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전로한족중앙총회
한인사회당 창당 두달여 후인 1918년 6월 13일부터 24일까지 니콜리스크에서 제2회 전로한족대표자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1918년 1월 한족중앙총회 지방대표자회에서 한족중앙총회측과 고려족중앙총회측이 5개월 이내에 헌장회의를 개최하기로 상호합의한 데 따른 것이다. 대회가 개최된 1918년 6월은 이미 시베리아횡단철도연선 주요도시에서 5월 이후 영국·프랑스의 암묵적 지원을 받은 체코군에 의한 반볼쉐비키봉기가 일어나고 있었고, 이를 계기로 ‘체코군 구출’을 명분으로 한 일본군 등 서구열강의 무력개입이 임박해 있었다. 또한 이러한 정세에 크게 고무된 러시아 반혁명세력이 재결집하는 등 볼쉐비키세력이 내외적으로 위기에 직면해 있던 시기였다.
노령의 각지방 단체대표와 학교대표 129명이 참가한 대회는 대회 의장으로 金昌元, 부의장으로 한용헌·윤해를 선출하였으며, 비입적과 입적인을 대표하는 두 원로 이동휘와 최재형을 명예회장으로 추대하었다. 원동인민위원회를 대표하여 유스테판이 축사를 하였고, 원동인민위원회 위원장인 크라스노쉐코프와 김알렉산드라가 참여하여 연설하였다. 한인사회당 대표들은 소비에트권력만이 토지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한인노동자들이 합법적 지위를 개선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소비에트정부의 지지와 승인을 얻자는 결의안을 제출하였다. 또한 한인사회당 대표들은 전로한족회의 중앙총회를 개선하고 중앙총회의 본부를 소비에트 볼쉐비키세력의 본거지인 하바로브스크로 이전하려고 시도하였다.412)
한인사회당의 시도는 사회혁명당의 영향력을 받고 있던 입적인 중심의 다수파가 헌법제정의회와 시베리아지방의회를 지지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좌절되었다. 사회혁명당계열의 한인사회당은 비입적 소작농 대표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이들이 대회에 오랫동안 머물지 못하고 대회를 떠남으로써 수적인 열세가 더욱 심화되었다.413) 이 대회는 시세문제·토지문제·이주지문제·토지에 대한 배상문제·교육문제·노동문제 등에 관한 결의를 하였다.
첨예한 대립과 논쟁은 시세문제와 토지문제에 대한 토론에서 이루어졌다. 시세문제에 관한 토론에는 41명이 연사로 참여하여 열띤 논전을 벌였는데, 제출된 3개의 결의안 중에서 68명의 대표가 찬성한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즉, 대회는 “자유·평등·우애를 근본으로 하야 민족의 자립생활 수행을 위하여 대러시아혁명에서 얻은 바를 일심단체하야 표방하기로” 하고 ‘우리의 자유만세’, ‘러시아혁명만세’, ‘사회주의만세’를 슬로건을 채택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결의내용은 볼쉐비키정권에 비판적이면서도 이에 도전할 수 없는 고충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대회의 결의는 “한편으로 현존하는 권력에 승복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최종적인 승자의 편에 서고자 중립을 내세운 것”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 한인사회당의 소비에트정권 지지결의안을 무마하기 위해 채택된 이러한 중립선언은 러시아 원동지역의 소비에트 볼쉐비키세력이 내외의 반혁명세력에 의하여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는 사실상의 반볼쉐비키선언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한인사회당 대표들의 대회 탈퇴는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였던 것이다.
대회에서 한인사회당의 열세는 대회의 마지막날인 6월 22일·23일에 선출된 한인사회당 계열이 전로한족회중앙총회의 주요간부로서 선출되지 못하였던 데서 단적으로 확인된다. 대회에서 선출된 새로운 중앙총회간부로는 회장 문창범, 부회장 윤해·채안드레이, 고문 최재형·이동휘, 원동인민위윈회 외교부 파송대표 한용헌·박진순, 상설위원 김츄프로프·김야곱·원세훈·한여결, 상설위원 후보위원에 강량오·김이직·염피토르, 검사위원에 고창일·엄주필·한미하일, 후보검사위원에 김기룡·김철훈·김미하일 등이 선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