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부민단
경학사가 사실상 해체된 후, 경학사에 참여하였던 인사들에 의하여, 1913년 가을이래 경학사의 자치단체적 성격을 계승하려는 단체들이 속속 등장하였다. 그 첫번째 단체는 扶民團으로 許赫·李沰 등 유지인사들이 조직하였다.344) 부민단은 “부여 옛땅에 부여유민이 부흥결사를 세운다”는 뜻으로 그 본부는 삼원포에서 남쪽으로 90리 가량 떨어진 通化縣 哈泥河에 두었다. 부민단의 본부에는 서무·법무·檢務·학무·재무 등의 부서를 두었다. 부민단은 경학사를 더욱 발전시켜 지방조직을 확충하였다. 그리하여 千家 즉 대부락에는 千家長을, 百家 부락에는 區團을 설치하여 區長 또는 百家長, 十家 부락에는 牌長 또는 十家長을 두었다.345) 부민단의 사업은 한인자치와 한인사회의 일체의 분쟁을 裁決하고, 중국인 또는 중국관청과의 분쟁사건을 대리해 처리해 주었으며, 신흥학교(신흥강습소) 등 한인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346)
또 하나 부민단과 같이 서간도 한인들의 자치·자위 및 교육을 목적으로 한 같은 성격의 단체가 경학사 사장을 역임한 이상룡에 의하여 조직된 自新契이다. 현재 이상룡이 중심이 된 자신계의 조직규모와 주요인물들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부민단·자신계와 같은 성격을 지닌 세번째의 단체가 교육회이다. 서간도지역에 기반을 두었던 이들 3단체는 3·1운동 전후까지 각각 별도로 활동하다가, 1918년 대동단합문제가 제기되어 통합논의가 제기되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3·1운동이 일어난 후 韓族會로 통합되었다. 자신계의 이상룡이 총재, 부민단의 이탁이 회장으로 선출되었다.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