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시베리아 내전과 민족운동
제2회 전로한족대표자회 폐회 직후인 6월 29일, 블라디보스톡에서 체코군이 반볼쉐비키봉기를 일으킴으로써, 극동 각 지역의 볼쉐비키정권들이 무너졌다. 이어 8월초부터 일본·미국·영국·프랑스 등 열강이 무력개입을 개시함으로써, 한인사회당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특히 일본군은 체코군·백위파군과 협력하여 볼쉐비키정권을 붕괴시켰다.
체코군이 봉기하자 한인사회당의 전일·유동열 등이 100명의 조선인 적위대를 이끌고 러시아적군과 함께 우수리전투에 참가하여 연합군과 합세한 카르미코프 백위파군과 싸웠다. 한인적위대원들은 반수 이상이 전사하였다.414) 이동휘 등 한인사회당의 주요간부들은 북만주나 농촌지역으로 도피·잠복하였다. 볼쉐비키 하바로브스크시당을 책임지고 있던 김알렉산드라는 1918년 9월 16일 카르미코프 백위파군에게 도피중 잡혀 처형되고 말았다.
1918년 중반기에 있었던 체코군의 반볼쉐비키 봉기로 각지에 성립되었던 사회혁명당 주도의 중간파정권들은 점차 열강들의 무력개입을 계기로 득세하기 시작한 백위파세력에 의하여 교체되어갔다. 마침내 1918년 11월 중간파 주도의 옴스크정부가 콜챠크제독의 군사쿠데타로 붕괴된 이후, 1920년 초 볼쉐비키혁명세력이 백위파세력을 구축하게 되기까지 시베리아는 한인민족운동에 탄압적인 백위파의 천하가 되었다. 한인사회당 당원들은 러시아 볼쉐비키세력과 함께 농촌지역이나 지하로 잠입하였고, 사회혁명당계열의 전로한족중앙총회는 적극적인 활동을 삼가하면서 가까스로 합법적인 지위를 유지하여 나갔던 것이다.
이들 노령의 한인조직들이 활동재개의 기회를 맞게 되는 것은 1918년 말 1919년 초의 일로서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파리강화회의 개최를 계기로 국내외민족운동이 활성화되면서부터이다. 3·1운동을 전후로 하여 국내외 민족운동의 분위기가 한층 고조되면서 전로한족중앙총회와 한인사회당은 전체민족운동선상에서의 주도적 위치를 확보하고자 적극적인 조직정비와 활동에 서게 된 것이다. 백위파정권하에서 합법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던 전로한족중앙총회는 파리강화회의에 2명의 대표를 파견하는 한편, 노령과 북간도지역의 민족운동세력을 결집하여 체코슬로바크키아의 국민의회를 모델로 한 大韓國民議會로 확대·개편함과 동시에 3월 17일의 연해주지역의 독립시위를 주도함으로써 임시정부적 기관을 자임하게 된다. 한편 지하로 잠입했던 한인사회당은 이동휘를 비롯한 간부들이 블라디보스톡으로 재집결하면서 활동재개를 모색하게 되고, 3·1운동 이후인 4월말 한인사회당대표자대회를 개최하고 新民團과의 합동을 통해 조직을 확대 재건하게 되는 것이다.
<潘炳律>
414) | 반병률, 앞의 글, 79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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