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대동단결선언과 임시정부수립 지향
<대동단결선언>은 1917년 7월에 발표되었다. 발기인 14명은 신규식(申檉)·조소앙(趙鏞殷)·신석우(申獻民)·박용만·한진교(韓震)·홍명희(洪煒)·박은식·신채호·윤세복·조성환(曹煜)·朴基駿·申斌·김규식(金成)·李逸(李龍爀)로 밝혀졌다. 발기인은 대체로 대종교·동제사·신한혁명당과 관계가 깊은 인물들이었다. 선언의 요지는 민족통일기구 결성과 임시정부 수립이었다. 작성자는 조소앙으로 알려지며, 선언의 중요성과 제안의 절차 등을 고려하면 신규식·박은식·신채호·박용만 등의 비중이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언의 배경으로는 당시 국제환경에 대한 평가 측면을 살펴볼 수 있다. 1916년 북경정부의 붕괴와 호법정부의 득세, 1917년 2월의 러시아혁명 발발과 핀란드·폴란드 등 피식민지국가의 해방, 미국의 대독 선전포고와 독일의 패전 전망 등은 한인독립운동세력으로 하여금 ‘신한혁명당식’ 국제외교 방안에서 일전하여, 독립운동의 활로를 개척해야 할 필요성을 자각케 하였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와 함께, 독립운동진영의 상황도 새로운 전환의 필요성이 점증되고 있었다. 권업회·대한광복군정부·간민회·부민단 등 국외독립운동단체들이 해산되었으며, 신한혁명당에 의한 망명정부 수립 시도가 무산되는 등의 상황은 독립운동계의 분발과 재편성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내외의 요구에 호응한 독립운동세력의 임시정부 수립 노력이<대동단결선언>으로 구체화돠었던 것이다.
선언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합하면 설 수 있고, 나뉘면 넘어지는 것은 天道의 원리이며, 나누어짐이 오래되면 합하고자 하는 것이 인정의 律呂이다”, “대합동을 요구함이 자연의 의무요, 총단결을 주장함이 당연한 권리이다”라고 대동단결의 필연성을 전제하였다. 그리고 “융희황제가 三寶를 포기한 8월 29일은 우리 동지가 삼보를 계승한 날”로서, 皇帝權이 소멸한 때가 곧 民權이 발생한 날이며, 대한제국 최후의 날이 신한국이 처음 시작되는 날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민권의 대동단결체로서 독립운동세력의 통일전선 결성을 제안하였다. “국가 상속의 대의를 선포하여, 해외동지의 총단결을 주장하며, 국가적 행동의 進級的 활동을 표방하며”, “첫 번째의 통일기관은 두 번째 통일국가의 연원이 되고, 두 번째 국가적 과제는 결국 원만한 국가의 전신이 되는 것이다”라고 규정함으로써, 독립운동의 구심체로서 통일기관의 건설이 민족통일국가 수립의 출발점이 되는 것으로 평가하였다.
선언의 요지를 살펴보면, 융희황제의 주권 포기를 단정함으로써 조선왕실의 존재를 신국가 건설의 도정에서 배제하였다. 이는 신한혁명당 등에 의해 견지되었던 입헌군주제 노선을 종결시키고 국민주권 노선으로 나아갔다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대안으로서 독립을 위한 전단계로 임시정부와 같은 조직을 만들어야 하고, 이를 위한 통일기구를 구성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선언에서 표방된 국민주권론은 구한말 전래된 이래 공화주의 이념의 전거로 역할해 왔다. 하지만 이 논리가 서양의 천부인권설이나 사회계약설에 입각하였던 데 반해, 대동단결선언에서의 국민주권론은 “민족사적 정통을 의식한 논리”로 전개되었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강령은 해외 각 지역의 단체를 하나로 통일하여, 유일무이한 최고기관을 조직한다. 중앙 총본부를 설치하여 한민족 전체를 통치하며, 각지 지부로 관할구역을 정한다. 헌법을 제정하여 민의에 부합하는 법치주의를 실행한다. 독립·평등의 신성한 통치권을 주장함으로써, 일제의 민족동화와 자치 유혹을 방지·제거한다. 국민외교를 전개한다. 민족통일기구의 존립을 뒷받침하기 위해 동지들 간의 애정을 수양한다. 각 단체대표 및 지도적 인물의 회의에서 실천방법을 결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민족대회의 혹은 임시의정원의 조직, 거류민단 혹은 연통제의 조직을 통한 통치체제 구축, 공화제 헌법의 제정과 법치주의 시행, 국내의 친일경향 대두와 독립의지 퇴조에 대한 대책 등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들은 국권피탈 이후 국내정황을 지적하여 “반일반한의 괴물이 날로 증가하여” 동화와 자치의 논리를 내세우며 그 선봉이 되고 있다고 우려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임시정부 수립론은 독립운동의 이론적 결집과 계몽적 측면에서도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하겠다.
선언서는 블라디보스톡·니콜리스크·하와이·샌프란시스코와 만주·북경·상해 등지 독립운동세력에게 송달되었으며, 발송지는 상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 선언서의 수령자로는 미주의 안창호와 블라디보스톡≪한인신보≫총무였던 金秉洽만이 확인된다.
이 선언에서 강조되는 ‘大同’이라 함은 동양의 전통적인 가족제도·사유재산제·남녀차별·직업상의 귀천·계급제도와 인종차별·국가간의 불평등 등을 배격하고, 완전 평등의 이상세계를 이룩하자는 의미로 이해된다. 1909년 박은식이 康有爲와 梁啓超의 영향하에 大同敎를 창건한 바 있었고, 1913년 조소앙의 주도하에 결성된 한·중 연대단체인 아시아民族反日大同黨의 존재나 1915년의 大同輔國團 등은 대동사상이 이 시기 한인독립운동의 흐름에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음을 알려준다. 즉 1910년대 대동적 평등사상이 조소앙 등에 의해 집약 논리화된 것이 이 선언이며, 이후 조소앙의 三均主義 이념이나 민족사회주의 사상의 모태가 된 것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이 선언에서 역설한 임시정부 수립론은 1910년대 초반 미주 한인사회 일각에서 제기된 ‘無形國家論’을 비롯한 임시정부 수립의 열망을 반영한 것으로도 이해되며, 제1차 세계대전의 국제정세 변화를 주시하며 공화정체의 국민국가를 건설하려 한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아울러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선행단계로 제안한 민족대회의 소집 제안 또한 1919년 3·1운동 시 국내외에서 시도된 임시정부 수립운동의 모태가 되었다고 하겠다.450)
450) | 대동단결선언에 대한 연구성과로는 조동걸,<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1917년의 ‘대동단결선언’>(≪한국민족주의의 성립과 독립운동사연구≫, 지식산업사, 1989)이 대표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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