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2. 해외민족운동2) 러시아(1) 러시아혁명 이전의 독립운동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1. 무단통치체제의 확립
          • 1) 총독지배체제의 형성
          • 2) 조선총독 지배하의 탄압기관
            • (1) 헌병경찰체제
            • (2) 사법기관
            • (3) 군대
        • 2. 식민지 수탈구조의 구축
          • 1) 토지조사사업과 토지수탈기반의 마련
            • (1) 토지조사사업의 전사
            • (2) 토지조사사업의 실시와 그 성격
            • (3)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 집적
          • 2) 수탈을 위한 농업정책과 한국농민의 고난
            • (1) 관권의 농사 개입
            • (2) 면화재배의 강요
            • (3) 식민지적 수탈의 강화
            • (4) 몰락 농민의 증가
            • (5) 한국농민의 저항
          • 3) 임야조사사업과 국유림의 창출
          • 4) 광업과 어업의 장악
            • (1) 광업의 장악
            • (2) 어장의 장악
          • 5) 금융·재정의 식민지적 재편
            • (1) 금융의 장악
            • (2) 재정의 재편
          • 6)<회사령>과 기업활동의 억압
            • (1) 한국강점 이전의 일본자본 침투
            • (2)<회사령>의 시행과 기업발흥의 억압
            • (3) 일본자본의 왕성한 침투
            • (4) 노동구조와 노동쟁의
          • 7) 교통·운수·통신의 지배
          • 8) 무역의 대일 종속
        • 3. 식민지 지배체제의 특질
          • 1) 일제의 조선침략과 식민주의
            • (1) 무단통치에 의한 지배체제 구축기(병합∼3·1독립운동)
            • (2) 회유정책에 의한 민족개량화기(3·1독립운동∼중일전쟁)
            • (3) 민족말살을 통한 전시강제동원기(중일전쟁∼패전)
          • 2) 조선 총독의 권력
          • 3) 식민지 통치구조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1. 국내민족운동
          • 1) 1910년대 국내민족운동의 배경과 경향
            • (1) 배경
            • (2) 국내민족운동의 경향과 특징
          • 2) 의병계열의 민족운동단체
            • (1) 대한독립의군부
            • (2) 풍기광복단
            • (3) 민단조합
            • (4) 이증연의 비밀결사
          • 3) 계몽운동계열의 단체
            • (1) 기성볼단
            • (2) 조선국권회복단
            • (3) 조선산직장려계
            • (4) 단천 자립단
            • (5) 영주 대동상점
            • (6) 송죽회
            • (7) 애국창가집 편찬, 배포와 관련된 민족교육투쟁
          • 4) 혁명적 경향의 민족운동단체
            • (1) 대한광복회
            • (2) 선명당
            • (3) 흠치교의 비밀결사
            • (4) 청림교의 비밀결사
            • (5) 조선국민회
          • 5) 1910년대 국내민족운동의 성격
        • 2. 해외민족운동
          • 1) 만주
            • (1) 북간도지역의 민족운동
            • (2) 서간도지역의 민족운동
            • (3) 북만 밀산부지역
          • 2) 러시아
            • (1) 러시아혁명 이전의 독립운동
            • (2) 러시아혁명 이후의 독립운동
          • 3) 중국 관내지역
            • (1) 한인의 이주와 한인사회의 형성
            • (2) 중국혁명세력과의 연대 구축
            • (3) 한인단체의 활동과 독립운동의 기반조성
          • 4) 미주
            • (1) 미주 한인사회의 형성과 한인단체의 결성과정
            • (2) 통일연합기관 설치와 독립군기지 개척운동
            • (3) ‘합병’ 반대투쟁과 군인양성운동
            • (4) 국민국가 수립론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설립
          • 5) 일본
            • (1) 1910·20년대 재일 조선인의 상태
            • (2) 1910년대 일본지역 민족해방운동
            • (3) 2·8운동
            • (4) 1920년대 일본지역 민족해방운동
      • Ⅲ. 3·1운동
        • 1. 3·1운동의 배경
          • 1) 제1차 세계대전 전후의 국제정세
          • 2) 해방과 평등의 새로운 사조 등장
          • 3) 독립운동의 새 기운
          • 4) 국내 상황
            • (1) 식민지 지배의 압박과 고통
            • (2) 식민지 지배의 모순 격화와 민생 피폐
          • 5) 3·1운동의 태동
            • (1) 상해 신한청년단의 활동과 해외 독립운동가들의 움직임
            • (2) 2·8독립선언
            • (3) 광무황제의 붕어와 인산
        • 2. 3·1운동의 전개
          • 1) 3·1운동의 초기 조직화
            • (1) 민족대연합전선의 형성
            • (2)<독립선언서>준비
            • (3)<독립선언서>의 배포와 최후의 회담
          • 2) 3·1운동의 발발
            • (1) 민족대표의 독립선언
            • (2) 만세시위운동의 시작
            • (3) 국내의 만세시위운동
        • 3. 3·1운동의 해외 확산
          • 1) 중국 만주
            • (1) 북간도의 시위운동
            • (2) 서간도의 시위운동
          • 2) 러시아 연해주
            • (1) 러시아혁명과 연해주 한인들의 독립운동
            • (2) 파리 강화회의 대표파견
            • (3) 전로국내조선인회의
            • (4) 독립선언과 시위운동의 전개
            • (5) 국내진공 계획과 노인동맹단의 독립운동
          • 3) 미주
        • 4. 3·1운동의 영향과 의의
          • 1) 3·1운동에 대한 열강의 반응
            • (1) 중국
            • (2) 미국
            • (3) 영국
          • 2) 3·1운동의 역사적 의의
            • (1) 3·1운동의 민족사적 의의
            • (2) 3·1운동의 세계사적 의의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나. 권업회

 ‘한일합병’ 반대운동은 유인석·이상설 등 보수적인 근왕주의자들에 의한 최후의 중요한 거사였으나, 무력적인 국내진입과 서구열강의 외교적 지지획득이라는 이들의 목표는 달성되지 못했다. 그러나 1910년 ‘한일합병’과 조선왕조의 종말은 항일전선에서의 이들 근왕주의자들의 지도적 위치가 크게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1910년 7월에 체결된 제2차<러일협약>이후 러시아와 일본간의 관계강화로 인하여 러시아를 근거지로 하는 의병운동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특히 1911년 6월 1일 체결된<러·일犯人引渡條約>에는 러시아와 일본 양 정부가 자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치범들을 서로에게 인도한다는 비밀조항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당국이 자국내에서의 한인들에 의한 공공연한 반일활동을 허용할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이제 사실상 러시아가 일본과 전쟁상태로 들어가지 않은 한, 한인들이 러시아 영토를 근거로 하는 항일의병투쟁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어지게 된 것이다.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한인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원호인 자산가들이 이범윤으로 대표되는 의병운동에 비우호적, 또는 적대적으로 되었다는 점이다. 더 이상 원호인들이 의병운동에 대해 인적·물적 지원에 나서는 일은 매우 어렵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여 즉각적인 무력적 방법에 의한 일본과의 결전을 주장하던 ‘급진파’ 즉, 의병파들의 입지가 약화되고 이제는 교육문화운동과 산업활동에 의한 점진적이며 장기적인 방략을 옹호한 ‘완진파’의 애국계몽운동계열 노선이 보다 현실적이고 설득력을 얻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점진론’을 주장해온 국민회가 연해주지역 항일민족운동의 지도력을 장악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국민회는 그 지도자인 안창호·이갑·이강이 중국의 靑島를 거쳐 1910년 여름 블라디보스톡으로 오게 되면서 그 지도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그러나 외관상 유리한 상황에 있었던, 서도파가 중심이 된 국민회 계열의 활동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국민회가 자신의 공화주의적인 정치이념과 미국인들, 특히 미장로교 선교사들과의 밀접한 관계로 인하여 러시아당국으로부터 의심을 받고 있었던 때문이다. 제2차<러일협약>이후 만주철도문제를 둘러싼 러시아와 미국간의 관계악화는 이러한 의구심을 심화시켰다. 한마디로 러시아당국은 국민회가 연해주지역 한인사회에서 친미적인 선전활동을 하게 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362)

 ‘한일합병’ 이후의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서, 한인민족운동가들은 1911년 상반기에 이르러 러시아당국의 승인을 받아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조직설립을 추진했다. 당시 연해주에는 4개의 주요한 그룹들이 한인사회의 주도권을 놓고 대립·경쟁하고 있었다. 그것은 지역출신에 따른 畿湖派(서울·경기·충청 출신), 北派(함경도 출신), 西道派(평안·황해도 출신) 그리고 1.5세대 또는 2세대의 청년들이 주축이 된 勤業會세력이었다. 특히 근업회는 1911년 초에 결성되었는데 한형권·유진률·김와실리 등이 주축이었으며, 1905년 이후 항일운동의 영향을 받았으나, 지방파쟁의식이 약했다. 이들 청년들은 이미 1910년 2월≪대동공보≫가 鄭淳萬에 의한 梁成春 살해사건에서 극적으로 표출된 기호파와 서도파간의 지방파쟁으로 그 유지가 어려워졌을 때, 그 경영을 떠맡고 나선 그룹이었다. 이들은 1911년 6월 18일 러시아당국으로부터, 유진률을 발행인, 신채호를 주필로 하는≪大洋報≫의 간행을 인가받기에 이르렀다.

 북파의 리더격인 李鍾浩는 함경도출신이 주축이 된 함북청년회를 기반으로 1911년 3월 이후 러시아당국의 인가를 받는 대중적인 한인조직 결성에 나섰다. 이종호는 1911년 6월 1일 최재형·홍범도의 지원을 받아 勸業會 발기회를 결성하였다.≪대양보≫간행에 따르는 재정적 어려움에 처해 있던 근업회 역시 권업회발기회측의 이종호와 타협을 이루고, 6월 16일 새로운 근업회 발기회를 만들었다. 기호파의 이상설 역시 독자적으로 러시아당국에 ‘권업회’란 명칭의 단체인가를 신청하는 한편, 러시아당국을 상대로 이종호 등의 근업회 발기회의 인가획득 운동을 저지하고자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 연해주 군정순무사가 이종호와 이상설을 소환하여 타협과 통합을 설득하였다. 그 결과 11월 24일 통합된 권업회가 러시아당국의 인가를 얻는 데 성공하였다.363) 나아가 이상설과 金立의 노력으로 치타에 가 있던 鄭在寬을 비롯하여 黃公道·白元甫 등 서도파 인물들 역시 권업회에 참가입장을 표명하였다.364) 권업회는 1911년 12월 19일 창립총회를 열고 간부들을 선출하였다. 총재단에는 都總裁 유인석을 비롯하여 이범윤·김학만·최재형 등 3인이 총재로 선출되었고, 권업회의 실질적인 의사결정기구라 할 수 있는 議事部의 의장과 부의장은 이상설과 이종호, 의원으로는 김립·한형권·김기룡·이민복·이범석·홍병환·김만송 등 각파의 주요인물들이 선출되었으며, 집행부서에도 각파 인물들이 안배되었다.365) 권업회가 외부적으로 실업과 교육의 권장·장려를 표방한 것은,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을 우려한 러시아당국의 정책을 충실히 따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이며, 앞으로 있을 일본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한 정치적 고려였던 것이다. 권업회는 러시아당국이 최초로 공식인가한 연해주지역 한인사회의 자치적 조직이었다.

 1911년에 부임해온 신임 沿黑龍州 총독 곤닷찌가 권업회를 후원했다. 특히 그는 1912년 2월 23일 신한촌을 방문하였는데, 3천여 명의 한인들이 성대한 환영식을 거행하였다. 곤닷찌는 한인들에 대한 연설에서 한인들의 도덕적이며 온화한 품성을 칭찬하고, 사회적·교육적·문화적 활동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366) 곤닷찌는 권업회 인가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방문한 이상설·이종호·정재관·한형권 등 권업회 대표단에게 권업회 명예회원으로 입회할 것을 약속했다.367)

 권업회는 회원수와 지회를 꾸준히 확대하여 1914년 해산될 당시, 한인들의 주요 거주지역인 니콜라예브스크-나-아무르, 하바로브스크, 수이푼지역의 시넬리니코브, 이만, 니콜스크-우수리스크, 노보키예브스크, 도비허, 그로데코보, 다우지미, 큰영(블라지네로-알렉산드로브스코에), 신영동(니콜라옙스크), 라블류, 멍구가이, 바라바쉬 등 10개 이상의 지회를 확대하였고, 당초 300명이던 회원수 역시 1,000여 명으로 늘어났다.368)

 권업회는 러시아당국으로부터 연해주 한인의 자치기관의 지위를 부여받아 러시아당국의 행정기능을 대행하였다. 특히 러시아당국이 장려하고 있었고 한인들이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던 시민권의 신청·취득에 필요한 행정적 편의를 제공하여 약 4천 명의 한인이 권업회의 도움으로 입적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권업회는 입적에 필요한 정교에 관한 종교상식을 제공하기 위하여 신한촌에서 일요일 야간학교와 연론행사들을 개최하였다. 또한 희랍정교당에 교당학교를 설립하여 러시아어교육을 실시했다. 권업회는 또한 러시아당국의 위탁으로 1913년 3월 블라디보스톡 거주 한인에 대한 인구조사를 시행하기도 했다.369)

 권업회의 활동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역시 권업회 기관지로 1912년 5월 4일에 창간된≪勸業新聞≫을 통한 언론활동이라 할 것이다. 과거 구개척리에 근거를 두고 발간되었던≪海潮新聞≫·≪大東共報≫·≪大東新報≫·≪大洋報≫를 계승한 한인사회의 언론지로서≪勸業新聞≫은 1914년 8월 정간될 때까지 주 1회씩 한 회도 거르지 않고 2년 동안 126호를 발간하면서 한인사회의 교육계몽과 통합에 크게 기여하였다.≪권업신문≫은 그 배포수가 1912년의 930부에서 1914년 정간 당시는 1,400부로 증가하였고, 노령 각지는 물론 국내·만주·중국관내·일본 그리고 미주와 하와이에까지 배포되어 미주의≪신한민보≫·≪新韓國報≫(후에≪國民報≫로 개칭)와 함께 대표적인 3대 항일민족언론지였다. 특히 노령에서는≪勸業新聞≫의 언론활동의 영향으로 금광·어장 등의 노동자들간에도 신문구독열이 매우 높았다.370)

 권업회는 또한 교육을 장려하였다. 1912년 3월 권업회는 거류민회와 공동으로 신한촌에 24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한민학교의 대건물을 건축하였는데,371) 이종호의 기부금 5,000루블과 이범진이 청년회에 기부하였던 1천 루블의 기금을 활용하였다.372) 한민학교는 한인사회 최대의 학교로서 노령 한인사회 “남녀교육의 모범이 되게 하매 이를 따라 각 지방에 學風이 크게 진흥”하였는데,373) 처음에는 신한촌 거류민회가 관할하였으나, 거류민회가 권업회에 통합된 1914년 3월 15일 이후에는 권업회에서 관장하였다. 그리하여 1914년 2월 현재, 권업회 본부 또는 지회의 관할하에 있던 학교가 약 10개에 학생수가 약 1천 명에 달하였다.374)

 권업회가 추진한 매우 야심적인 활동의 하나는 이만 이북의 라블류 일대에 한인농업단지를 조성하여 한인들을 대거 이주·정착시키려 한 계획이었다. 그리하여 간부들을 현지에 파견하고 단지를 물색하여 마침내 1912년 12월 러시아당국의 허가를 얻었다. 이후 股本團의 조직과 股本의 모집을 진행하는 한편, 농업학교 설립, 자위대와 상주 경찰대의 조직 등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였으나 100호도 안되는 가구들이 이주하는 데 그쳤다.375) 이 계획은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지속적으로 추진되지 못했다.

 권업회를 비롯한 노령의 한인 각 단체와 조직들은 1914년을 맞이하여 한인의 노령이주50주년기념사업 계획을 추진했다. 노령이주50주년기념사업은 1914년 1월초에 이주한인의 원로격으로 당시 권업회 회장직을 맡고 있던 최재형을 비롯하여 최봉준·채두성·박영휘 등이 발기하여, 1914년 2월 3일부터 7일간에 걸쳐 각 지방대표회를 개최하였다. 대표회는 신한촌에서의 대대적인 기념식의 거행(1914년 10월 4일), 최초 이주지인 목허위에서의 한국식 기념비의 설립(10월 11일), 그리고 한인이주역사 편찬(노어와 한글의 2판) 등의 계획을 수립하였다.376)

 권업회의 활동은 대체로 러시아당국의 정책에 적극 부합하는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러시아당국은 권업회를 통하여 자신의 정책을 효과적으로 관철함으로써 한인들의 러시아화를 도모하였고, 한인들은 권업회를 통하여 경제적 안정과 교육, 문화적 함양을 통한 지위향상을 추구했다. 그러나 이러한 권업회의 활동은 체제내의 활동으로 독립운동의 궁극적 목표인 독립전쟁을 통한 독립을 달성하고자 했던 이동휘·이종호·이상설·이동녕 등 여호인 민족운동가들에게는 만족스러운 것이 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들 여호인 지도자들은 최재형 등 원호인 지도자들과는 별도로 비밀리에 비합법활동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1913년 가을에 조직된 大韓光復軍政府는 바로 그 좋은 예이다. 1914년은 또한 러일전쟁 10주년에 해당하는 해이다. 러시아인들, 특히 하급병사들간에 일본에 대한 복수전으로서의 제2의 러일전쟁이 발발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이동휘의 주장에 따라 이상설·이종호·정재관·이동녕 등 노령과 만주의 민족운동가들은 제2의 러일전쟁 발발시 일본을 상대로 한 독립전쟁을 전개할 조직이 될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고, 군사훈련·무기구입·군대조직 등 준비에 나섰다. 이상설이 초대 正都領에 선출되었고, 계봉우가 책임비서로 선출되었다. 대한광복군정부는 연해주·북간도·서간도를 각각 제1·제2·제3군구로 나누고 제2의 러일전쟁에 대비하였다. 1913년 말 이상설이 정도령을 사임한 후에는 이동휘가 제2대 정도령에 취임하였다.377)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14년 8월 1일, 러시아당국은 블라디보스톡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권업회와≪권업신문≫을 통하여 러시아정부의 전쟁노력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고, 한인들은 기도회와 기금모집을 통하여 전쟁후원의 노력을 보여주었다.378) 그러나 이러한 한인들의 노력은 러시아와 일본이 동맹관계가 됨으로 불리하게 된 국제적 환경을 극복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권업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1911년 이후의 한인민족운동은 모두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우선 곤닷찌 총독은 한인노령이주50주년기념식의 연기를 명령했다.379) 8월 20일에는 연해주 군정순무사는 권업회와 合成會社에 대한 해산명령을 내렸으며, 36명의 한인지도자들에게 48시간내에 러시아영토를 떠날 것을 명령하였다.380)≪권업신문≫역시 9월 초 폐간 처분되었다.381)

 권업회를 비롯한 노령한인사회의 재정적 후원자였던 이종호는 블라디보스톡 퇴거명령을 받고 연해주 각지를 숨어 다니다가 마침내 북경으로 도피하였으나, 1917년 6월 상해에서 일본영사관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고 말았다.382) 신한촌 거류민회는 해산되자 이름을 위생부로 바꾸었으나 매우 제한적인 민회활동을 겨우 유지하였다.383)

362) Byung Yool Ban(반병률),<Korean Nationalist Activities in the Russian Far East and North Chientao, 1905∼1921>(Ph. D. Dissertation, University of Hawaii, 1996), pp. 162∼183.
363)≪勸業新聞≫, 1912년 12월 19일.
364)<백원보가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1911년 12월 29일)>(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도산안창호자료집≫1, 1990), 172∼173쪽.
365)≪勸業新聞≫, 1912년 12월 19일.
366)≪대한인정교보≫, 1912년 5월 1일.
367)≪勸業新聞≫, 1912년 12월 19일.
368) Byung Yool Ban, op.cit., pp. 197∼198.
369) Byung Yool Ban, ibid., pp. 198∼199.
370) 뒤바보,<俄領實記>(≪獨立新聞≫, 1920년 3월 30일).
371) 한국독립유공자협회 편,≪러시아지역의 한인사회와 민족운동사≫(교문사, 1994), 116쪽.
372) 뒤바보,<俄領實記>(≪獨立新聞≫, 1920년 4월 3일).
373) 뒤바보,<俄領實記>(≪獨立新聞≫, 1920년 3월 30일).
374)≪勸業新聞≫, 1914년 2월 8일.
375)≪勸業新聞≫, 1912년 12월 19일·1913년 4월 20일·1913년 12월 14일·1914년 1월 11일·1914년 1월 18일.
376) 반병률,≪성재 이동휘 일대기≫(범우사, 1998), 113∼114쪽.
377) 계봉우,≪꿈속의 꿈≫1(수고본, 크즐오르다, 카작흐스탄, 1944), 169∼171쪽,
378)≪권업신문≫, 1914년 8월 16·23일.
379)≪권업신문≫, 1914년 8월 16일.
380) 계봉우, 앞의 책, 169∼170쪽.
381) 뒤바보,<俄領實記>(≪독립신문≫, 1920년 3월 30일).
382) Byung Yool Ban, op.cit., p. 228.
383) 박 환,<대한국민의회와 연해주지역 3·1운동의 전개>(≪연해주 한인독립운동과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광복회 고려학술문화재단 주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80주년 기념 제11회 국제학술심포지움 발표요지문, 1999년), 72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