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10월혁명과 한족중앙총회
1918년 초에 결성된 韓族中央總會는 이처럼 반볼쉐비키적 입장에 있었던 고려족중앙총회에 대한 항일적·친볼쉐비키적 한인들의 반발이 조직적으로 구체화된 것이었다. 한족중앙총회의 주도인물들은 러시아정교 신부출신인 오와실리(吳永俊)398)와 러시아장교인 유스테판·김립·박이반·채성오·이한영·전태국 등 한인지도자들 10여 명이었다.399) 한족중앙총회 발기인들은 고려족중앙총회가 여호인들을 배제한 점을 비판하고, 입적·비입적을 불문하고 ‘특별대동단결’케 하고 ‘식민의 발전과 국가장래에 필요한 교육보급과 실업진흥을 꾀할’ 것을 목표로 내세웠다.400) 한족중앙총회의 발기소식에 접한 고려족중앙총회측에서는 한족중앙총회측의 ‘입적·비입적의 구분타파’, ‘대동단결주의’을 수용한다는 입장을 천명하고 한족중앙총회측과의 제휴·통합교섭에 나섰다.401)
결국 1918년 1월 17일, 양 진영은 ①입적·비입적 한인의 대동단결, ②지방회·지방연합회·중앙회 등 3급의 조직, ③5개월내의 憲章會議 소집 등 3항에 합의를 이루고 통합에 성공하였다. 헌장회의까지의 임시중앙간부로서는 문창범(위원장)·김립(부위원장겸 학무부장)·장기영(총무부장겸 서기)·서윤철(재무부장) 등을 선출하고, 헌장기초위원으로는 한용헌·김립·장기영·김하구를 선출하였다.
양측이 외형적인 통합에는 성공하였지만, 이는 잠정적인 타협에 불과했다. 시베리아독립정부(시베리아젬스트보)를 지지하는 고려족중앙총회와 중앙의 소비에트정부를 지지하는 한족중앙총회가 각각의 대립적인 정치입장이 근본적으로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고려족중앙총회측은 10월혁명의 성공으로 인한 볼쉐비키세력의 득세라는 객관적 정세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한족중앙총회 역시 중앙에서 10월혁명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볼쉐비키세력이 사회혁명당세력의 강세지역인 시베리아와 러시아 원동지역에서 아직 확고한 우세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던 데 따른 것이었다. 특히 노령의 대다수 한인들이 시베리아정부에 동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던 사정에 따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