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민족교육기관의 설립과 인재양성 활동
1910년대 상해지역 한인사회의 교육기관으로는 博達學院과 仁成學校가 대표적이다. 박달학원은 1913년 12월 17일 개교하였으며, 중국 혹은 유럽·미국지역 대학의 진학을 희망하는 한인유학생의 외국어 실력 향상을 돕기 위한 예비교육기관이었다. 운영은 신규식이 주도하였으며, 소재지는 프랑스조계였다. 동제사의 부설기구 성격을 띠었다. 박은식·신채호·홍명희·문일평·조소앙·조성환 등과 중국인 農竹과 미국 국적의 화교 毛大衛 등이 교사로 참여하였다. 교육기간은 1년 6개월이었으며, 영어·중국어·지리·역사·수학 등을 가르쳤다. 세 차례에 걸쳐 100여 명 이상의 학생을 배출하였다.445)
한편 한인사회가 안정되고 가족을 동반한 이주민의 수효가 증가함에 따라, 이주민 자제의 교육문제가 과제로 대두되었다. 언어장애로 중국인 학교에 보낼 수도 없었고, 더더욱 일본인 학교에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인 자력에 의한 교육기관 설립 노력은 1916년 가을 인성학교의 개교로 실현되었다. 여운형·선우혁·한진교·김철 등은 교민교육기관의 설립을 결의하고, 1916년 가을 上海韓人基督敎小學校를 개교하였다. 4명의 학생으로 출발한 이 학교는 이듬해 가을 2월 공공조계 昆明路 載福里 75호로 이전하여 인성학교로 개명하였다. 재정적 기반이 취약하여 경영상의 어려움이 컸으며, 1918년 10월에는 공공조계 소재 미국인 운영의 明强中學내로 이전하였다.446)
각국의 문화와 풍습이 혼재되어 있는 국제도시 상해에서, 반일독립의 민족주체적인 교육이 실시되어야 한다는 공감대의 형성은 당연한 일이었다. “교육은 우리민족의 생명이다. 교육이 있어야 살고 교육이 없으면 죽을 것이다”, “장래 우리민족 흥왕의 길은 오직 교육에 있다”447)는 신념은 인성학교 설립의 밑받침이 되었다. 교육내용은 국어·국사·지리에 역점을 두었고, 일본어는 사용이 금지되었다. 이와 함께 영어·한문·산술·이과·手工 등이 교육되었다. 상해고려교민친목회 설립 후에는 이 친목회 교육부 소관이 되었고, 임정수립 후에는 상해한인교민단에 의해 운영되었다. 1920년 가을학기에는 입학희망 학생이 40여 명에 이를 정도로 발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