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신흥학우단·백서농장
新興學友團은 신흥학교의 졸업생과 재학생들로 조직된 강력한 혁명단체로서, 1913년 3월 교장 呂準과 교감 尹琦燮 그리고 제1기 졸업생인 金石·姜一秀·李根澔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하였다. 졸업생은 정단원, 재학생은 준단원으로 참여하였다. 신흥학우단은 처음에는 ‘옛땅을 회복한다’는 뜻을 가진 ‘다물’의 이름을 따 ‘다물단’이라고 하였다가 곧 신흥학우단으로 개칭하였다. 신흥학우단은 만주지역 한인혁명운동의 핵심조직으로서, 단원들은 서간도지역은 물론 남북만주를 비롯한 국내외 독립운동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신흥학우단은 유하현 삼원포 大花斜에 근거지를 두었으며, 기관지로≪新興學友報≫를 발간하였는데 馬鹿溝에 발간처를 두었다. 신흥학우단은 군사학 등 각종 학술의 연구, 각종 간행물 발행을 통한 혁명이론의 선전과 애국사상 고취 등의 사업을 추진하였다. 특히 신흥학우단은 50호 이상의 한인거주지에는 소학교를 설립하여 아동교육을 실시하였는데, 교원은 신흥학우단이 책임을 졌다. 이외에도 신흥학우단은 노동강습소와 노동학교를 경영하였는데 농한기를 이용하여 농민들을 상대로 군사훈련과 계몽교육을 실시하였고, 민중의 자위체를 조직케 하여 일본 첩자의 침입을 방지하였다.348)
신흥학우단이 주동이 되어 1915년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수행할 독립군의 군영으로 조직한 것이 白西農庄이다. 백서농장은 통화현 제8구 관할 八里哨(빨리소)구관 소관하에 있는 小白岔에 위치하였는데, 백두산 서편에 있는 고원평야이다. ‘백서’란 ‘백두산의 서편’이란 뜻으로 ‘농장’이라고 한 것은 ‘국제적인 체면’ 즉 중국당국의 이목을 의식해서 붙인 것이고, 내부적으로는 ‘우리군영’이라 불렀다.349) 1915년 처음 입영한 군인의 수는 약 380여 명이었는데, 신흥학교 1회부터 4회 졸업생들이 주축이 되었으며, 신흥학교의 분교와 지교 그리고 노동강습소에서 훈련된 군인들이었다. 백서농장은 장주 김동삼 이하 각부서 책임자를 갖추었다. 백서농장은 일종의 둔전제도로 운영되었으나, 영양실조와 병으로 인하여 농장을 떠나는 이들이 증가하여 최후로 30여 명이 남게 되었다. 마침내 백서농장은 3·1운동 이후 서간도 한인사회의 최고자치기구로 통합조직된 한족회 총회의 결정에 따라, 해산되고 군인들은 유하현 제2구 삼원포로 떠났다.3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