제되고 차대되는 확고한 하나의 신분으로 성립되었다. 서얼은≪경국대전≫의 규정에 의하여 과거응시자격을 박탈당하였다. ‘勿許赴擧’에 의한 서얼금고는 서얼의 양반 신분에의 참여 가능성을 봉쇄한 것으로, 嫡子孫들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신분을 성립시킨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관직에 진출한 서얼에 대해서는 限品叙用과 雜職叙用의 제약을 가함으로써 양반 신분에의 참여 가능성을 더욱 철저히 봉쇄하였다. 이와 같은 仕宦의 제한은 신분으로서의 서얼이 당면하게 된 일차적 문제였고, 이는 ‘許通’과 ‘通淸’의 문제로 집약되었다.
서얼 신분에게 가해진 사환의 제한은 순서상 허통의 문제로부터 완화되기 시작하였다. 일찍이 명종 8년(1553) 양첩자의 아들대부터 허통하는 조치가 있은 후, 인조 3년(1625)에는 다시 천첩자의 손자대부터 허통되었다. 이후 숙종 22년(1696)에 이르러 앞서 선조 16년(1583) 이후부터 양첩의 아들과 천첩의 아들·손자에게 적용하였던 ‘納米許通’의 조건을 폐지함으로써 ‘물허부거’의 문제는 일단 해소되었다. 또한 이 때 서얼 신분이 과거에 나아갈 때 허통 또는 서얼로 표기하던 직역 명칭도 業儒(文)·業武(武)로 바꾸되 양첩의 손자와 천첩의 증손부터는 幼學을 칭하도록 허용하였다. 직역 명칭에 대한 규제는 숙종 34년(1708) 경부터 서얼 당자만 업유·업무를 칭하고 그 아들부터는 幼學을 사용해도 무방하도록 허용함으로써 더욱 완화되었다. 이와 같이 17세기 말엽에 이르면 서얼 허통의 문제는 법제적 수준에서는 대개 해결 국면에 들게 된다.
그러나 통청의 문제, 즉 과거나 음서를 통해 관직에 나아간 서얼에게 가해진 제약이 해소되는 데는 좀 더 긴 시간이 필요하였다. 인조 3년(1625)에 ‘요직은 허용하나 청직은 불허한다(許要而不許淸)’는 원칙을 세워 戶·刑·工曹의 낭관에 서얼 출신도 서용할 수 있도록 하였지만 실제 임용된 사례는 희소하였다.0462) 이후 18·19세기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된 서얼통청운동과 맞물려 제약이 완화되어 갔다.0463) 정조 원년(1777)의<丁酉節目>에서 문관은 호·형·공 3조(참상관)와 直講, 무관은 五衛將·中樞·虞候 등을 허용하였고, 지방 수령도 목사(문무당상)·부사(문무당하)·군수(生進·蔭)·현령(未生進·引儀出身) 등에 차등을 두어 임명될 수 있게 하였다. 순조 23년(1823)의<癸未節目>에서는 限品을 종2품으로 상향 조정하고, 문관은 左尹·右尹과 호·형·공 3조의 참의 및 臺職, 음관은 목사, 무관은 병사를 허용하였다.<계미절목>은<정유절목>에 비하여 疏通 범위가 다소 넓혀지고 비록 臺官에 한한 것이긴 하지만 淸職에도 진출할 수 있도록 배려되어 있다. 다시 철종 2년(1851)에는 서얼도 사족과 같이 ‘文槐武宣’ 즉 문과 급제자는 承文院에 分館하고 무과 급제자는 宣傳官廳에 薦望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제약이 더욱 완화되었다.
한편, 17세기 초 인조 대에 이르러 중인 신분이 기술직의 세습화 경향과 ‘淸職에의 枳塞’ 관행을 배경으로 양반과 구별되는 중인의 명호를 얻게 되면서 하나의 신분으로 성립되었다. 중인은 19세기 후반에도 그 品第와 等級이 서얼과 엇비슷하여 ‘中庶’라 통칭되고 있었다.0464) 이들은 서얼이 통청운동을 통해 신분상황을 개선해 나가는 데 자극 받아, 철종 2년 서얼의 ‘문괴무선’ 허용 조치를 계기로 한 때 대대적인 통청운동을 전개하려는 노력을 펴기도 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0465) 중인은 운동의 실패를 우려해서 자제할 만큼 현실적으로 누리고 있던 이익 또한 적지 않게 가지고 있던 신분이었다.0466) 중인은 다른 신분층에 비해서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상층에 속하는 역관·의관 등은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형성하거나 사신 행차의 수행원으로서 국제 정세에 관한 상당한 식견을 지니기도 하였다. 김옥균 일파를 지도하는 입장에서 개화사상의 형성과 전파에 공헌하였던 吳慶錫(역관)·劉鴻基(의관)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향리의 경우, 조선 후기에 오면서 내부 3계층의 위계질서 즉 三壇에 대한 언급은 사라지고 그 대신 향리와 ‘假吏’의 구분이 강조되었다. 18세기 초반까지 가리층은 주로 노비로 충원되었지만 이후로는 양민층이 대거 참여하는 양상을 보인다.0467) 가리의 향리직으로의 활발한 진입으로 인해 향리 직임을 둘러싸고 경쟁·대립이 격화되어 가고, 그만큼 입지가 좁아진 기존 향리층은 이들의 진입이나 득세를 막기 위해 각종 完議나 節目을 만들어 향리와 가리의 구분을 강조하였다. 또한 향리 가문 내에서도 향리직에 계속 참여하는 경우와 탈락하는 경우로 분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에 따라 같은 향리 가문 내에서도 향리와 유학 등 다른 신분직역이 혼재되는 경우도 나타난다. 이는 사족층의 입지가 점차 약화되어 가고 있던 당시 현실상황에서는 경제적 이권이 많은 향리직을 고수하는 것이 오히려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0468) 다른 한편, 호장·육방·색리층 간의 엄격한 위계관계도 무너져가고 각 직임이 가지는 현실적 힘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 향리층은 조선 후기의 사회변화 속에서 이미 구조화·관행화된 중간수탈구조를 형성하고 있었고0469) 이들은 지방행정에 능통한 점을 악용하여 수령과 밀착해 가면서 鄕廳(鄕所)의 통제도 벗어나고 있었다.
중간신분층은 임오군란 직후인 고종 19년(1882) 7월에 이르러 왕이 門地와 귀천을 가리지 않고 “西北·松都·庶孽·醫譯·胥吏·軍伍를 顯職에 通用한다”0470)는 방침을 천명함으로써 관직 진출의 면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고종 년간에 서얼로서 淸顯에 이른 자로 첫 손에 꼽는 李祖淵이 청요직에 진출하여 이조참판의 망에 들고 左營使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임오년 이후였다.0471) 또한 1894년 갑오개혁에 참여한 소장 관료 가운데 서얼(金嘉鎭·安駉壽·權在衡·李允用·尹致昊), 중인(鄭秉夏·高永喜·吳世昌), 토반(金鶴羽·張博) 등 한미한 신분배경을 가진 ‘亞流兩班’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었다.0472) 특히 이들 중 서얼 출신인 金嘉鎭·權在衡·安駉壽 등은 각각 공부·군부·탁지부의 협판직을 맡아 개혁을 적극 추진하는 위치에 있었다.0473)
이처럼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중간신분층, 그 중에서도 특히 서얼의 신분적 지위가 많이 개선되어 사환의 제한에 관한 법적 제약은 거의 해소되었다. 그러나 서얼의 경우, 관의 지배 영역에서 가해졌던 제약이 완화되어 갔던 것과는 달리 사회 관습의 영역에서는 차대가 엄연히 존재하였고 오히려 더욱 심화되어가는 일면도 있었다.0474)
0462) | ≪英祖實錄≫2, 영조 즉위년 12월 병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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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3) | 李鍾日,<18·19세기의 庶孼疏通運動에 대하여>(≪韓國史硏究≫58, 1987). |
0464) | 黃 玹,≪梅泉野錄≫권 1, (≪黃玹全集(下)≫, 亞細亞文化社, 1978), 93쪽. |
0465) | 韓永愚,<朝鮮時代 中人의 身分·階級的 性格>(≪韓國文化≫9, 1988). |
0466) | 金弼東,<중인 신분의 형성과 발전>(≪차별과 연대-조선 사회의 신분과 조직-≫, 문학과지성사, 1999), 133쪽. |
0467) | 金俊亨,<朝鮮後期 蔚山 地域의 鄕吏層 變動>(≪韓國史硏究≫56, 1987). |
0468) | 崔承熙,<朝鮮後期 鄕吏身分移動與否考 2>(≪韓國文化≫4, 1983). |
0469) | 張東杓,<18∼19세기 吏額增加의 현상에 관한 硏究>(≪釜大史學≫9, 1985). |
0470) | ≪高宗實錄≫19, 고종 19년 7월 22일. |
0471) | 黃 玹, 위의 책, 79쪽. |
0472) | 柳永益,<甲午更張과 社會制度 改革>(朱甫暾 외,≪韓國社會發展史論≫, 一潮閣, 1992), 238쪽. |
0473) | 서얼 출신으로 갑오년 이후 大官에 이른 사람들로는 李祖淵을 비롯 李範晋·金嘉鎭·閔致憲·閔商鎬·閔泳綺·李允用·尹雄烈·安駉壽·金永準 등이 꼽힌다. 黃玹, 위의 책, 93쪽. |
0474) | 宋俊浩,<朝鮮時代의 科擧와 兩班 및 良人>(≪歷史學報≫69, 1976), 123∼124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