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45권 신문화 운동Ⅰ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1. 근대 교육의 성립
          • 1) 근대 교육 성립의 역사적 배경
            • (1) 개화정책의 추진과 신교육 수용론 대두
            • (2) 동도서기주의적 신교육 수용의 실패
            • (3) 선교사의 교육활동과 교육평등의식 계몽
            • (4) 변법개화파의 국민교육론 전개
          • 2) 근대적 국민교육제도의 성립
            • (1) 교육제도와 관리등용제도의 개혁
            • (2) 근대적 국민교육제도 정립
        • 2. 근대 교육의 발전
          • 1) 근대 교육의 이념
            • (1) 실용주의 교육 지향
            • (2) 자강주의 교육
          • 2) 근대 학교의 설립
            • 가. 정부의 근대학교 설립
            • 나. 전·현직관료 및 황제 측근세력들의 사립학교 설립
            • 다. 개항장 상인 및 유지 신사들의 사립학교 설립
            • 라. 요호·부민·유생 층의 학교 설립
            • 마. 선교사들의 학교 설립
            • 바. 구국계몽단체·학회 및 관련인사들의 학교 설립
            • 사. 불교와 천도교 종단의 사립학교 설립
          • 3) 근대 학교의 교육내용
        • 3. 근대 교육의 확대
          • 1) 통감부의 교육 침략
            • (1) 우민화교육 방침
            • (2) 동화정책의 방법으로서의 보통학교 확장
            • (3) 일본어 보급
            • (4) 교과를 통한 친일교육
            • (5) 일본인 교원배치
          • 2) 민족사학의 발전과 설립 이념
            • (1) 민족사학의 발전
            • (2) 민족사학의 설립이념
          • 3) 여자 교육의 발전
            • (1) 미션여학교의 설립과 교육
            • (2) 관립여학교의 설립과 교육
            • (3) 민간인 사립여학교의 설립과 교육
          • 4) 고등교육의 성립
            • (1) 민립대학의 설치운동과 경성제국대학의 설립
            • (2) 기독교계 전문학교의 대학승격운동
          • 5) 교육내용의 추이
            • (1) 애국교과와 훈화를 중심으로 한 교육내용
            • (2) 창가와 체육을 중심으로 한 교육내용
        • 4. 교육구국운동의 추진
          • 1) 근대 교육의 성격
            • (1) 근대 교육의 성격
            • (2) 근대 민족 교육의 확대
          • 2) 구국교육운동의 실태
            • (1) 사립학교의 설립
            • (2) 설학취지문의 검토
            • (3) 간도지역의 민족교육운동
            • (4) 역사교육의 확대
            • (5) 체육교육의 보급과 운동회의 개최
            • (6) 애국가와 독립가의 보급
        • 5. 근대적 교과서의 편찬
          • 1) 근대 교육 성립기의 교과서
          • 2) 근대 교육의 발전과 교과서
            • (1) 근대학교의 교육내용<교과목>
            • (2) 정부의 교과서 편찬
            • (3) 민간인에 의한 교과서 편찬과 실태
            • (4) 교과서의 내용
          • 3) 통감부하의 교과서
            • (1) 일제의 교육침략정책
            • (2) 학제의 개편
            • (3) 통감부의 교과서 통제
            • (4) 구국교육운동과 민간의 교과서 편찬
            • (5) 교과서의 실태
            • (6) 교과서 사용 실태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1. 근대 학문의 수용
          • 1) 서양 근대 학문의 세 수용통로
          • 2) 서양철학의 수용
          • 3) 사회진화론의 수용
          • 4) 사회과학의 수용
          • 5) 서양 인문사회과학 수용의 특징과 문제점
        • 2. 한국어 연구
          • 1) 언문일치의 첫걸음
            • (1) 두 문체의 대립
            • (2) 국한문체
            • (3) 국문체
          • 2) 초기의 국문 연구
            • (1) 지석영의<국문론>과<신정국문>
            • (2) 리(이)봉운의≪국문졍리≫(국문정리)
            • (3) 주시경의<국문론>과 그 뒤의 연구
            • (4) 이능화의<국문일정의견>
          • 3) 국문연구소의 업적
            • (1) 국문연구소에 관한 자료
            • (2) 개설의 동기와 목적
            • (3) 직원과 운영
            • (4) 사업의 경과
            • (5)<국문연구 의정안>
            • (6) 각 위원의 연구안
          • 4) 문법의 연구
            • (1) 서양인의 연구
            • (2) 유길준의≪대한문전≫
            • (3) 주시경의≪국어문법≫
            • (4) 어윤적의 연구
            • (5) 김희상의≪초등국어어전≫
          • 5) 주시경의 국어 연구
        • 3. 한국사 연구
          • 1) 연구의 필요성
          • 2) 근대 한국사 인식의 추이
            • (1) 실학시대 후기에서 개항기의 역사학
            • (2) 개화기 계몽주의 역사학
          • 3) 민족주의 사학의 성립
            • (1) 일제 식민주의 사학의 침투
            • (2) 근대민족주의 사학의 성립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1. 근대 문학의 발전
          • 1) 개화기의 시대적 과제와 문체, 문학장르의 관련
            • (1) 위정척사파
            • (2) 온건보수파
            • (3) 개화자강파
            • (4) 일본체험파
            • (5) 민중계몽파
            • (6) 친기독교 개화파
          • 2) 개화기의 시가 장르
            • (1) 애국·독립가
            • (2) ‘사회등’ 가사를 비롯한 우국가
            • (3) 민요 개작
            • (4) 개화기의 시조와 가사
            • (5) 신체시
          • 3) 개화기의 서사 장르
            • (1) 신소설
            • (2) 역사·전기 소설
            • (3) 토론체 소설
        • 2. 근대 예술의 발전
          • 1) 음악
            • (1) 한국음악사회 구성
            • (2) 근대음악사의 전개
            • (3) 새로운 과제
          • 2) 미술
          • 3) 연극과 영화
          • 4) 무용
            • (1) 무도의 등장
            • (2) 권번춤의 무대화와 가무극의 번성
          • 5) 체육
            • (1) 학교체육의 전개양상
            • (2) 근대 스포츠의 소개
            • (3) 체육단체 결성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개요

 개항 이후 한국사는 그 전에 거의 예기치 않았던 세력을 대하게 되면서 변화에 직면하게 되었다. 일본을 비롯한 서구 세력의 침투는, 그러지 않아도 붕괴되고 있던, 봉건 말기의 한국 사회에 심한 충격을 가하면서 한국 사회 변화의 중요한 요인으로 등장했다. 한국은 당시 세계사의 흐름이라 할 서세동점의 상황으로 점차 빠져들면서, 이 같은 세계사적인 도전에 수동적이긴 하지만 응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 사회는 외부의 충격으로 변화하기 전에, 내부의 자생적인 각성과 진통에 의해 사회변화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17세기 이후에 나타났던 實學的인 개혁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면 학파로서의 실학은 勢道政治의 등장과 파행성으로 더 지속될 수가 없었다. 왕조의 권위와 정통성을 회복하여 국력을 신장시키려는 大院君의 노력도 봉건 말기의 조선조를 근대사회로 변화시키려는 개혁의지와는 동떨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서세동점의 추세 앞에서는 폐쇄적인 자기 방어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실학적인 개혁의지는 봉건 말기의 혼란 속에서도 자생적인 근대화에 일정하게 기여하고 있었다.

 외부 세계 특히 서양에 대해서는 거의 단절되다시피 했던 한국은 ‘洋夷’를 맞으면서 자기 변신을 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양의 근대문물을 수용하는 일에 더 이상 시간을 끌 수가 없었기에, 우선 중국과 일본을 통해 서양을 배우려고 노력했다. 해외에 사절단을 파견하고 서양인들을 고빙하여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정치와 제도를 개혁하기 위해 서양문화와의 접촉을 기피할 수가 없었다. 실학적인 자생성에다 외래적인 자극은, 힘겹지만 종래의 봉건사회를 변화시키는 기본적인 역량으로 총화될 수 있었다.

 서세동점의 추세 속에서 한국이 자신을 보전하기 위한 노력은 결국 변화를 통해서만이 가능했다. 그 변화는 일차적으로 정치제도와 정부의 기구 개편, 신식군대의 양성과 외부와의 경제 교류 등으로 나타났다.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면서 국권을 보위하려는 무력운동과 민간운동도 나타났다. 동학농민운동과 의병운동 및 독립협회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이 그런 것이다. 이러한 운동과 함께 민족운동의 성격을 띠면서 한국 근대화의 내실을 다지는 운동으로 나타난 것이 신문화운동이다.

 한말 일제강점 초기에 걸쳐 진행된 신문화운동은 여러 방면에 걸쳐 있다. 이 책은 먼저 애국계몽운동의 성격을 띠면서 가장 열렬하게 추진된 근대 교육운동을 살펴보고, 이어서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정과 국어·국사 등 국학연구 운동을 살핀 후 신시가와 신소설 등의 근대 문학과, 음악·미술·연극·영화·무용·체육 등 근대 예술을 다루려고 한다.

 한국의 신문화운동 중 가장 괄목할 만한 것은 교육이다. 근대식 교육으로 불려지던 신교육은 개항 후 외세의 침략에 맞서서 근대적인 국민과 국가를 이룩하기 위한 과정에서 성립·발전되었다. 그 이전에는 중앙의 성균관과 4부학당, 지방의 향교가 있어서 지배층의 자제들을 교육하였고, 촌락에서는 서당을 통해 초보적인 교육을 담당하였다. 이들 기관에서는 주로 유교의 經史를 가르쳐 관료들을 양성하였다. 이 밖에도 통역·천문·법률 등을 가르치는 특수교육기관이 있었다.

 신교육을 시행해야 한다는 논의는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 등을 돌아보고 귀국한 수신사들에 의해 건의되고 있었다. 金綺秀·金允植·池錫永 등이 신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1882년 말, 고종은 전국에 綸音을 내려 農工商賈의 자제 등 신분의 귀천을 논하지 말고 학교에 입학시켜 공부시킬 것을 명했다. 1884년에는≪한성순보≫는 서양의 국민교육제도와, 실업교육기관을 소개하면서 ‘국가위주의 교육’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정부는 외교의 필요상 영어교육기관으로 1883년에 同文學을 설립했다. 이어서 서양식 신교육기관으로 育英公院을 설립했다.

 1885년 선교사들이 입국함에 따라 선교교육기관이 설립되었는데, 이에 앞서 한국인에 의한 근대학교로서 원산학교가 설립되었던 것으로 알려진 바 있다. 초기에 세워진 선교학교는 배재학당을 비롯하여 제중원 의학당·경신학교·이화학당 및 정신학교 등이 있었다. 이들 개신교 선교사들의 교육활동은 의료활동과 함께 선교의 방편으로 진행된 것이지만, 한국 근대교육의 성립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890년대에 이르러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온건개화파는 한국이 자주독립을 이룩하는 길은 근대교육과 산업발전에 있다고 생각했다. 갑오개혁은 근대교육제도를 설치하는 데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군국기무처가 學務衙門 관제를 제정하면서, 학무아문이 국내교육과 학무를 관장토록 하고, 그 아래 전문학무국에서는 중학교·대학교·기예학교·외국어학교 등을, 보통학무국에서는 소학교·사범학교 등을 관장하며 편집국에서는 국문철자와 교과서를 관장토록 했다. 이 같은 조치에 따라 1894년 9월에는 교동에 사범학교와 소학교를 설치하고 근대교육을 본격화했다. 학무아문이 學部로 개칭되면서 학부관제가 다시 제정되었고, 한성사범학교관제가 마련되면서 국민보통교육을 위한 교육제도가 정비되었다.

 1895년에 한성사범학교와 소학교를 설립하고 1899년에 중학교를 설립한 정부는 1890년대에 외국어학교(日語·英語·法語·俄語·漢語 및 德語)와 電務학당·郵務학당·상공학교·鑛務학교 및 1899년에는 경성의학교를 설립했다.

 근대교육은 재래의 유교적 가치관을 가르치는 經史 교육과는 달랐다. 교육내용은 학교의 설립목적에 따라 다르지만, 국민보통교육의 경우, 대체로 수신·국문·한문·역사·지리·수학·물리·화학·습자·작문·체조 등을 기본으로 하고 각 학교의 정도와 성격에 따라 수준을 높이거나 전문성을 살리는 교과목을 가르쳤다. 특히 애국계몽기의 민족주의 계열의 사립학교는 국어와 국사 교육을 강조하고 애국심을 고양하기 위해 작문·음악·체육 등에 중점을 두고 있었는데, 체육의 경우 군사훈련을 겸하고 있었다. 이들의 교육정신은 자강사상을 밑바탕에 깔고 실업교육을 통해 부국강병을 기하려는 것이었다.

 일제는 1904년의 고문정치로 학부고문을 한국 정부에 들여다 놓고 1905년 ‘을사늑약’으로 통감부를 설치하는 등 침략을 노골화하면서, 먼저 애국운동의 가장 중요한 방편이었던 근대교육을 압살하는 데에 주력했다. 그들은 한국민에 대해 우민화정책을 쓰고 일본교사를 배치하고 일본어보급에 앞장을 섰으며, 교과서의 내용을 우민·식민화하는 데에 활용했다. 때문에 민족주의자들과 선교사들 중에는 이 같은 교과서를 쓸 수 없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申采浩 같은 이는 이 같은 교육정책을 쓰는 학부를 ‘나라를 망하게 하는 학부’라고 극언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하자 민지를 깨우고 실력을 양성하려는 교육은 애국계몽운동의 가장 중요한 방편이 되었다. 따라서 1900년대 초의 애국계몽기에 이르게 되면 한국인에 의한 본격적인 사립학교의 설립이 더 활발하게 이뤄진다. 종래에는 외국선교사들이 근대학교 설립에 주력했는데, 이 때에는 불교와 천도교 등의 종교단체에서도 근대학교를 설립했을 뿐만 아니라 富民·유생층과 애국계몽단체, 학회 등에서도 학교설립에 진력했다.

 이 때 사립학교를 세워 교육자강운동에 나선 이는 李昇薰(오산학교)을 비롯하여 安昌浩(대성학교), 閔泳徽(휘문의숙), 嚴柱益(양정의숙), 李容翊(진성학교), 李東輝(보창학교 계), 金九(양산학교 등), 全德基와 周時經(공옥학교 등), 南宮檍(현산학교), 金東三(협동학교) 등이 있었다. 또 학회로는 서우학회(서우사범학교)와 한북흥학회(한북의숙), 두 학회를 통합, 서북학회를 재조직하면서 2개 학교도 통합, 서북협성학교를 만들었으며, 기호흥학회(기호학교)·대동학회(대동전수학교)·보인학회(보인학교) 등을 설립했다. 선교단체들 중에는 한말에 이미 고등교육기관도 부설하여 일부에서는 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또 만주 지역에 망명했던 지사들은 거기서도 학교를 세워 국권회복운동을 교육을 통해 성취하려고 했다.

 한편 이 무렵 교육의 특이한 면은 여성교육이라 할 것이다. 비교적 초기에는 선교사들에 의해 여성교육이 강조되었다. 초기에 선교의 방편으로 여성 선교에 힘썼던 기독교는 그들의 신문 잡지를 통해 여성교육론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세계의 문명한 나라에서는 모두 여성교육에 앞장서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한국도 부국강병하려면 여성도 남성과 같이 교육시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여학교 설립을 위해 1905년에는 여성교육단체인 진명부인회·여자교육회·양정여자교육회를 조직하고 태평동여학교를 비롯하여 진명·숙명 등이 한국인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런 여학교들은 선교사들이 초기에 세운 이화·정신·배화·숭의·정의 등의 여학교와 한국 정부에서 세운 관립여학교를 이어서 설립했던 것이다.

 이 같은 신교육기관의 설립은 내적으로는 봉건사회를 근대사회로 변화하는 데에 크게 공헌했을 뿐만 아니라, 외세의 침략으로 국권 수호를 위한 의식계발과 실력양성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한국의 근대교육은 민주적인 의식을 계발했다는 점에서 뒷날 한국의 민주주의 의식의 보급과 확장에도 일정하게 기여했다고 본다.

 한말 개화운동이 성장 발전하고 있을 때에, 한국은 서구의 학술을 수용하는 한편 자기의 전통적인 학문을 서구적인 방법론과 대비하면서 심화 연구하는 데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우선 해외 학문의 수용과 관련, 서구와 세계를 소개한 서적이 수입됨으로써 세계관이 확대되었다. 당시 중국에서 널리 보급되었던≪海國圖志≫·≪瀛環志略≫·≪中西見聞錄≫및≪易言≫등이 들어오고, 일본에 갔던 수신사에 의해서는 황준헌이 쓴≪朝鮮策略≫이 보급되었다. 또 이들보다는 늦게≪萬國公法≫·≪群學肆言≫·≪天然論≫·≪飮氷室文集≫등도 보급되어 지식인들에게 읽혀지고 있었다. 한국인에 의해서도 외국의 문물이 소개되고 있었는데, 유길준의≪西遊見聞≫을 비롯하여 1880년대 중반에 간행된≪한성순보≫와 1890년대 후반부터 간행되기 시작한 여러 종류의 신문들은 세계에 대한 한국인들의 의식을 깨우고 있었다. 이를 통해 종래까지의 전통적인 세계관이 점차 무너지고 있었다.

 서양학문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서적들에 의해 소개되고 있었다. 철학 분야에서는 유학자였던 李定稷이 1868년경부터 서양철학의 베이컨이나 데카르트를 이해하고 있었으며, 칸트의≪실천이성비판≫에도 주목하고 있었다. 李寅梓도 중국과 일본을 통해 서양철학에 주목하고 1912년 이전에≪希臘古代哲學攷辯≫이라는 저술을 남길 정도였다. 철학과 심리학 등의 수용에는 선교사들의 공헌도 컸다.

 한말에 서양 학문의 수용에서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사회진화론이다. 자연계와 마찬가지로 인간사회에도 생존경쟁·약육강식이 지배한다는 것을 강조한 사회진화론은 외세의 침략으로 나라를 부국강병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자강주의 이론의 바탕이 되었다. 사회진화론은 한말 지식인들에게 국제사회에서만 적용되고 국내사회에서는 거의 적용하지 않았다는 점과 “지식인들이 사회진화론을 통해 강자의 권리를 옹호하면서 제국주의의 속성에 대해 비판하지 못하고 스스로 그들을 정당화하게 되었다”는 것은 일정하게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사회진화론과 함께≪만국공법≫·≪국제공법지≫등이 소개되었다는 것은 중국 중심의 폐쇄적인 동양적 세계관에 머무르고 있던 한국인의 의식을 국제공법적인 질서로 이행하는 데에 가교적인 역할을 감당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할 것이다.

 신문화운동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언문운동과 한국어연구의 활성화라고 할 것이다. 이로써 한글이 민족문자로 정착되고 민중의 일상어가 우리의 언어로 정착되어 갔기 때문이다. 언문운동은 언문일치를 위한 노력에서 시작된다. 전근대에는 입으로는 우리말을 하면서 글로는 漢文을 쓰는 기형적인 문자생활을 해왔는데, 이런 모순된 언문생활을 청산하고 ‘말하는 대로 글을 쓰는’ 언문일치의 실현을 강렬하게 요구하게 되었다. 그것은 국문체의 실현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궁극적으로 도달할 목표이었지, 지식인층이 한문으로 의사표현을 해 온 우리 나라와 같은 경우는 당장 실현할 수 있는 것은 못되었다. 개화기에 노력한 문체의 단일화작업이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국한문체와 국문체의 어문생활에 도달하게 되었다.

 개화기의 국문연구는 池錫永(국문론, 신정국문), 李鳳雲(국문정리), 周時經(국문론, 대한국어문법) 및 李能和(국문일정의견) 등에 의해 이뤄졌다. 특히 주시경은 독립신문사 안에 國文同式會를 조직하여 국문연구를 조직화했다. 1907년에는 학부 안에 국문연구소를 설립했는데, 이는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正音廳 이후의 최초의 국문연구기관으로 국문에 관한 제설을 통일하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설치했던 것이다. 魚允迪·이능화·주시경·權輔相·지석영·宋綺用·李敏應·이돈구 등 당시 국문에 해박한 지식을 갖춘 이들을 위원으로 하고 있던 국문연구소는 1909년 국문의 字體에서부터 철자법에 이르는 <국문연구 의정안>을 제출했으나 그것이 의결 혹은 공포·실시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개화기의 국문연구의 특징의 하나는 문법의 연구라고 할 것이다. 처음에 한국에 접근했던 서양인들(John Ross, John MacIntyre, H. G. Underwood, J. S. Gale 등 개신교 선교사들과 프랑스 선교사들 그리고 영국 외교관 J. Scott 등)에 의해 시작된 문법연구는 1923년의 에카르트의≪朝鮮語 交際文典≫과 1939년에 핀랜드 알타이어학자 람스테트의≪한국어 문법≫으로 발전하였다. 한국인으로서는 ‘우리 나라 최초의 문법가라는 명예’를 지닌 유길준의≪대한문전≫(1904, 1909)과, 최광옥의≪대한문전≫(1908)이 나왔다. 그러나 국어문법 연구에 가장 독창적이며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주시경이라고 할 것인데, 그는 1906년≪대한국어문법≫을 펴내고 1908년의≪國語文典音學≫간행을 거쳐, 1910년 4월에≪국어문법≫을 출판했다. 국권을 강탈당하기 전에 그는 국어 독립성의 뼈대가 되는 나라글의 문법을 나름대로 체계화했던 것이다. 이 밖에도 어윤적, 金熙祥(초등국어어전) 등의 연구가 있었다.

 한국어연구의 활성화는 한글의 민중문화화를 위하는 작업으로서 바꿔 말하면 어문의 민족화·민주화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어문의 민족화·민주화는 곧 한국에서 민족주의·민주주의의 발전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한국이 근대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정신적인 요인이 되었다.

 신문화운동에서 괄목할 만한 것은 한국어 연구 못지 않게 이루어진 한국사연구라 할 것이다. 국사연구는 실학시대의 연구를 계승하면서 이루어졌다. 실학시대의 연구로 국사연구의 지평을 어느 정도 넓혔으나,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각종 농민운동과 함께 향리·서얼·중인들의 역사를 써서 역사연구의 대상을 넓혀 갔다. 이것은 신분제도가 붕괴되는 시기의 역사인식의 한 추이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실학에서 개화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역사서술로서 安鍾和의 몇몇 저술이 주목된다.

 개화기 계몽주의 역사학으로서는 먼저 정부에서 간행한 각종 교과서들을 들 수 있다. 1895년 각급 학교령이 반포된 후에 근대학교의 창설과 더불어 국사교육의 필요성이 절감되었기 때문이다. 학부의 국사교과서 편집에 참여한 사람으로는 玄采와 金澤榮을 들 수 있고, 그 밖에 교과서 편집자로는 元泳義·柳瑾 등이 있었다. 이 밖에도 개화기에 사서를 남긴 사람으로서는 崔景煥·鄭喬·張志淵 및 黃玹 등을 들 수 있다.

 한말·일제강점기에는 외세의 침략으로 강렬할 민족의식이 고조되면서 국사운동이 전개되었다. 국사운동은 일제가 한국에 대한 침략과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식민주의사학’을 안출하게 되자 거기에 자극을 받아 더욱 고조되었다. 한국의 ‘민족주의사학’은 이 같은 시대적인 배경에서 형성 발전되었다. 민족의식을 배양하기 위한 역사학으로서는 金敎獻·李相龍·黃義敦·南宮檍 등과 朴殷植·申采浩 등을 들 수 있는데, 이 중 박은식이 민족주의사학을 열었다면 신채호는 근대민족주의사학을 일단계로 완성했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국문운동이 언어·문자 생활을 통해 한국인의 평등성과 동질성을 확보하는 기초라고 한다면, 국사연구는 그 연구를 통해 한국인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한국인의 정신적 일체감을 담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국어와 국사는 근대민족을 형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라고 한다. 한국이 근대국가로 거듭나는 데는 이 같은 국문·국사운동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신문화운동에서 국어·국사 등의 학문운동이 근대 한국인의 정신과 뼈대를 형성하는 작업이라고 한다면, 문학과 예술 등 문예운동은 근대 한국인의 피와 살을 만드는 작업이라고 할 것이다. 문예운동이 성장·발달함으로 한국인의 정체성에 활기가 돌고 정서상의 풍요함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선 문학운동과 관련, 개화기에는 위정척사파와 ‘온건보수파’ 및 개화자강파를 비롯하여 일본 체험파·민중 계몽파·‘친기독교 개화파’ 등의 작가적 유형이 있었다. 이들은 성향에 따라 다양한 장르의 시가(애국·독립가와 우국가, 민요개작 및 新體詩)를 발전시켰는데, 이 중 특히 주목할 것은 개화기에 ‘신체시’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개화기의 서사 장르로는 신소설과 역사·전기 소설·토론체 소설을 들 수 있다. 신소설에서는 “국가와 민족 수호와 개화라는 개화기의 중차대한 시대적 과제에 대하여 미미하거나 제한된 대응” 밖에 할 수 없었지만, ‘괄목할 성과’를 이루어 내었다고 평가되고 있으며, 역사·전기 소설에서는 국가적 위기를 구하기 위해 영웅전을 써서 애국심을 고취하고 있었던 것이 주목된다.

 예술 분야에서는 음악·미술·연극·영화·무용·체육 등에서 우리의 전통적인 것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한편 서구의 것을 수용하여 폭넓게 발전시켰다. 이 중 서구의 예술을 수용함에 가장 활발했던 것이 음악 분야였다. 선교사들의 입국과 일제의 침략으로 서구음악과 악기가 대량 유입되면서 7음계의 음악체계가 민족적인 음악체계를 점차 흔들어 놓았으며, 전통음악은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점차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미술분야에서는 전통회화와 민화가 주종을 이뤄오다가 개항 이후에는 점차 서양의 미술이 소개되어 서양식 회화수법을 익히게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서 高羲東을 비롯한 서양화가가 출현하게 되었고, 서화미술회(1910)와 서화협회(1918) 등이 결성됨으로써 ‘근대적 성격의 화단’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연극·영화와 관련, 개화기에는 연극관객층이 ‘귀족층과 하류층으로 구성’되었고, 원각사와 협률사의 건립, 혁신단(1911) 공연 등은 신극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한편 영화가 처음 도입되어 우리 나라 예술활동의 새로운 기원을 이루기도 했다. 개화기에는 민속무와 민속악의 전통이 전승되면서 궁중춤과 민속춤이 한 무대에 어우러짐으로써 정악과 속악의 경계선이 붕괴되었다는 점이 지적되는데, 이 점은 사회의 민주화와 관련해서도 주목되는 점이다. 개화기의 근대춤은 전통적인 유교사상과 봉건적 인습으로 다른 예술 장르에 비해 다소 후진적이었지만, 한국식 전통춤이 서구식 극장무대에 진출하면서 대중들의 호응을 받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한편 체육은 신문화운동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것의 하나다. 선교사들의 교육에서 체육이 적극적으로 소개된 데다가 근대 교육에서 智德體를 중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국망의 위기를 맞아 체육교육은 군사훈련을 겸하는 것이어서 중요시되었다. 개화기 체육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개항과 서양 선교사의 입국으로 각종 스포츠, 이를테면 육상경기·축구·야구·농구·테니스·수영·빙상·사이클·골프 등이 소개, 발전하였고, 각종 체육단체가 결성되어 체육을 조직화하면서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李萬烈>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