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재명의 이완용 척살 미수
안중근에 의하여 사살된 이토의 장례식이 끝난 지 한달 뒤인 1909년 12월 4일 친일단체 一進會는 대한제국 2천만 국민의 대표를 자임하면서 백만 회원의 이름으로 한국 정부에 한일합병에 대한 上奏文과 의견서를 제출하고 합방성명서를 발표하였다.0476) 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의 급진적 합방론자인 가츠라 타로(桂太郞)·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등에게 이 문건을 제출하고 국내 각 지방관청과 사회 각계에까지 보내게 되었다.0477) 일진회의 합방성명서가 발표되자, 大韓協會·西北學會·漢城府民會 회원 등이 圓覺社에 모여 일진회의 매국적 행위에 대한 성토대회를 개최하였다.0478) 이러한 가운데≪大韓每日申報≫는 12월 5일자 사설을 통해 “오늘날 大韓國의 형세는 사법권까지 넘겨주고 이제 남은 것은 大韓이라는 빈 이름뿐이다. … 그러나 너희가(일진회) 이름과 실상이 같게 되도록 노력은 못할지언정 어찌 차마 그 이름까지 없애고자 하는가”0479)라고 일진회의 기만성을 통박하였다.0480)
한편 일진회의 이러한 행위에 대하여 李完用은 李容九·宋秉畯의 주도로 합방이 이루어질 경우 자파세력이 입을 타격을 두려워하여 자신이 합방의 공로자가 되기 위해 일본에 합방을 청원하는 한편 일진회원을 매수하거나 일진회의 무력화 정략을 추진하였다.0481) 이와 같이 이완용은 합방을 둘러싼 일진회와의 갈등 속에서 보다 확고한 정치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0482) 따라서 이완용이 통감부 정책에 조응하고 그의 권력유지를 연장하는 방향으로 정치적 입장을 정리하면서 병합체결을 주도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던 李在明은 그를 척살하고 이를 통하여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고 나아가 민족정기를 드높이고자 하였다.0483)
이재명은 1890년 평안북도 宣川에서 태어났으며 13세 때 천주교에 귀의하였다. 1904년 미국 신부의 주선으로 美國勞動移民社의 모집에 응하여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서 수년간 노동에 종사하였다.0484) 이후 제1·2차 한일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1907년 10월 귀국하여 친일매국노 이완용·이용구·송병준 등을 제거하여 민족정기의 구현과 국권수호를 위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1909년 11월경 이재명은 먼저 서울에서 동지 吳復元·金龍文을 포섭하고, 평양에서 金貞益·鄭義道·朴泰殷·池麟瑞 등을 규합하여 친일매국노에 대한 제거 작업에 착수하였다.0485)
1909년 11월 말 이재명은 평양 성내 박태은의 자택에서 김정익·李東秀·李應三 등과 재차 거사계획을 모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재명은 이완용 제거를 역설하고 1차 회합시에 결정된 사항, 즉 이용구 사살을 바꾸도록 종용하였으나 김정익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두 사람의 논쟁이 격렬해지자 이용구·이완용 동시 제거라는 타협안이 제기되었으며, 이재명과 이동수는 이완용을 맡고 김정익과 趙昌鎬는 이용구를 제거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2월 4일 일진회의 합방성명서가 발표되고 전국에는 더욱 긴박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2월 6일 이재명은 이동수·박태은·김정익·조창호와 회동하여 각각 업무 분담을 결정하였다. 즉 박태은은 자금조달, 조창호는 무기입수, 김용문은 서울로 파견하여 이용구·이완용의 동정을 탐지하도록 하였다.0486)
이재명은 이와 같이 역할 분담을 결정하고 12월 12일 경 다시 서울로 와 거사 때 착용할 학생복과 무기구입을 완비하였다. 그리고 17일 경 이재명의 숙소에서 마지막 회합을 갖고 先 이용구 後 이완용으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과 동시에 각자 무기 분배를 마치고 김용문에게 사실을 알렸다. 여기서 이재명은 이완용을 비롯한 여러 대신이 22일 오전 명동성당에서 개최되는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2세의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1909년 12월 22일 오전 11시 반경 총리대신 이완용이 추도식장인 성당에서 나와 인력거를 타고 앞으로 지나치자 이재명은 감추었던 칼을 뽑아 이완용을 향하여 달려들었다. 이 때 인력거꾼이 앞을 가로막자 그를 벤 이재명은 곧바로 인력거에 올라타 이완용의 어깨를 단도로 찔렀고 이완용이 인력거 밑으로 굴러 떨어지자, 그의 위에서 수차례 찔렀다. 세 곳에 상처를 입은 이완용은 혼수상태에 빠져 병원으로 실려가고,0487) 이재명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0488) 당시 현장에 있던 이동수는 이재명이 거사를 성공시켰다고 판단하여 도피하였다.
국권수호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이재명의 이완용 척살 미수사건에 대한 공판에서 이재명은 이완용의 죄목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一.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일본에 이양시키고 통감부를 설치한 일
一. 헤이그 밀사사건을 빙자해서 송병준과 함께 황제를 위협하여 양위케 한 일
一. 7조약을 체결하여 여러 방면의 권력을 통감에게 이양하고 군대를 해산시킨 일
一. 어린 황태자(李垠)를 일본에 인질로 보내고 일본 여자와 정략적인 결혼을 시킨 일
一. 고종을 일본에 건너가게 획책한 일
一. 엄동설한에 강제로 황제를 서북지방에 순행케 한 일
一. 사법권을 일제에게 위임하여 국내의 여러 애국지사를 처벌케 한 일
一. 표면적으로는 일진회장 이용구로 하여금 한일합병 성명서를 발표케 하고 내면적으로는 합방을 추진한 일(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 519쪽).
이재명이 이완용을 사살하고자 했던 것은 이완용의 친일행각이 극에 달했으며 그 정점이 매국이라는 점을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재명이 제거하고자 했던 인물이 이완용 이외에 송병준·이용구와 같은 매국적 친일분자라는 점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즉 이재명은 이완용을 제거하는 것이 국가의 이익과 민족의 행복을 가져오는 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0489)
이재명의 이완용 저격 사건이 발생하자 통감부에서는 민심의 동향을 살피면서 사건의 성격을 단지 兇漢에 의한 치졸한 행동으로 격하시키고자 하였다. 즉 당시의 민심은 이완용의 저격사건으로 친일파에 대한 원성과 이재명의 멸사봉공에 고무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감부는 “이토의 피살, 이완용 총리의 遭難과 같은 무모한 행동을 하는 상태라면 이와 같은 추이가 계속될 때 한국의 전도는 불투명하며(한국사회) 상류에서 하류까지 이러한 현상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0490)고 선전하였다. 이는 합병 시점에서 일제가 한국인의 저항을 미연에 방지하고 일정 기간 친일파들에게 보호막 역할을 수행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일본과 친일파의 사건 축소 가운데서도 이재명은 확고한 신념으로 공판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재명의 담당검사는 논고에서 “이재명은 우국지사라고 자칭하나 편견자의 한 사람일 뿐이며 특히 그가 공범이 없다고 자칭하는 것은 자기의 허영심을 충만케 하기 위해서이고 다른 동지를 沒却코자 한 비열한 심사에서이다. 또 이용구를 죽이려다가 이완용을 죽이려 한 것도 역시 허영심에서 나온 것이자 국가사상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0491)라고 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핍박에도 동지를 보호하고 스스로 책임을 지려는 이재명의 의연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공판은 1910년 4월 13일 하루만에 끝내고, 5월 18일 이재명에게 사형, 김정익·이동수·金丙錄·조창호 15년, 오복원·全泰善 10년, 박태은·김용문 7년, 李學泌·金履杰·金炳鉉·이응삼 5년이 각각 언도되었다. 사형이 언도되자 이재명은 “불공평한 너의 법으로 나의 생명을 빼앗기는 하지만 나의 忠魂은 빼앗지 못할 것이라”0492)고 자신의 확고한 애국심을 표현하였다. 요컨대 이재명의 거사는 친일행각에 대한 경종과 국권회복운동에서의 애국심의 중요성을 각인시켜준 의열투쟁의 표본이다.
<金周溶>
0476) | 一進會의 친일행각과 합방론에 대해서는 金東明,<一進會と日本-政合邦と倂合->(≪朝鮮史硏究會論文集≫31, 朝鮮史硏究會, 1993)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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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7) | 김창수,≪항일의열투쟁사≫(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1), 56쪽. |
0478) | 金正柱,≪朝鮮統治史料≫3(韓國史料硏究院, 1970), 446쪽. |
0479) | ≪大韓每日申報≫, 1909년 12월 5일, 논설. |
0480) | 윤덕한,≪이완용평전≫(중심, 1997), 294쪽. |
0481) | 이완용은 일진회가 한국君民을 일본의 노예로 삼고자 한다고 하여 일진회의 교란행위를 명분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자 여론몰이 형식으로 자신의 私黨인 國是遊說團을 동원하여 국민대연설회를 개최하였다(韓明根,<統監府 時期 李完用 硏究>,≪제62회 한국민족운동사월례발표문≫, 1999, 14∼15쪽). |
0482) | 朴永錫,<李完用硏究>(≪國史館論叢≫32, 1992), 242쪽. |
0483)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11(1979), 554쪽. |
0484) | 宋相燾,≪騎驢隨筆≫(國史編纂委員會, 1955), 156쪽. |
0485)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11, 476∼477쪽. |
0486) | 朴成壽,≪韓國獨立運動史論≫(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6), 445쪽. |
0487) | 이완용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지 않은 것은 이재명이 이완용을 올라타고 칼로 찔렀을 때 그의 두루마기가 방패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大韓每日申報≫, 1909년 12월 23일). |
0488)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11, 478쪽. |
0489)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11, 527쪽. |
0490) | 國史編纂委員會,≪統監府文書≫6(1999),<總理 李完用遭難ニ付民心>(1909. 12. 28), 447∼448쪽 |
0491)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 568쪽. |
0492) | 宋相燾,≪騎驢隨筆≫, 15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