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경학사
1908년 9∼10월의 일제에 의한 남한대토벌로 국내에서의 의병운동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역시 1907년 이후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정치적 활동공간이 축소되었으니, 1909년 10월 안중근사건에 연루되어 안창호·유동열·이종호 등 신민회 간부들이 수개월 동안 구금되었다 석방되면서 국외로 활동무대를 옮겨 독립운동근거지를 건설하자는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한일합병’ 이후 국외에서의 독립운동근거지 건설론이 보다 활발하게 논의되었으며, 신민회 간부들은 백두산과 가까운 서간도지역으로의 대거 이주계획을 수립하였다.
서간도지역에서 이들 신민회 간부들을 비롯한 애국지사들이 유력한 독립운동근거지의 후보지로 선정한 곳은 柳河縣 三源浦 鄒家街지역이었다. 추가가지역은 앞에 평지가 펼쳐져 있고, 뒤에는 야산지대가 이어져 있어 독립운동기지로서 매우 적합한 지형을 구비하고 있었다.331) 1910년 말 신민회 간부들을 비롯한 애국지사들은 순차적으로 국경을 건너, 1911년 2월경에 추자가에 도착하였는데, 이회영 5형제 일행, 안동 유생인 이상룡·김대락·김동삼 일행, 그리고 이동녕·김창환·주진수·여준·윤기섭·이탁 등이 그들이다.332)
이들 민족운동자들은 1911년 여름 삼원포 추가가 大孤山의 露天會議에서 耕學社를 조직하였다.333) 경학사는 兵農一致制에 입각한 교육을 통하여 자제들을 독립운동의 인재로 양성하기 위한 ‘민단적인 성격을 띤 자치기관’이었다.334) 경학사에는 내무·농무·재무·교무의 4개 부서를 두었으며, 사장에는 이상룡, 내무부장에는 이회영, 농무부장에는 장유순, 재무부장에는 이동녕, 교무부장에는 유인식이 각각 선출되었다.335) 이와 아울러 이들 민족운동가들은 청년자제들에게 文武雙全의 민족교육을 실시하기 위하여 新興講習所를 설립하였다.336) 신흥강습소 학생들은 낮에는 개간과 농업에 종사하며 틈틈이 군사훈련(도수훈련)을 하였다.337)
경학사를 중심으로 서간도 유하현의 한인들은 중국인들의 의구심과 한인배척운동을 극복하기 위하여 ‘變裝運動’을 전개하였는데, 중국인들의 의복과 두발은 물론 중국인들의 풍습을 익히고 중국어를 배우기 위한 운동이었다.338) 이것은 북간도의 간민교육회, 간민회가 추진한 ‘치발역복 변발청장’처럼 중국당국의 지원을 획득함과 동시에 일본의 개입을 저지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경학사는 첫해인 1911·1912년 연속 대흉년을 만나, 재정적 어려움에 봉착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풍토병에 걸려 고생하였다.339) 그 결과 경학사의 활동은 정지되었고, 간부들은 경학사 활동을 강화하기 위한 자금모집을 위한 방도를 논의하고 1912년 가을, 이관직과 장도순을 국내로 파견하였으며, 1913년 봄 일제의 암살계획을 전해들은 이회영·이동녕·이시영 등 지도자들은 유하현을 떠났다. 이회영은 자금조달을 위해 국내로, 이동녕은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시영은 봉천으로 떠났다.340) 신흥강습소의 청년학도들 역시 절망속에서 국내 또는 노령으로 떠났지만, 김창환·윤기섭 등은 동리를 돌아다니며 모금하면서 신흥강습소를 계속 유지하였다.341)
그리하여 신흥강습소는 1912년 봄 이회영이 중국당국의 호의로 새로이 물색하여 개척한 通化縣 哈泥河 강가에 새로운 교사를 신축하여 낙성식을 가질 수 있었다. 신흥강습소는 중등교육과정과 함께 군사훈련을 실시할 수 있는 상당한 시설을 갖추었다.342) ‘신흥학교’로도 불린 신흥강습소의 교과과정은 4년제 중학과정의 본과와 3개월 또는 6개월의 무관양성을 위한 속성과인 특별과가 있었다.343)
331) |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엮음,≪中國東北지역 韓國獨立運動史≫(집문당, 1997), 21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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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2) |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엮음, 위의 책, 216쪽. |
333) | 서중석,<1910년대 獨立運動基地 新興武官學校>(한국사연구회 학술회의,≪1920년 鳳梧洞·靑山里戰鬪와 庚申慘變에 관한 韓·中 共同硏究≫, 2000년 10월 21일), 9쪽. |
334) | 蔡根植,≪武裝獨立運動秘史≫(대한민국 공보처, 1948), 48쪽. |
335) |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엮음, 앞의 책, 217쪽. |
336) | 尹炳奭,≪國外韓人社會와 民族運動≫(一潮閣, 1990), 33쪽. |
337) | 蔡根植, 앞의 책, 48쪽. |
338) | 서중석, 앞의 글, 8쪽 尹炳奭, 앞의 책, 34쪽. |
339) | 尹炳奭, 위의 책. 서중석, 위의 글, 7·10쪽. |
340) | 서중석, 위의 글, 10쪽. |
341) | 蔡根植, 앞의 책, 49쪽. |
342) | 서중석, 앞의 글, 12쪽. |
343) |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엮음, 앞의 책, 230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