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한인사회의 형성과 생활상
독립운동의 기반으로서 해외 한인사회의 형성은 국권상실 전후부터 본격화되었다. 한인들은 중국·러시아·미국·일본 등지로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났다. 압록강·두만강 건너 간도와 연해주에는 한인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마련되었고, 한인의 이주지역은 黃河와 長江 이남으로 확대되었다. 상대적으로 국내와의 거리가 가깝고 교통이 편리한 중국 동부와 북부의 대도시에는 한인 거주지역이 형성되었고, 친목단체와 교육기관이 태동하였다. 이 중 현저한 양상을 띤 곳이 상해였다.418)
상해로의 이주경로는 육로와 해로 두 갈래가 있었다. 육로의 경우, 대체로 신의주를 거쳐 열차편으로 瀋陽(奉天)·營口 등지를 경유 천진에 이르러, 다시 열차나 선편을 이용하는 경로가 있었다. 이 경우에는 濟南과 靑島가 경유지가 되었다. 해로의 경우, 인천이나 부산에서 직항하거나, 인천·진남포에서 중국의 裡島나 烟臺를 거치는 경로가 있었다.
1910년대 초반 상해에는 소규모의 한인사회가 형성되었고, 대부분의 한인은 상업에 종사하거나 영국·미국인 경영의 전차회사 등에 근무하였다. 1917년 중반의 한인 수효가 500여 명으로 파악되며, 3·1운동과 임정수립 시기에는 1,000여 명에 이른 것으로 추산된다.419) 반면에 1910년 이전 거주한인의 수효는 50명 정도로 추정된다. 초기에는 독신남성의 비율이 높았으나. 점차 가족을 동반한 이주자의 수효가 증가하였다. 이들은 중국 동북지역 이주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교육수준이 높았고, 경제적 상황도 나은 편이었다. 이주한인의 대다수는 강한 반일정서의 소유자였다. 이주 목적은 취업·유학·독립운동 등 다양한 형태를 띠었으나, 국권피탈과 일제침략이라는 공통의 이주동기를 배경으로 하였다. 때문에 한인사회는 여타 외국인사회에 비해 강렬한 정치의식을 표방하였으며, 이러한 경향은 1932년 윤봉길의거시까지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한인들은 기독교·대종교 등의 종교활동을 통해, 상호부조와 단결의 기틀을 마련해 갔다. 기독교의 경우, 1914년 10월 寓滬韓人禮拜會 모임을 조직하였으며, 정기적인 주말예배 행사를 갖는 등, 활발한 움직임을 펼쳤다. 대종교의 경우도 申圭植·趙琬九·金枓奉·朴贊翊 등을 중심으로 하여, 御天節·開天節·國恥紀念日 행사 등을 주관하였다. 이러한 종교의식에 근거한 행사는 한인들의 단합과 경각심을 촉구하는 데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의 정신적·사상적 기반으로 역할하였다.
거류민 조직으로서의 한인단체가 결성된 것은 1918년 가을이었다. 呂運亨과 申錫雨 등의 주도하에 조직된 上海高麗僑民親睦會의 출현은 한인사회의 집단의식과 동질성 확보라는 측면에서 의미있는 사실이었다. 100여 명의 회원이 가입하였으며, 젊은 회원을 중심으로≪우리들 소식≫이라는 선전기관지를 발행하였다. 친목회는 신한청년당의 내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기여하였다.
“상해 재류 동포의 情誼를 敦睦함으로써 主되는 목적을 삼아” 결성되었으며, “농후한 독립운동의 색채를 띠었다”는420) 친목회에 대한 평가는 한인사회가 상해 소재 외국인사회의 일원으로서 정치적·민족적 성격을 띠었음을 반영한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함께 그 산하단체로 편입되었고, 이해 9월 22일 上海大韓人民團으로 개편되었다.
또 신규식·曺成煥·朴殷植·閔忠植이 중심이 된 棣華同樂會라는 한인조직이 있었다. 거류한인의 단결 및 재외 한인단체와의 연락 등을 도모하였으며, 중국청년회관이나 중국학생회관 등을 빌려 모임을 가졌다. 1916년 중반 일제기관은 이 단체의 성격을 “사교구락부와 유사한” 것으로 파악하였다.421)
이외에 한인사회에서 비중이 높았던 것이 학생단체였다. 한인의 높은 교육열을 배경으로 하여, 1910년대 초반부터 상해 일원에는 중국 및 구미지역의 대학에 유학하려는 한인이 적지않게 모여들었다. 1912년 文一平은 南京에서 십 수명의 유학생을 목격하였다. 중국혁명의 진전에 따라, 이들은 1913년 후반기 한때 상해로 이동하기도 하였는데,422) 당시 남경지역의 한인은 신규식 등 상해 한인세력의 영향권내에 있었다.
1910년대 상해와 인접지역에 소재한 南洋公學·復旦大學·金陵大學·東吳大學 등을 비롯하여, 鑛學校·鐵路鑛學校·商船學校·海軍水雷學校·농업학교·전신학교·군수학교·체육학교 등 각급 고등교육기관에는 많은 한인학생이 재학하였다. 학생조직으로는 1915년의 上海韓人留學生會가 시초인 것 같다. 회원은 李康熙·申國權 등 55명이었다고 한다. 한인학생들은 독자적인 학생회를 조직하였으며, 중국인 학생활동에도 참가하였다.423)
418) | 이에 대해서는 孫科志,<한인의 상해망명과 초기 한인사회의 형성>(≪한국근현대사연구≫7, 1997)이 참조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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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독립운동사자료집≫9(1975), 11∼12쪽. |
420) | ≪독립신문≫, 1920년 4월 8일. |
421)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독립운동사자료집≫9(1975), 23∼24쪽. |
422) | 문일평,<나의 반생>(≪호암전집≫3, 일성당서점, 1948), 496쪽. |
423) | 민필호,<대한민국임시정부와 나>(김준엽 편,≪石麟閔弼鎬傳≫, 나남, 1995), 55·72쪽. 국사편찬위원회 편,≪한국독립운동사≫자료 3, 임정편 Ⅲ(1974), 565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