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국민회
國民會의 활동조건이 어려워져 가는 가운데 안창호가 노령을 떠난 것은 1911년 봄이었다.≪新韓民報≫는 1911년 3월 15일자 기사에서 안창호가 “그동안 해삼위에 있어 여러 동포를 인도하다가 모든 일에 재미가 없어 … 장차 구라파 대륙을 지나 미국으로 들어올 것”이라고 보도했다.384) 안창호가 블라디보스톡을 떠난 후 연해주지역에 남아있던 국민회 간부들 역시 매우 어려운 처지에 빠졌다. 정재관과 이강은 1911년 6월, 양성춘의 아내와 형이 정순만을 살해하고 기호파가 이 사건의 배후선동자로 무고되자, 러시아당국의 拘引을 피해 치타로 도피하였다. 그 외에 김성무·백원보·황공도 등 국민회 간부들 역시 기호파와 북파의 공격으로 구금되거나 오지로 도피하였던 것이다.385) 러시아당국이 연해주지역에서 국민회의 합법적인 활동을 허용하지 않자, 백원보·황공도 등과 신채호·장도빈·정경오 등이 블라디보스톡에서 표면적으로 권업회에 참여하며 비밀회합을 통하여 단결을 모색하였고 기타 지역에서는 다른 명칭의 단체를 조직하였다.386)
이것은 국민회가 이 무렵 과거의 활동에 대한 자기비판을 한 데 따른 것이다. 이갑 등 국민회 지도자들은 과거 자신들의 활동이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 원인이 러시아당국의 신뢰를 얻지 못한 데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갑은 미국의 안창호 등 대한인국민회 지도자들에 보낸 편지에서 이 점을 분명히 하였다. 이갑은 러시아지역에서 국민회 활동에 대한 러시아 당국자들의 공식적인 허가를 얻기 위해서는≪신한민보≫가 러시아에 비우호적인 기사를 삼가는 등의 노력을 통해서 러시아 당국자들의 신임을 얻는 것이 필수적임을 강조하였던 것이다.387)
앞에서 말한대로 블라디보스톡을 떠난 정재관과 이강이 치타에 도착한 것은 1911년 9월 10일이었다. 자바이칼주·아무르주·시베리아지역의 금광지역에 흩어져 있는 10만 명의 한인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교육과 계몽활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이갑과 같은 인식을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장로교신자인 이들은 러시아정교로 개종하는 한편, 치타지역 러시아정교회의 부주교인 예프렘 쿠즈네초프를 대부로 모시고 한인들 사이에서의 정교포고에 나서기로 했던 것이다. 예프렘의 주선으로 정재관과 이강은 월간종교지인≪대한인정교보≫의 발행허가를 획득하였다.388)≪대한인정교보≫는 1912년 1월 2일 문윤함을 발행인으로, 이강을 주필로 하여 창간호를 발행하였다.389) 이강과 정재관의 활동으로 국민회는 그 조직을 확대하였다. 1910년 10월 16일에 조직된 치타지회를 비롯하여 베르흐네우진스크·블라고베시첸스크·이르쿠츠크·톰스크·튜멘·첼리야빈스크 등지에 지회가 조직된 것이다.390) 이강과 정재관은 미주의 대한인국민회로부터 원동지역의 전권위원의 위임을 받았고, 이들은 9개의 국민회 지회를 기반으로 1911년 말 시베리아지방총회를 조직하였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 정재관은 북파·기호파·서도파·勤業會 계열 등 4파가 연합하여 러시아당국의 인허를 얻어 창립된 권업회에 서도파의 대표격으로 참여하기 위해, 1911년 12월 28일 블라디보스톡으로 떠났고, 이후 이강이 치타에 본부를 둔 시베리아지방총회의 활동을 주도하였다.391)
시베리아지방총회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되기전까지 치타에서 2차례의 대회를 개최했다. 16개 지회 대표들이 참가한 제1회 대회(1913년 5월 28일∼6월 7일)는≪대한인정교보≫를 공식기관지로 승인하였고, 19개 지회 대표들이 참가한 제2회 대회(1914년 6월 15일∼6월 20일)에서는 연해주지역의 한인들이 준비하고 있던 노령한인이주50주년에 시베리아횡단철도 연선지역의 19개 지회 대표들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1915년 12월에 개최예정이었던 제3회 대회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열리지 못했으며, 1917년 2월혁명의 발발까지 국민회의 활동은 계속될 수 없었다.392)
384) | ≪新韓民報≫, 1911년 3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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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5) | Byung Yool Ban, op.cit., pp. 189∼190. |
386) | <정경오-안창호 편지(1912년 11월 28일)>(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도산안창호자료집≫1), 394쪽. <백원보-안창호(1913년 1월 21일)>(≪도산안창호자료집≫1), 203쪽. |
387) | <이갑이 최정익 등에게 보낸 편지(1911년 11월 24일)>(≪도산 안창호자료집≫1), 263∼264쪽. |
388) | <이강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1912년 2월 12일)>(≪도산 안창호자료집≫1), 57쪽. |
389) | ≪대한인정교보≫1호(1912년 1월 2일), 33쪽. |
390) | <이강·정재관이 찬창호에게 보낸 편지(1911년 9월 12일)>(≪도산 안창호자료집≫1), 14쪽. |
391) | <이강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1912년 2월 12일)>(≪도산 안창호자료집≫1), 56∼57쪽. |
392) | ≪도산안창호자료집≫3, 103∼132쪽. ≪신한민보≫, 1915년 11월 11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