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의병계열의 민족운동단체
한말의 의병투쟁은 1909년 9월부터 2개월간 전개된 남한대토벌작전으로 탄압당한 후 그 세나 수적으로 크게 줄어들었고 활동범위도 좁아져 1910년 식민지로 전락될 무렵에는 국내에서의 항전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로 위축되었다. 이에 장기항전을 대비해 北計策을 추진하여 중국 만주나 연해주에 항전의 근거지를 확보하고자 하였으며 지리산을 근거지로 삼아 의병을 정예의 독립군으로 훈련시키고자 하였다.251) 그러나 소규모, 산발적인 의병항쟁은 강원도·황해도·경상도의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전투를 수행하며 1915년 혹은 1919년 3·1운동 당시까지 지속되었다. 구체적 활동상을 살피면 1910년 9월부터 12월까지의 의병활동은 교전회수가 128회, 참가의병수는 1,832명이었으며(1910년 9월∼1911년 8월 교전 50회, 의병수 390), 1911년 9월에서 1912년 8월까지는 13회 교전, 70명의 의병수를 기록하고 있으며, 1912년 9월∼1913년 8월 교전 5회, 의병수 45명으로 되어 있다.252) 1911년 이후의 의병활동은 경기지방에 姜基東·田聖根·崔永宇, 강원지방에 朴文術·權泰鼎, 충북지방에 崔益三, 경북지방에 盧炳稷·史相斗, 전북지방에 鄭世昌·金學俊, 황해도지방에 韓貞萬·蔡應彦, 평남지방에 董宗贊 등의 부대가 활약하였다.253) 그 중에서 일제가 ‘희세의 巨賊’이라 할 만큼 눈부신 활약으로 신출귀몰하여 일본군경을 놀라게 한 의병은 강기동·채응언·鄭敬泰 등이었다. 때문에 일제는 현상금을 걸고 특별헌병수사반을 조직하여 이들 의병장을 체포하려 한 것이다. 강기동은 본래 한국군 기병이었는데 의병을 조직하고 크게 활약하여 한때는 예하 의병이 수백 명에 이르렀었다. 그는 경기도를 근거지로 하여 강원·함경도에서 맹활동하였으며 1911년 2월 원산에서 체포당한 후 용산에서 처형되었다.254)
채응언은 한국군 보병대 군조였는데 군대해산 후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3,400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평남·황해·강원·함경도 등에서 활약하였다. 국권상실 후에도 100여 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신출귀몰한 게릴라식 항전을 전개하였으므로, 채응언 체포에 현상금 280원을 걸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활약상을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마침내 채응언도 1915년 7월 체포되었다.
한편 이들과 달리 의병근거지를 해외로 이동한 경우는 만주나 연해주로 망명하여 13도의군 같은 전국의병의 통합체를 조직하며 만주지역에서의 독립군투쟁으로 전환하여 무장독립전쟁으로 맥을 이어갔다. 직접적인 무장투쟁으로 항일전선에서 활약한 이들 의병계열과는 달리 국내에 잔존하였으나 직접 활동하지 않고 잠적한 의병들은 독자적 혹은 계몽운동계열과 연합하여 민족운동을 선도하였다. 그중에서도 독자적으로 이루어진 척사적 성격의 조직이 결성되었으니 大韓獨立義軍府와 民團組合이 그 대표적 비밀결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