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근대 교육운동
1. 근대 교육의 성립
1) 근대 교육 성립의 역사적 배경
한국 근대 교육은 19세기 후반 조선 사회가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에 맞서 근대적 국민·민족국가로 발돋움하는 과정에서 성립 발전되었다. 근대 교육이 성립되기 이전 조선의 재래교육은 유교적 가치관을 교육하는 經史교육이 중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초기 정부는 중앙인 서울에 四部學堂(처음에는 5부학당)과 성균관, 지방의 부·목·군·현에 향교를 설치하여 지배층의 자제들을 교육하였다. 관학이라 불려지는 이 곳에서는 경사교육을 통해 유교적 가치관에 입각하여 국왕을 보필하고 백성들을 통치할 관료 군을 양성하였다.001)
정부가 세운 이들 교육기관 외에 서당·서재·정사·서원 등으로 불리는 사설 교육기관 역시 그 교육은 경사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관료가 되기 위한 과거시험 준비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었다. 특히 서원은 재지 양반지주층이 그들의 정치·경제적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조선 후기 사회는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따라 신분의 혼효가 심화되고 있었다. 농공상업으로 富를 축적한 자들이 신분상승을 도모하는가 하면 유민화한 사족들의 일부는 몰락하여 정치·경제적으로 열악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형원 이래 실학파는 사족이 벼슬말고는 생업을 기피함에서 비롯되는 유민화 현상을 제거하기 위한 수많은 제안을 하였다. 星湖 李瀷은 士農合一論을 제안하였고, 茶山 丁若鏞은 士의 農工商 등으로의 전업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성리학 중심의 교육과 학문이 正德만을 내세우며 利用厚生의 실학에 어두워 국가사회에 아무런 기여를 못하고 있었으므로 燕岩 朴趾源은 후세에 농민과 工人과 商賈가 업을 잃게 된 것은 곧 사족이 실학을 하지 않은 허물이라고 지적하고 사족의 학문은 농공상에 관한 것을 모두 포함하여 士가 농공상업을 발전시키는데 기여해야한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湛軒 洪大容은 四民간의 신분적 차이를 부정하고 인재등용에 있어서 능력본위, 교육에 있어서 기회균등의 원칙을 주장하였다. 신분을 뛰어넘는 인재등용은 교육의 기회균등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었으므로 담헌은 초등교육에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능력본위의 교육을 실시하고, 초등교육의 의무교육제를 실시하자고 주장하였다.002)
다시 말해서 실학자들은 조선 후기의 사회변화에 부응하지 못하는 성리학의 정덕 일변도의 교육체제를 비판하면서 이용후생과 사민평등의 교육을 실시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실학자들의 교육개혁론은 조선정부에 수용되어지지 않은 채 개항을 맞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