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신한청년당과 공화주의 노선의 정립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에 따라, 한인세력은 국제정세 변화에 대한 대응을 적극화하고, 독립운동진영의 정비를 꾀하였다. 1917년 8월 萬國社會黨大會 개최시, 신규식·조소앙 등은 ‘朝鮮社會黨’ 명의로 전문을 발송하여, 모든 민족의 정치적 균등, 국제정의의 실현, 피압박민족의 원상복귀, 국제적인 한국독립의 실현 등을 의제에 반영토록 요구한 바 있었다. 동제사 회원을 중심으로 한 청년지사들은 1918년 여름부터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독립운동의 진로 설정에 몰두하였다. 이들은 세계대전의 종결을 새로운 기회의 도래로 파악하고, 외교활동을 통한 독립운동노선을 채택하였다. 일본이 전승국으로서 국제적 영향력이 증대된 사실은 한인들로 하여금 외교활동 중심의 독립운동노선을 선호하게 만들었다.
특히 “민족자결주의가 이제는 세계적 풍조이므로, 이 기회에 독립운동을 하면 반드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므로 … 소리를 크게 하여 한국인이 독립을 욕구하는 의사를 표시하지 않으면 안된다”451)는 기대감을 확산시켰다. “민족자결주의가 피압박 민족에 대해서는 해방을 강조한 것이므로, 약소민족에게는 절호의 기회이다”452)라는 윌슨의 특사 크레인(Charles R. Crane)의 공언은 열강외교를 통한 가능성에의 기대감을 고조시켰다. 여운형 등은 파리강화회의를 기회로 독립운동을 일으키고,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승전국의 식민지에도 적용토록 유도한다는 방침을 정하였다. 국제정세의 변화를 독립운동에 유리하게 활용한다는 판단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같은 제1차 세계대전 종결 후 국제정세 인식이 신한청년당 결성의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신한청년당은 1918년 8월 무렵에 결성되었다.453) 여운형이 대표 겸 총무로 초기 활동을 관장하였고, 김규식·김철·서병호·선우혁·조동호·장덕수·한진교 등이 주요 참여인물이었다. 대다수의 당원이 동제사 회원이었고, 같은 시기에 출범한 상해고려교민친목회와도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조직으로는 서무부·교제부·재무부가 있었고, 나중에 토론부·체육부·출판부 등이 증설된 것 같다. 당원들은 신민회계열의 공화주의 및 기독교도가 주류를 이루었고, 3·1운동 이후 회원수가 50여 명을 상회하였다. “조국독립을 위하여 죽음을 맹세하는” 단원으로 구성된 소수정예주의를 표방하였다.
결성 취지문에서는 “우리 사업의 시초는 독립을 완성함에 있도다. … 그러나 독립의 완성이 우리 목적의 전체라 말하지 말지어다. 이는 오직 우리 사업의 시작이니, 우리에게는 독립 이상의 중요한 사업이 있도다. … 우리민족을 근본적으로 개조하여 선하고 정대하고 충실하고 정직하고 애국심 있고 박애심 있고 고달한 이상을 포부하는 신대한 민족을 이루어야 하나니라. … 마침내 단군의 피에서 나온 신문화가 전인류에게 위대한 행복을 주기에 이르기를 기할지니라”라고 선언하였다.
당헌에서는 인류문화의 증진과 평등·자유·순결·박애의 실현을 목적으로 설정하였다. 당강에서는 “대한국 독립의 완성을 기도함. 내외 신구사상을 취사융합하여 건전한 국민사상의 기초를 확정하며 학술과 기예를 장려하여 세계문화에 공헌하며 아울러 사회 각항 제도를 개량하여 대세에 순응케 함. 세계대동주의의 실현에 노력함”을 표방하였다. 새로운 민주공화국의 수립, 사회제도의 개혁, 국제강권주의와 제국주의 반대, 평등과 평화에 입각한 인류사회 건설을 표방함으로써, 이념적 기반이 민족주의·민주주의·공화주의·사회개혁주의·국제평화주의 등에 토대함을 알려준다.
주요 활동은 파리강화회의와 윌슨 미국대통령을 상대로 한 독립청원이었다. ‘신한청년당 대표 여운형’ 명의로 1918년 11월 28일 작성된<독립청원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크레인을 통해 윌슨에게 보낸 문서는, 한국이 고대로부터 일본에 선진문명을 전해준 문명국이었으나,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정신적·정치적·경제적 방면에서 억압받고 있음을 폭로하며, 미국의 원조를 요청하였다. 강화회의 제출 문서에서는, 일본의 한국침략 과정과 한국민의 저항, 일제 식민지배하 한국민의 참상 등을 밝힌 다음, 합병조약의 무효 선언과 한국문제 토의를 요구하였다.
파리강화회의는 1919년 1월 12일부터 6월 28일까지 열렸다. 김규식은 1919년 2월 1일 상해를 출발, 3월 13일 파리에 도착하였다. 샤토당街 38번지에 ‘평화회의 한국민 대표관’을 설치하였고, 이어서 헐버트(Homer B. Hulbert)·李灌鎔·金復·黃玘煥·조소앙·여운홍 등이 합류하였다. 이들의 임무는 각국 대표로부터 한국에 대한 동정과 지지 확보, 일제 무단통치하 한국사정 폭로, 일본의 중국·몽고·필리핀·인도 등에 대한 침략야욕 폭로, 극동문제에 있어서 한국의 지리적·전략적 중요성 홍보, 유력한 언론기관의 협조를 통한 한국에 대한 동정적 여론 조성, 파리·런던·샌프란시스코 등지의 홍보관 설치, 한국해방에 대한 정식 청원서 제출 등이었다.
대표단은 5월 10일 평화회의측에 한국민의 주장을 알리는 성명서를 제출하였고, 그 사본을 각국 원수와 국회·정부 및 주요 정치가·언론기관 등에 발송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후 김규식과 이관용은 ‘평화회의 대한민국위원 겸 파리위원’의 자격으로 활동하였다.
이와 함께 국내외 각지에도 대표를 파견하여 파리강화회의 대표의 활동자금 모금과 독립운동의 적극화를 도모하였다. 선우혁·김철·서병호·김순애·장덕수·백남규·여운형 등은 국내와 동경·만주·노령 등지에서 당지 독립운동세력을 상대로 반일운동의 실행을 촉구하였다. 이들은 신한청년당 대표의 파리강화회의 파견사실을 통보하며, 이를 뒷받침하는 거족적 반일운동의 전개를 독려하였다. 이같은 신한청년당의 밀사파견은 2·8독립운동과 3·1운동의 자극제로 작용하였다. 이후 신한청년당원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주도적으로 준비하고, 임시의정원과 내각에 실무요원으로 참여하여, 수립 직후 임정의 중심세력으로 역할하였다.454)
지금까지 살핀 독립운동단체의 활동은 1910년대 중국 관내지역 독립운동의 질적 변화와 발전 과정을 보여주었다. 동제사와 신한혁명당의 결성과 활동 과정을 거치며, 한인세력은 복벽주의 및 입헌군주론적 인식을 극복해 갔다.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과 열강의 중국침략 추이를 주시하는 동시에, 중국 신해혁명의 참여를 통해 근대 민족운동의 이념적 지향에 대한 자각에 이르렀다. 그것은 시민민주주의에 입각한 공화주의 정치체제의 수립으로 요약될 수 있다. 또한 중국지역 독립운동의 환경조건을 반영하는 사실이기도 하지만, 한인들은 중국혁명의 성공을 한국의 독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평가하고, 기꺼이 중국혁명에 참가하였다. 이와 함께 신한혁명당의 창당과 활동 사실은 일면 국제정세 인식에 대한 미흡한 측면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국제적 역학관계를 이용하여 한국의 독립을 도모하였던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는 독립운동세력이 특정한 국제노선이나 이념에 기울지 않고, 한국독립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실용성과 현실적 판단에 충실하였음을 알려준다.
그리하여 신한청년당의 단계에 이르면, 한인세력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의 재편성 과정을 한국독립의 호기로 판단하고, 파리강화회의와 대미외교 등을 통한 외교활동의 강화 쪽으로 독립운동의 진로를 설정하게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기활동이 외교활동 노선에 비중을 둔 사실도 이같은 1910년대 중국 관내지역 독립운동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었다.
요컨대 1910년대 중국 관내지역에서 전개된 한인독립운동은 신해혁명으로 대표되는 중국근대사의 역동성과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국제질서의 변천이 주요한 배경으로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한인민족운동이 세계사적 흐름과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음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임정수립 직후 독립운동세력의 활동이 중국 군벌정권과 민국 혁명세력을 상대로 한 국제연대 활동의 강화와 워싱턴회의 등 국제질서의 재편성 움직임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려는 노력 등으로 구체화된 사실은 1910년대 독립운동의 교훈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韓相禱>