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한인사회당
1918년 1월 초 고려족중앙총회에 맞서 독자적인 세력결집을 도모했던 한족중앙총회 주도인물들을 중심으로 1918년 3월, 하바로브스크에서 ‘조선인정치망명자회의’가 개최되었다.402) 이 회합의 직접적인 소집목적은 일본군의 시베리아출병에 대한 조직적 대책을 강구하기 위한 것이었다.403) 대회는 1918년 1월 18일 원동노령지역(연해주·흑룡주·사할린주·하르빈)의 10월혁명 지지파들이 원동러시아의 정권기관으로서 조직한 원동인민위원회의 의장 알렉산드르 크라스노쉐코프와 하바로브스크소비에트의 외무위원장이며, 하바로브스크시 볼쉐비키당 책임비서인 김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의 후원과 지도하에 추진되었다.
대회의 준비위원장은 이동휘였고, 서기는 김립이 맡았다. 준비위원회는 러시아·중국령의 반일애국단체에 대표파견을 요청하는 통지서를 발송하였다. 대회에는 크라스노쉐코프와 김알렉산드라·이동휘·김립을 비롯하여, 양기탁·이동녕·유동열·홍범도·김성무·김하구 등이 참여하였다. 대회참가자들은 러시아볼쉐비키혁명과 조선독립운동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좌우 두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졌다. 하나는 부르죠아민주주의적 또는 입헌군주제적 입장에 있던 인물들로 구성되었는데, 순순한 독립운동만을 위한 ‘光義團’을 조직하고, 원동인민위원회로부터는 후원만을 얻자는 주장을 전개하였다. 이동휘의 제안에 찬성하는 다수파는 볼쉐비즘에 찬동하고 조선혁명을 그 길로 촉진하자고 주장하여 볼쉐비키세력과의 밀접한 연대를 강조하였다.404)
이동휘의 주장에 반대한 그룹은 유동열을 제외한 이동녕·양기탁·안정근·조성환 등 신민회 간부들 대부분이었다. 결국 이동휘의 제안과 볼쉐비키세력의 주장을 지지했던 좌파그룹의 이동휘·김알렉산드라·유동열·박애·이한영·김립·오성묵·오하묵·이인섭·유스테판·오와실리·임호·전일·박이반 등이 韓人社會黨을 발기하였다.405) 이들은 1918년 5월 10일, 한인사회당 창립을 위한 한인사회당중앙위원회 확대총회를 개최하고 중앙간부를 선출하였다. 대회에서는 소비에트러시아와의 연대와 反日·反帝의 사회주의 노선을 내용으로 하는 강령을 채택하였으며, 중앙위원들을 선출하고, 조직·선전·군사 등 주요 부서를 설치하였다.406)
중앙간부위원장으로 이동휘가 선출되었으며, 그 외 중앙위원으로는 부위원장으로 김알렉산드라의 남편인 오와실리(러시아문 서기 겸임), 청년부의장으로는 오성묵, 한글서기겸≪자유종≫주필로 김립, 군사부장겸 군사학교장으로 유동열, 재무부장겸 선전부장으로 이인섭(이반) 등이 선출되었다.407) 중앙간부위원회에서는 당기관지≪자유종≫이란 잡지를 발행하기로 결정하고 책임주필은 김립이 맡았다.408) 한인사회당의 출판활동은 크라스노쉐코프를 의장으로 하고 있는 원동인민위원회에서 석판기계(1대)와 인쇄비, 종이 등을 제공하였다.409) 그리하여 1917년 5월 1일(러시아력) 한인사회당의 기관지≪자유종≫의 창간호가 발행되었다.410) 한인사회당은 장교훈련을 위한 군사학교(교장:유동열)을 설립하였으며, 김알렉산드라를 중심으로 블라디보스톡 주둔 일본군병사들을 상대로한 반제·반전사업을 전개하였다.411)
한인사회당은 볼쉐비키혁명세력의 赤衛隊활동에 참여하였다. 즉 한인사회당은 원동인민위원회의 승인과 지원하에 하바로브스크·이만, 러시아·중국 국경지대 니콜리스크·바라바시·연추(포셋트) 등 각지에 이동휘·유동열·김립·이한영 등 한인사회당 간부들이 파견되어 활발한 적위대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402) | 이영일,<리동휘 성재 선생>(手稿本, 1983), 4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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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3) | 張道政,<高麗共産黨の沿革>(手稿本), 1쪽. |
404) | 십월혁명십주년원동긔념준비위원회,≪십월혁명십주년과 쏘베트고려민족≫(해삼위도서주식회사, 1927), 46쪽. |
405) | 십월혁명십주년원동긔념준비위원회, 위의 책, 46쪽. |
406) | 반병률,<김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스탄케비치)의 생애와 활동-조선인 최초의 공산주의자의 약전>(尹炳奭敎授華甲紀念 韓國近代史論叢刊行委員會,≪韓國近代史論叢≫, 지식산업사, 1990), 788쪽. |
407) | 이인섭,<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스탄케비치)의 전기>(≪시사저널≫216, 1993년 12월 16일), 76쪽. 이영일, 앞의 글, 53쪽. |
408) | 이영일, 위의 글, 54쪽. |
409) | 뒤바보,<俄領實記>(≪獨立新聞≫, 1920년 4월 3·8일). |
410) | 이영일, 앞의 글, 54쪽. |
411) | 이인섭, 앞의 글, 68∼69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