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화정책의 추진과 신교육 수용론 대두
중상주의와 산업혁명을 통해 그 부를 축적해 온 서구 자본주의 열강의 끊임없는 통상요구를 거절하던 조선은 1876년 서구와의 교역을 먼저 시작하여 힘을 기른 일본의 강압적 요구를 수용, 강화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새로운 국제질서에 편입되었다. 조선은 이후 서구 여러 나라와 수호조약을 체결하고 통상교역을 계속 확대하게 되었고, 영토의 확장과 식민지 개척을 도모하고 있던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 위협에 직면하였다.
농업중심의 자급 자족적 경제와 유교적 가치관에 기초한 사대교린의 국제질서에 자족하던 조선사회는 근대 자본주의와 국민·민족국가들간에 전개되고 있던 약육강식의 새로운 국제질서에 대응하여 자강을 통한 국가와 민족의 독립을 지켜야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었다.
조선이 부강한 국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서구의 선진기술을 배워들여 근대 산업을 발전시키고 새로운 무기로 무장된 군대를 양성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따라서 조선정부는 서구문물을 먼저 수용한 일본과 청나라의 실상을 파악하는 한편, 이들 나라들이 서구문물을 수용했던 방식에 따라 서구의 새로운 문물을 수용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정부는 이른 바 개화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서구와의 교역을 확대하고 새 문물을 수용하기 위한 개화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그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의식과 많은 인재가 필요하였다. 그러나 재래의 성리학적 가치관과 교육으로 길러진 인재들은 오히려 개화정책의 추진에 장해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개화정책을 효과적으로 추진해야하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교육개혁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1876년 일본과 근대적 수호조약을 맺은 조선정부는 같은 해 4월 金綺秀를 정사로 하는 제1차 수신사를 일본에 파견하였다. 김기수는 각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던 근대 일본의 많은 지도자와 교류하고 또 여러 시설을 시찰한 뒤 그 견문을 상세히 기록한≪日東記游≫를 국왕 고종에게 제출하였다. 여기에서 김기수는 같은 시기의 일본교육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003)
이른바 학교에서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은 사대부의 자제로부터 민의 준수한 자에 이르기까지 7, 8세 때부터 가르치는 데, 書를 배우고 글자를 익히게 한다. 먼저 일본 글자를 가르치고 다음에 한자를 가르친다. 16세가 되면 다시는 경전을 읽히지 않으며, 크게는 天文, 地理, 句股(數學)의 學, 작게는 農器, 軍器 도형의 說을 눈으로 조사하고 손으로 점검하며 잠시도 그치지 않는다. 또한 여자에 이르기까지도 학교가 있어서 크게는 天·地·兵·農, 작게는 詩·文·書·畵에 대하여 모두 한 가지 재주를 오로지 한다. 美日和親條約 체결 이후 일본은 이미 의무교육제를 실시하고 있었는데 이를 김기수가 견학한 것이었다.
제1차 수신사에 이어 1880년 金弘集을 정사로 하는 제2차 수신사가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의 새로운 문물을 시찰하고 귀국하였다. 김홍집은 일본방문 길에 중국의 사상가 鄭觀應이 쓴≪易言≫을 얻어 돌아왔다. 이는 개화와 자강에 관한 저술로 복간본과 번역본까지 간행되어 국민들에게 보급됨으로써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조선정부는 이 해 말(1880. 12) 새로운 정세에 부응하기 위하여 관제개혁에 착수하였고, 다음해에는 청나라에 金允植을 領選使로 하여 38명의 학도와 工匠을 파견하여 군기제조를 학습케 하였다. 한편 일본에도 紳士遊覽團을 파견하여 일본의 새로운 문물을 시찰하게 하였다.004) 일본과 청이 받아들인 서구의 새로운 문물을 배워 국가자강을 이루려는 의도에서였다. 개화사상의 鼻祖인 朴珪壽로부터 일찍이 청나라가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실리를 얻고 있음을 보고 받은 고종은 이들 나라로부터 서양의 문물을 배워들이려 하였다.005) 그리하여 고종은 개화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개항 이후 국왕과 개화파 정부의 개화정책에 불안을 느낀 유생들은 김홍집이 가지고 들어온≪朝鮮策略≫을 구실로 위정척사운동을 강렬하게 전개하였다. 서구사상과 자본주의세력의 위협에 대항하여 성리학적 가치와 그에 기초한 조선왕조를 지키려 했던 보수 유생들은 정부의 통상·개화정책이 국가와 민족을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고 주장하며, 구미제국과의 수호·통상에 반대하는 상소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더불어 개화정책의 추진과정에서 소외된 구식군인들이 민씨 척족들의 부정부패를 계기로 이른바 壬午軍亂을 일으켜 대원군을 옹립하고 개화정책에 반항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무력지원으로 임오군란을 평정한 고종은 개화정책의 계속적 추진을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다.
저들의 敎는 사특하니 마땅히 음탕한 소리나 치장한 여자를 멀리 하듯이 해야 하지만, 저들의 器는 이로우니 진실로 이용후생을 할 수 있다면 농업·양잠·의약·병기·배·수레의 제도는 무엇을 꺼려서 피하겠는가. 그 교는 배척하되 그 기는 본받는 것이 진실로 병행하여 거스르지 않는 것이다. 하물며 강약의 형세가 이미 크게 차이가 벌어졌는데, 만약 저들의 기를 본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저들에게 모욕당하고 저들이 욕보이는 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高宗實錄≫, 고종 19년 8월 5일;金允植,≪雲養集≫권 5, 綸音布諭·曉諭國內大小民人 임오).
즉 고종은 김윤식 등의 도움을 얻어 東道西器論의 입장에서 서구의 문물을 배워들여 국가자강을 이루려 하였다.
일찍이 박규수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개화사상에 눈을 떴던 김윤식은 1881년에는 영선사로 청나라에 건너가 새로운 무기 제조술을 배워들이는데 진력하고 있었다. 김윤식은 영선사로 청나라의 天津에 파견되어 양무파 인사들과의 접촉을 통해 그의 생각을 더욱 가다듬게 되었다. 김윤식은 許其光과의 필담에서 富民 위주로 추진되는 일본의 개화자강정책에 의문을 품고 서양과 사정이 다른 우리 동양은 서양과 같은 법을 수용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일본의 부는 國債로 채워졌다는 劉含芳의 지적을 듣고006) 일본의 개화자강방식을 따르려는 金玉均·朴泳孝 등과는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즉 김윤식은 청나라의 양무론적 개화방식이 조선에 적합하다고 보아 김옥균 등과는 달리 점진적 개화노선을 선택하게 되었다.
김윤식 등을 중심으로 하는 양무론적 개화파는 기존의 전통적 지배질서와 이해관계를 온존시키면서 외형적 부국강병을 이룩하려 하였다. 즉 군주전제권을 강화하고 양반지주와 봉건적 특권상인층을 근대적 자본가로 전환시켜 농업증산과 상업발전을 촉진함으로써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고 독립을 지킬 수 있는 부강한 근대국가를 이룩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서구의 사상과 사회체제의 수용은 거부하고 서양기술의 수용과 시설의 도입만을 추진하였다. 즉 동양의 사상과 사회체제는 유지하면서 서양의 기술만을 도입하자는 주장이었으므로 이를 東道西器論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동도서기론의 입장에서 개화를 추진하고자 한 대표적 인물 중의 하나인 김윤식은 서양의 부강이 학교교육이 성한데 있다고 보고 먼저 時務의 학으로 인재를 양성한 뒤 이들을 관인으로 등용하여 국가 부강을 이룩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007)
이와 같은 입장은 고종에게 올려진 개화파 유생과 전·현직관료들의 상소에 의해 더욱 뒷받침되었다.
충주 幼學 池錫永은 1882년 8월 서양의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그것을 연구하고 교육시키는 연구기관의 설치를 주장하였다. 그는≪萬國公法≫을 비롯하여≪朝鮮策略≫·≪博物新編≫등 개화에 필요한 모든 서적들을 여러 사람에게 열람시키고, 또 수차 농기구·직조기·화륜기·무기 등을 사들여 각 도의 모든 고을로부터 유생과 관리들을 각각 1명씩 선출하여 개화관계 서적과 기계를 연구케 하자고 상소하였다.008) 또 典籍 卞鋈은 국왕에게 기독교는 엄금하되 서양의 학문과 기술은 수용하여야 한다고 상소하였다.009) 出身 尹善學도 군신·부자·부부·붕우·장유의 도는 지키고 舟·車·軍·農·器械와 관계되는 富國之術은 받아들이자고 상소하고 있다.010)
즉 이와 같이 일부 개화파 유생과 전·현직관료들은 동도서기론적 입장에서 정부가 하루 빨리 서구의 기술과 교육 등을 받아들여 개화자강을 이루어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이들은 개화관계 서적의 간행에서부터 외국어의 교수, 외국인 기사의 채용, 훈련원의 설치, 상회소와 국립은행의 설치, 탄광의 채굴, 화륜선의 건조, 군항의 설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부국강병을 위한 정책을 상소하였다.
이는 하루 빨리 서구 문물을 수용하여 부국강병을 이루어야만 국가를 보존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새로운 문물 수용을 위한 개화정책의 추진에는 새로운 의식을 가진 인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으므로 고종은 1882년 12월 28일(음력) 8道4都에 綸音을 내려 양반도 상업에 종사하고 農工商賈의 자제라도 학교에 입학할 것을 허락하며 출신의 귀천을 논하지 말고 才學의 如何를 보도록 諭하였다.011)
고종의 개화의지를 지원하는 개화상소가 이어지는 한편에서 보수세력의 척사운동도 강렬하게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개화파 인사들은≪漢城旬報≫를 창간하고 개화의 필요성을 계몽하는데 진력하였다.012) 또한 개화파는 교육개혁을 통해서 만이 개화가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으므로≪한성순보≫는 서양의 근대 교육제도와 교육상황을 상세히 소개하였다.013)
≪한성순보≫에서는 첫째, 서양의 국민교육제도를 소개하면서 교육사무는 국가에서 장악하고 교육심의기관을 두어 자문을 구하지만 어디까지나 교육문제에 대한 결정은 국가에서 한다고 하며 국가위주의 교육을 소개하고 있다. 서양제국 중에서도 특히 국가의 교육통제가 강한 프랑스의 교육제도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곁들이고 있다. 그리고 영국·프랑스·독일·스페인·오스트리아 등의 학교에 대해 소개하고 소학·중학·대학교의 단계적 진학이 제도화되어 피교육자의 발달정도에 따라 단계별 학습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특히 소학교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서양 여러 나라의 소학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소학교육이 국민교육의 기초로서 의무교육제도에 의해 뒷받침된다는 것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실업교육기관인 농상공학교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014) 다시 말해서≪한성순보≫의 간행을 관장하게 된 洋務論的 개화파는015) 서구문물의 수용을 통한 부강한 국가의 건설을 추구하면서도 교육에 있어서는 국가위주의 교육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국민계몽을 통해서 부강한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고 보았으므로 서구 여러 나라의 국민교육을 소개하고 실용주의 교육을 주장하였다.
003) | 金綺秀,≪日東記游≫권 4, 還朝(≪修信使記錄≫, 國史編纂委員會, 1971, 10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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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 | 李光麟,<開化思想의 發生과 그 展開>(≪韓國史講座≫Ⅴ, 近代篇, 一潮閣, 1981), 121∼136쪽. |
005) | 姜在彦,<朴珪壽의 思想과 開國問題>(앞의 책), 176∼191쪽. |
006) | 金允植,≪陰晴史≫상, 是日軍機所與劉鄕林談草(≪韓國史料叢書≫6, 國史編纂委員會, 94∼97쪽). |
007) | 金允植,≪續陰晴史≫권 4, 私議 16條, 養才編, 고종 26년 윤2월 8일. |
008) | ≪承政院日記≫, 고종 19년 8월 23일. |
009) | ≪承政院日記≫, 고종 19년 10월 7일. |
010) | ≪承政院日記≫, 고종 19년 12월 22일. |
011) | ≪高宗實錄≫, 고종 19년 12월 28일. |
012) | 李光麟, 앞의 글 참조. |
013) | ≪漢城旬報≫, 1884년 3월 8일,<各國學業所同>. |
014) | 魯仁華,≪大韓帝國時期 官立學校 敎育의 性格 硏究≫(이화여대 박사학위논문, 1988). |
015) | 李光麟,<漢城旬報와 漢城週報에 대한 一考察>(≪韓國開化史硏究≫, 一潮閣, 1969), 60∼102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